소설리스트

1화 (1/120)

제1화

눈을 떴을 때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기분.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런 멋진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매일같이 읽어 왔다. 그렇기에 도입 부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클리셰인 눈떠 보니 소설 안! 이란 전개는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커다란 천장, 푹신한 이불과 햇살이 들어오는 이 넓은 방.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것같이 가벼운 몸까지.

예상이 맞다면 나는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되는 건가.

이 몸은 내 몸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원래의 나 역시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갑자기 불현듯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이 스며들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태어났을 때, 그리고 1살, 2살,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 듯 떠올랐다.

엘르 나타시아.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이렇게까지 몸이 예민하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꿈에서 다른 생을 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니 꽤 당황스럽긴 했다.

일단, 내 자신이 정말 존재했던 사람인지가 불분명했다.

분명 나인데 두 가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나는 내 손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부정할 수 없게도 이곳은 내가 있었던 곳과는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익숙해.”

거울을 빤히 쳐다보니 역시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내가 서 있었다. 염색을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예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꽤 예뻤다.

아, 스스로 말하기엔 좀 그렇긴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지금 꽤 혼란스러운 상태다. 하지만 별개로 내 외모에 놀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5살처럼 보였다.

다행히도 혀 짧은 소리 낼 나이는 지났나 보다. 그런데도 나는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아아, 정말 이게 무슨 일이야.”

목소리를 뱉어 보니, 또박또박 발음을 잘했다.

육아물에 빙의 되었다면…… 항마력이 딸려 입을 꾹 닫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해서 신기한 눈동자로 내 곳곳을 살펴봤다.

‘곱게 자란 티가 나네.’

어린아이였지만, 부족함 없이 자란 듯 보였다.

나는 빤히 내 얼굴을 보다가 창피해져 고개를 돌렸다.

“엘르 나타시아 아가씨. 기침하셨나요?”

아, 이 시간에 늘 일어났구나. 내 몸이 자연스레 눈을 뜬 것도 이 이유였으리라.

나는 황급히 침대 쪽으로 향했다.

“들어오세요!”

어색한 표정을 지우곤 해맑은 표정으로 사람을 맞이했다.

총총총 짧은 다리로 침대로 간 나는 버둥거리며 올라가 앉았다.

* * *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잘 먹고 잘살 생각에 기뻐했건만, 지금의 나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지나치게 화려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이곳은 다름 아닌 소설 속의 악역을 맡고 있는 돈 많은 백작가의 저택이었다.

어쩐지 방치된 느낌이더라니.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몸 역시 그렇게 생활해 온 것이 익숙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에드가 드 벨루아 나타시아. 내 아버지는 리온과 제니스에게 위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두 사람을 몰아넣게 되니 말이다.

에드가는 꽤 제멋대로인 사람이었고, 인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후회 한번 하지 않았다.

시녀의 말로는 내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래는 이 정도로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데, 지금은 바뀌었다라…….

하지만 내게는 그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활개 치는 아버지를 막을 힘이 없었다.

갱생? 그것도 말이 통하는 인간이어야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잘못 말이라도 섞었다간 내 목을 칠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나는 힘없는 어린아이였다.

제 딸에게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아무리 말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곳은 부둥부둥 받는 육아물도 아니었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피폐물 소설 속이었다.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내가 아버지에게 개기다가는 아마도 내 목이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

맙소사.

머리가 띵했다.

돈이 많으면 뭐 하는가. 이걸 다 써 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말 텐데.

5살밖에 안 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아양을 떨며 비위를 맞추는 것밖에는 없었다.

‘안 돼.’

나도 패가 있어야 해.

죽어도 곱게 늙어 죽고 싶었다.

목이 잘리는 그런 비참한 죽음은 맞고 싶지도 상상도 하기 싫다.

내가 하지도 않은 짓으로 인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건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남자 주인공을 찾아야 해.’

아버지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후에 여자 주인공을 찾든 말든 일단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 목숨만큼은 구걸할 생각이었다.

‘비굴해도 어쩌겠어. 일단 살고 봐야지!’

나는 악역이 될 생각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아쉬운 쪽이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하루빨리 내 곁에 남자 주인공을 데려와야 했다.

* * *

“아가씨, 요즘 입맛이 없으신가요?”

디리아가 깨작거리는 날 발견하곤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는 내 직속 시녀로 아버지의 무관심함 속에서도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다.

유모라고 봐도 될 정도로 나와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디리아만 나를 돌봐 준 모양이다.

“으음, 그냥 어느새 가을이 왔네.”

그 말은 곧 6살이 된다는 것인데…….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귀여움을 받을 나이가 끝나가고 있다니.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아가씨, 가끔 말하는 게 애어른 같으세요.”

“그건 철없는 아버지 때문이야.”

철이 없다는 것보단, 솔직히 여전히 날뛰고 있는 짐승에 가까웠지만.

나는 짧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들짝 놀란 디리아가 눈을 커다랗게 홉뜨며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왜? 날 죽이기라도 하신데?”

흥.

짧은 콧방귀와 함께 나는 턱을 괴었다.

자기의 딸까지 죽일 인간이면 대체 얼마나 글러 먹은 거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대로 보지 않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가씨…….”

“됐어! 진부한 이야기는 넣어 둬. 어머니를 사랑해서 결혼하긴 한 거긴 해?”

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머리 아픈 인간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도 남지 않은 어머니가 궁금했다.

어쩌다 죽은 걸까. 나를 낳으면서 돌아가셨던 걸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어.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아무도 내게 말을 안 해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 조각의 기억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좀 의아했다.

“그럼요, 많이 사랑하셨어요. 아가씨께선 아직 모르시겠지만…… 백작님께서도 운명처럼 같은 문양이 나타나 사랑에 빠지셨는걸요.”

“그런 피도 안 흐를 것 같은 사람에게도 문양이 생겼어?”

그랬으니 결혼을 했겠지만. 그 막돼먹은 사람과 무슨 마음에서 결혼을 했을지 궁금했다.

“아가씨……. 요즘 들어 많이 심술을 부리시네요. 원래도 아버지에겐 관심이 없긴 했지만…….”

이곳에는 성인이 되면 각자의 몸에 문양이 나타난다. 서로에게 새겨진 문양은 반려의 증표이자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족쇄였다.

“문양이란 것은 정말로 동화 같은 존재죠.”

동화 같은 존재라니…….

디리아에겐 문양이 나타나지 않아서 환상이 있는 거 아닐까?

“문양이 안 생겼으면 평생 혼자였을지도 몰라.”

“풉. 아, 죄송해요. 사레가 걸렸어요.”

디리아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이미 난 그녀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내 말에 동의한다는 거잖아.’

결국 좋아해서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서 감정이 존재할 수 있긴 한 건가?

나는 돌연 기분이 가라앉았다. 알면 알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관이다.

“역시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날 방치한 게 분명해.”

“으음, 그것보단, 운명인 거죠!”

디리아는 최대한 내게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게다가 손뼉을 치며 사르륵 녹는 표정까지 짓는 것을 보니 문양에 대한 환상이 가득한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족쇄 같은데…… 알고 있었다지만 썩 내키지 않는 설정이었다.

‘영 께름칙한데.’

뭐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도 아니었으니, 문양 따위 나타날 리 없었다. 그것은 내 직감이었다.

“잘됐다!”

나에겐 잘된 거네.

남자 주인공은 어차피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게 될 거니 나는 다른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전생에 소설을 꽤나 읽어 왔던 나로서는 최대한 조용히 사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치 않게 여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고, 뒤틀리는 원작을 숱하게 봐 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안전하지.’

그렇게 행동할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리온을 이용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버지가 그를 찾기 전에.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내가 데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내겐 기회였다.

그를 도와주면서도 살길을 찾고, 후에 다른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을 기회.

가문의 멸망, 억울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연회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나의 결말.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리온 데이비스를 찾아 대책을 모색하는 것.

아버지와 미리 안면을 트게 하여 정이라도 쌓는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아니다. 그냥 데려와서 보지 않고 내 곁에만 두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 미친 인간을 도저히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둘이서 자연스레 가족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 만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채 가기 전에 리온을 내 손에 넣어야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