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21)화 (121/123)

121.

샤를로테 세티야 님 만세-!

요제프 황태자 전하 만세-!

만세-!

아무리 제국의 역사를 뒤져 본다 한들, 역사상 이렇게까지 대중에게 환영받는 황태자 부부는 없었을 거다.

요제프 황태자의 결혼식 날, 이른 아침부터 수도 비브로슈에는 군중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무도 대회 때마다 수도에 군중이 모여드는 것은 연례행사였지만, 결혼식 후 있을 아주 짧은 퍼레이드를 한 번 보겠다고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드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말이지, 통제가 잘되는 군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이 많긴 하다니까.”

“이게 다 여동생 잘 둔 덕이지, 뭐.”

비야키와 러슬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작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정말, 여동생을 잘 뒀다.

정말로.

샬롯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길을 개척해 나가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제가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그리고 완벽하게 진행됐을 줄은 몰랐다.

황궁 연회에서 요제프를 지지하는 목소리들을 듣는 순간에, 카밀라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황곰 기사단을 통제하는 부단장들 너머에 서 있는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곧 결혼식장에 참석해야 하기에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는 카밀라는, 평소와 달라 보이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위압감을 뽐내는, 세티야 가의 가주의 모습이었을 뿐.

도무지 속내를 모를 카밀라였다.

아이작의 눈이 가볍게 가늘어졌다.

그렇게 속내를 모를 사람이, 샬롯의 결혼을 앞둔 어제, 저를 불러들였던 일이 떠올라서.

* * *

카밀라의 집무실은, 여전히 삭막했다.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쉬지 않고 일만 할 뿐인 가주의 방.

처음에는 공작의 집무실이 이런 모습인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자랄수록 카밀라 가주가 지독한 일벌레인 것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그저 미워하고 경계하기만 할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샬롯 때문에라도 다시 보게 된 카밀라는 일부러 자신을 몰아붙이듯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작, 아직도 가주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나?”

그런 질문을 듣는 건, 이제 와서는 조금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가문의 그 누구라도,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목표마저도, 이제는 흐지부지 흐려진 느낌이었고.

아이작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카밀라를 묵묵히 바라보자, 그녀가 그를 빤히 마주 보며 다시 한번 채근하듯 물었다.

“가주가 되고 싶지 않아?”

아이작이 얼굴을 한층 더 찌푸렸다.

“왜 사람을 시험하듯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세티야 가의 가주는, 자질을 시험하여 정식 테스트하에 임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카밀라는 흐리게 웃으며 대꾸했다.

“할 거야. 정식 시험은 치러야지. 다만, 미리 물어보는 것뿐이야.”

“뭘 말입니까.”

“샬롯은, 지금 당장은 가주가 될 수 없어. 황태자비 노릇을 하면서 공작가 가주도 하는 건, 무리야.”

“……지금 당장이 아니라, 그 언제가 되더라도 무리인 것 아닙니까?”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아이작.”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샬롯이 황태자비가 되었고, 곧 황후가 될 텐데. 그런 샬롯에게 뒷배가 되어 줄 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야. 뒷배이자, 가주이자, 그리고 샬롯이 가주가 되겠다는 꿈을 이뤄 줄 자가.”

아이작은 눈살을 한층 더 찌푸렸다.

지금 저를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에.

“……지금 저보고, 샬롯을 위해서 가주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샬롯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허수아비 가주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그녀는 이미 그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제가 가주 자리에 오르더라도, 그건 임시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워낙, 샬롯이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자질이 뛰어났으니까. 그리고 샬롯이 이끄는 세티야 가를 보고 싶었으니까.

샬롯이 언젠가 가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나이와 여유를 갖출 때까지, 그리고 황태자비라는 자리와 병행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해질 때까지…….

그때까지 아이작은 제가 그 자리를 맡아 두겠다고, 그렇게 언젠가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역시 그는 카밀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밀라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책무밖에 없는 자리가 될 거야.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이 많을 거고, 보람보다는 자책하게 되는 날이 더 많을 거야. 거절해도 괜찮다.”

“시험은…….”

“너도, 나도, 그리고 모두도. 시험의 결과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괜히 이야기를 돌리지 말라는 거다.

아이작이 쓰게 웃으며 카밀라가 늘 앉는 책상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벽에 걸려 있는 검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그 검 중 하나를 뽑아 들어 카밀라를 노린다고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기습한다고 해도, 상상 속에서조차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우위를 점하기는커녕, 단 세 합. 아니 두 합 만에 제압당하는 상상만 될 뿐이다.

샬롯과 여러 차례 대련을 거치면서, 아이작은 실력도 월등히 늘었지만, 머릿속에서 동작을 상상하는 기술을 익혔다.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제가 아무리 검을 익혀도, 가주님보다 더 대단한 검사가 되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카밀라의 주홍색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멍한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더니, 슬며시 웃었다.

“꼭 같은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린 카밀라는 아이작의 시선이 닿았던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거기 걸려 있는 검 중 가장 수수한 것을 꺼내 그의 앞에 두었다.

그녀가 수집한 다른 검들과는 달리, 대단히 화려한 세공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니었다.

“……이건.”

“로룸이 쓰던 검이다.”

“…….”

아이작의 부릅뜬 눈이 카밀라를 향했다.

“……지금…….”

“그래. 로룸도, 그런 말을 종종 했지. 아무리 검을 익혀도, 나를 뛰어넘지는 못할 거라고. 그래도 괜찮냐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카밀라의 입으로 들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다 잊은 줄 알았다.

매일같이 카밀라가 아버지의 묘에 꽃을 가져다 놓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다 잊은 줄 알았다.

샬롯이 아니었다면, 아이작은 아직도 카밀라를 증오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카밀라는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로룸과, 자신의 큰아들과 어제까지도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상관없다. 하나도, 상관없어. 그때도 이런 대답을 해 줬어야 했는데. 그땐 나도 어렸어. 많이 부족했지. 그저 독려를 하기에 바빴어.”

카밀라가 책상 위에 놓은 검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드럽고 덤덤했다.

하지만 그 시선이, 지독히 슬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겐 아버지지만 카밀라에겐 직접 낳아 기른 자식이라는 걸. 하지만 이렇게 로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 카밀라가 저런 얼굴을 하리라곤, 저런 목소리를 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항상 완벽하기만 하던 그녀가, 제 부족함을 인정할 줄은 몰랐으니까.

점점 더, 그녀를 탓할 수가 없게 되어 간다.

“……가주 자리를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어차피 대답도 정해져 있었다.

황급히 내놓은 대답에 카밀라가 시선을 들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무엇에 대한 사과일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혹은 가주의 자리를 떠맡긴 것에 대한?

그 말 한마디에, 오랜 세월 그렇게 지독히도 갖고 싶었던 가주의 자리가 갑자기 덜컥 무겁게 느껴졌다.

아이작과 카밀라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로룸의 검을 내려다보다가, 아이작이 그 검을 집어 들고 나오면서 자연스레 자리를 파했다.

* * *

“뭐 해, 이런 곳에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작은 놀라지도 않고 뒤를 돌았다.

제가 이렇게 가까이에 누군가가 다가올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할 인물은, 딱 한 명뿐이었다.

사랑스러운, 오늘의 주인공.

예상대로, 그가 뒤를 돌자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거기 서 있었다.

청초한 분홍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목을 시원하게 드러내었고, 연두색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연둣빛 보석이 박힌 얇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이. 금사를 아낌없이 쓴, 발등을 덮는 길이의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여인이.

세티야 가의 가주가 되는 것조차, 그녀를 위해서 하겠다 결심하게 된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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