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오늘의 신부와 신랑, 샤를로테 세티야와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선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쩌렁쩌렁한 호응이 쏟아졌다.
와아아아-!
와아아-!
요제프 황태자 전하 만세-!
샤를로세 세티야 만세-!
요란한 만세 소리가 수도 비브로슈를 뒤집어 놓을 듯 우렁차게 이어졌다.
군중의 응원에 화답하고 싶다는 샬롯의 특별한 요청으로, 황태자 부부의 혼인은 마법사들이 허공에 거대한 영상을 투영하여 모두가 지켜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베일을 쓴, 분홍색 머리를 틀어 올린 오늘의 신부가 입장하자 좌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대중에 노출된 샬롯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리고 검 실력을 뽐내는 전사의 모습이었다면, 오늘 보이는 모습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늘씬한 팔다리를 몸에 꼭 맞는 얇은 천으로 가리고,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가는 샬롯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여신과도 같았다.
제롬의 팔을 쥐고 입장한 샬롯은, 이내 요제프 황태자와 만났다.
요제프는 부드럽게 웃으며 샬롯의 베일을 걷곤, 그녀의 손을 제 팔에 올리고 황제의 앞까지 남은 거리를 걸어갔다.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실까-.
여기저기서 한숨 같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릴 때의 두 사람이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형과도 같은 귀여운 커플이었다면, 지금의 두 사람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이들다운 고귀함과 총명함이 겉보기에도 엿보였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서 보기만 해도 흐뭇한 커플이었다.
요제프와 샤를로테가 단상 앞에 다다르자, 사회자가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러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세티야 가의 대표인 카밀라가 나와 요제프와 샤를로테에게 화관을 얹어 주었고, 황제가 흰 꽃목걸이를 둘에게 걸어 주었다.
“신랑,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는 신부를 아끼고 사랑하며, 엄숙한 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앞에서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는가?”
“네.”
요제프의 담담한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샬롯은 제 손을 꼭 맞잡은 요제프를 돌아보았다.
평생의 사랑.
이상할 정도로 그 단어가 가진 무게가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요제프와의 사랑을 부정해 온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가 제게 절절한 사랑을 고백해 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은 각자 정해진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에겐 주인공의 역할이, 조연에겐 조연의 역할이.
하지만 결과가 정해진 책 속 세상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맡은 소임은 주어진 것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고 배역은 바뀔 수 있었다. 남자주인공과 일개 조연이었던 제가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선 것처럼.
“신부, 샤를로테 베로스 체이커는 신랑을 아끼고 사랑하며, 엄숙한 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앞에서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는가?”
황제가 다시 한번 물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샬롯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아쉬워하던 가족들의 얼굴을.
그들의 앞에서,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수 있어서 기뻤다.
“네.”
샬롯이 대답하자, 요제프가 샬롯을 돌아보았다.
“둘은, 맹세의 키스를.”
샬롯은 고개를 들어 이제 제 남편이 될, 황태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까만 머리카락을 잘 정돈해 넘긴 요제프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수려한 선을 그리는 남자다운 얼굴이 보기 좋게 빛났다.
그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다는 듯, 제법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샤를로테.”
“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샬롯이 진심을 담아 대답하자, 요제프가 만족했다는 듯 눈을 접어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다시 한번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와아아아-!
만세-!
샤를로테 베로스 체이커 만세-!
샤를로테 황태자비 만세-!
황태자 부부 만세-!
요제프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군중들의 발 빠른 호칭 전환이 재밌어서, 샬롯은 그의 품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순간을. 이렇게까지 많은 대중에게 축복받는 순간을.
그래서 행복했다.
상상보다도 더 상상 같은 현실 속에서, 이제 줄곧 행복하리라.
* * *
“내리시죠.”
샬롯은 마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중도 기다리지 않고 마차 문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내렸다.
아직 갈아입지 못한 순백의 드레스가 바람에 아름답게 나부꼈다.
요제프와 샬롯은 황제의 배려로, 혼인 직후 딱 일주일 동안의 여행을 허락받았다. 온 국가의 큰 행사인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외국 사절과의 인사도 뒤로하고 훌쩍 여행을 떠나온 참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카밀라의 배려로 종종 여행을 다녔던 그녀였지만 신혼여행은 또 의미가 달랐다. 저를 알아보는 군중도, 화려한 궁중 생활도 아무것도 없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해변의 별장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샬롯이 구두를 벗어 던지고 바닷가의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노라니, 마차에서 내린 요제프도 구두를 한쪽에 벗어 두곤 맨발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샬롯은 천천히 다가오는 요제프의 모습을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는 하늘, 붉은 하늘의 빛으로 물들어 가는 바다, 발아래에 기분 좋게 닿아 오는 차가운 모래, 그리고 눈앞에 놓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제 남편의 모습.
이 순간이, 너무 완벽했다.
그사이 천천히 다가온 요제프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요제프에게 손이 닿는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것을 휙 피했다.
요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샬롯을 바라보더니,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또 한 번 피했다.
“……로테?”
“어? 응?”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사이에 벌써 나한테 질린 거야?”
샬롯은 요제프가 이런 것에 민감하게 구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야.”
“아니면?”
아니면…….
하지만 뭐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까지는 그와 입을 맞춰도 그냥 다 장난 같고 그가 어린아이처럼만 보였었는데…….
요제프가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해 오던 날부터는, 그게 안 됐다.
그나마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에는, 주변에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까 그래도 너무 의식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여기 신혼여행지에는 호위 기사나 시종들을 제외하면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의식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샬롯이 불평하듯 생각하는데, 요제프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큰 바닷바람이 와락 불어왔고, 요제프의 부드러운 까만 머리카락과 샬롯의 풀어 내린 긴 분홍색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윽고 요제프와 샬롯의 손이 닿았고, 그는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깍지를 꼈다. 그러곤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둘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서 부딪혔다.
“꿈 같다.”
“……그래?”
“그래.”
“뭐가?”
요제프의 까만 눈이, 샬롯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콧잔등에, 눈꺼풀 위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닥뜨리기 직전, 요제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래?”
“그래.”
더 이상의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요제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그대로 속삭였다.
“앞으로 갈 길이 멀겠지만, 네게 완벽한 연인이자 남편이 될게. 내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건 말해 줘.”
“……응.”
“아이는, 네가 원하는 만큼만 갖자. 네가 갖기 싫으면 안 가져도 괜찮고. 네 아름다운 검술이, 아이보다 소중할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원한다면 가져도 좋고.”
“……응.”
언제 그런 것까지 생각했을까.
황태자라면, 후계는 당연히 생각해야 할 텐데.
샬롯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 행복을 찾아왔잖아. 그냥, 줄곧 행복해지는 길만 생각하자.”
“응.”
“사랑해, 로테. 이제는 매일 말할 수 있어서 좋아. 사랑해, 사랑해.”
간지럽다 못해,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샬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요제프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탐했다.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키스였지만, 평소보다 짙었다.
기분이 붕 떴다. 입속 가득, 설탕 과자를 물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샬롯은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부드러운 풀 내음이 나는 키스도,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요제프의 손도, 아직 귀에서 뱅뱅 맴도는 사랑한다는 말도, 바닷물이 밀려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소리도…….
그 누구의 발자국도 없는 바닷가에 단둘이 함께 서 있는 것도…….
너무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둘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자, 샬롯이 요제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속삭였다.
“요제프.”
“응.”
“나는 두려웠던 적이 없었어.”
“뭐가?”
“그런데, 너무 행복하면, 이 행복을 잃을까 봐 두렵구나. 그걸 오늘 알겠어.”
요제프가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자.”
“응.”
“행복을, 잃지 않아도 되는.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그래.”
처음에는, 작중에 나오는 예고된 불행들을 피하기 위해서만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원작의 줄거리와는 아주 멀리 와 버렸다.
샬롯은 요제프의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 세례를 다시 한번 받으며, 눈을 휘어 웃었다.
지금은 단지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고 있었다.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