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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공녀님 (122)화 (122/123)

122.

매일같이 보는 샬롯이지만, 이런 드레스 차림을 한 걸 보는 건 또 처음이라 그럴까.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결혼 축하해.”

아이작이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샬롯이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가, 이런 곳에 와도 괜찮아?”

“그럼요. 어후, 온종일 인형처럼 서 있으라고 주문하는데 지긋지긋해서 잠깐 나왔어요.”

여긴, 황궁 앞 정원에 우뚝 서 있는 첨탑이었다. 아주 긴 계단을 밟아 올라와야 하는.

이런 드레스 차림으로 어떻게 왔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샬롯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다 다른 질문을 했다.

“이렇게나 많은 군중 앞에서 결혼하는데, 어떤 생각이 들어? 부담스럽진 않아?”

샬롯이 아이작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사랑받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요. 감사하다는 생각도.”

그는 조금 놀랐다.

투정을 부리는 것치곤, 역시 샬롯은 생각이 깊다.

샬롯에겐 매번 놀라지만, 또 계속 놀라게 된다.

공작가의 직계 막내딸로 태어났음에도, 이상하리만큼 겸손하고 이상하리만큼 시야가 넓다.

그래서 샬롯이 한참 어림에도, 항상 배우게 된다.

아이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샬롯의 손을 다시 한번 당겨 그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오라버니?”

“내가 가주가 되어도, 그건 널 위해서야.”

“……네?”

“결혼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티야 가가 네 뒤에 있다는 건 잊지 마. 언제나, 네가 기대도 좋은 언덕이 거기 있을 테니까.”

샬롯은 그런 말을 들으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그에게 안겨 들었다.

“오라버니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에요.”

“네게만 그런 거야.”

“응. 알아요. 그 점도, 고맙게 생각해요. 정말로…… 오라버니가 검 바보여서 다행이야.”

아이작이 픽 웃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샬롯은 그런 아이작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탑 아래에 잔뜩 모여든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종알거리듯 말했다.

“정말, 모든 게 다 바뀌었어요.”

“그래.”

“오라버니가, 제게 제일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라는 걸…… 오라버니는 기억 못 할 거예요. 그래도 그게 저한텐 정말 소중했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아이작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기억이야 하지만, 아이작도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날 이전에 낭비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중한 샬롯이었지만, 그때까지는 정말 샬롯이 무슨 일을 당하건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 미안함은, 행동으로 갚으면 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 다 컸다 싶다가도,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굴기도 하는 사촌 동생이 너무 기꺼웠다. 너무 소중했다.

가주가 되는 것을 복수가 아닌 책무라 느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것조차 좋았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그런 일인 모양이었다.

* * *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만세 행렬이 이어지는 한편으로, 황궁의 뒤편에서는 초라한 행렬이 황궁을 출발할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사두마차 세 대가 전부인 그 조촐한 행렬의 앞에는, 황제와 아렌느 황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먼 여행길에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시구려.”

황제의 부드러운 음성에,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만 들어서는 원해서 떠나는 여행인 것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아니었으니까.

황태자가 정해진 당일 밤, 아렌느와 함께 처소를 찾은 요제프 황태자가 제게 명하듯 수도를 떠날 것을 권해 왔었다. 치욕스럽기 짝이 없게도.

“……반드시 이런 식으로 저를 떠나보내셔야 마음이 편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의연을 가장할 힘조차 없다는 듯 황후의 목소리는, 분노와 비참함으로 잘게 떨렸다.

산체스 황제는 오랫동안 제 황후였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동정과 미안함도 섞여 있었지만, 그는 절대로 의견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황후도 알리라 생각하오. 이것이 나와 요제프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라는 걸.”

“폐하.”

“다시 수도에 온다면 재판대에 오르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이게 될 것이오. 다시는 수도에 발을 딛지도 말고, 괜한 분란을 조성할 생각도 말고 그저 없는 듯 조용히 사시오.”

황후의 입가에 쓴웃음이 매달렸다.

괜한 분란.

뻔한 이야기였다.

이제 요제프가 황태자가 되었으니, 어린 시절의 그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황후는 이제 퇴장할 때가 되었다는 거겠지. 그를 암살할 계획까지 꾸몄던 황후는, 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겠지.

황후는 고개를 들어 황궁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혼인이라는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황궁 건물에는 특별히 국기와 함께 군중들이 요제프 부부를 응원할 때 쓰곤 하는 붉고 검은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느니, 그녀의 처지에서도 떠나는 게 나을 터였다.

다만, 패배한 채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게 죽도록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다 이긴 판이었는데. 끝의 끝까지 갔더라면, 이길 수 있는 판이었는데.

도대체 요제프는 제가 약속한 이권 이외에 무엇으로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걸까.

황후의 시선이 황제를 떠나 아렌느 황비에게 가 닿았다.

이제 황궁의 주인이 될 생각에 득의양양해야 할 아렌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자신을 쏘아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황후를 내쫓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소. 이딴 식으로 나를 내치고, 잘 살아 보시오. 황후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내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것을 조율해 왔는지. 어디 잘 살아 보시오.”

셀렌 황후가 마지막으로 독한 말을 쏘아붙이자, 아렌느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의 그늘에서, 거슬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를 쳐 버리고, 가장 좋은 결과물만을 쥐여 주는 황후 폐하의 그늘에서…… 리카르도 황자가 자랄 수밖에 없던 것이 패배의 이유입니다.”

“……뭐라고?”

황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저를 가르치려 드는 아렌느를 노려보았다.

아렌느가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한번 말했다.

“항상 거슬리는 모든 것은 애초에 싹부터 없애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테지요. 당신이 내 아이를 죽이고, 내 살아 있는 다른 아이마저 죽이려 했던 걸 알고 있습니다.”

황후의 낯이 파리하게 변했다.

“황비께서는 지금에 와서 감히 그런 누명을…….”

“증거도 남지 않았을 테지만, 평생 그것을 뉘우치며 사십시오. 제가 언제 보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

“……어마마마.”

그때, 마차 안에 묵묵히 앉아 있던 리카르도가 경악한 듯 읊조렸다.

아렌느 소생의 두 아이 중 이미 한 아이를 죽였고, 남은 아이 역시 죽이려 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렌느 황비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제 아들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셀렌 황후는 부끄러움에 할 말을 잃어 입을 꾹 다물었다. 뻔뻔하게 변명하자면 할 말이 많았음에도, 리카르도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더 이상의 변명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손을 들었다.

“출발하라.”

“명을 받듭니다. 이랴!”

마부가 고삐를 흔들었고, 마차의 바퀴는 천천히 굴러갔다.

아렌느는 마차가 큰길에서 방향을 틀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모습을 꿋꿋하게 지켜보다가, 그제야 온몸에서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 산체스 황제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괜찮소?”

“……괜찮아요.”

“정말로 이대로 끝내도, 괜찮겠냐는 말이었소. 그대가 원한다면…….”

아렌느는 황제의 품에 몸을 기대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똑같은 식으로 보복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저열함에 저열함으로 응수하고 싶지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큰 복수니까요. 그녀가 살아서, 요제프의 치정(治定)을 지켜보는 게…… 제일 큰 복수일 테니까.”

산체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아렌느를 꽉 안았다.

요제프도 그렇지만, 아렌느도 참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턴가 이렇게 단단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아렌느가 어느 날엔가 고백한 바 있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며느리인 샤를로테 세티야가 바꿔 놓은 것이라고.

정말로 이것조차도, 샤를로테가 바꾼 일일까.

산체스 황제는 아렌느의 머리카락에 키스하며 다정하게 그녀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이 불었다.

요제프는 황태자가 되기가 무섭게 정확히 자신을 지지하는 자와, 지지하진 않더라도 제가 부릴 수 있는 자와,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으며 반드시 쳐내야 하는 자를 구분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력에 대해서는, 황제가 지금껏 해 온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철저하게 그들을 고립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껏 해 온 탈세, 불법적인 착취, 불합리한 이권 독점 등에 대해 완전한 심판을 내렸다.

그 결과, 황후는 팔다리를 잃은 셈이 되어 이렇게 떠나가게 된 거다.

아마, 그 어느 지방에 가더라도 세력을 재규합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 될 거다.

땡, 땡, 땡.

큰 종소리가 세 번 들렸고, 산체스 황제와 아렌느는 고개를 들어 종탑 위를 바라보았다.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커플의 결혼식이 곧 시작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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