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20)화 (120/123)

120.

아주 외롭던 어느 날에, 너무 지치고 힘들던 어느 날에 꿈을 꾸었을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꿈을. 가족이 있는 꿈을.

자신이 사랑을 베푸는 만큼, 사랑이 돌아오는 꿈을.

그래서 제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가 바라는 위치에 올라서 저에게 청혼을 해 오는 장면은 마치 꿈과 같았다.

“로테. 샤를로테 세티야. 나의 비가 되어 줘.”

요제프가 그런 말을 해 오는 순간이, 황태자가 되어 제 앞에 무릎 꿇는 순간이 오다니.

샬롯은 그가 내민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내 것일까?’

“……요제프.”

지금까지 샬롯을 망설이게 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리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샬롯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틀어 올린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스러운 얼굴이 웃고 있었다.

“샬레스 황녀 전하?”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뭐 하는 거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저 멍청이가 기다리잖아.”

방금 막 요제프 황자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한 것치고는, 말이 거칠었다.

“……아. 응.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너 평소엔 이렇게 어물쩍거리는 일이 없으면서 이러는 걸 보니까 마음이 없어? 이렇게 망설일 거면 내가 확 채 간다?”

“어?”

샬롯이 저도 모르게 한 반문에, 샬레스 황녀의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무슨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 거야. 샤를로테, 너. 널 내가 채 간다고.”

“……뭐?”

“황태자비라도 되면, 황후가 될 테고. 그러면 내가 넘볼 수 없게 되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면, 너처럼 잘난 인재, 수억을 주고서라도 데려갈 거야. 그러니까 거절할 거면 얼른 거절해.”

샬롯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요제프도, 샬레스 황녀도 정말 원작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만 골라 했다.

오랜 고민이었다.

원작의 흐름이, 어느 순간에 지금 자신이 비틀어 놓은 서술들을 집어삼키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하지만 이 순간에도 요제프가 아니라 샬롯만을 바라보고 있는 샬레스 황녀를 보며 천천히 깨닫는다.

‘……하긴, 오늘 일어난 이 모든 일이 원작엔 없었던 일이야.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문득 돌이켜 회상해 보면, 원작의 흐름을 벗어난 지는 정말로 꽤 오래되었다. 이제 와서는 원작의 흐름과 일치하는 부분을 일부러 찾아내는 것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으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어쩌면 원작의 줄거리대로 흘러가리라는 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가 불청객이 아닐까 하는 데서 생겨난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들었다.

샬롯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한데 모여 있는 세티야가 사람들과 대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제 할머니, 세티야가 가주 카밀라. 원작에서는 냉혈한으로밖에 묘사되질 않지만 샬롯에겐 그저 부드럽기만 한 아이작. 동생 바보가 되어 버린 러슬, 저를 깍듯하게 대하는 란슬롯과 처음보다 훨씬 제게 잘해 주게 된 비야키……. 항상 뭔가를 해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구는 아버지 제롬까지.

그냥 자신은 제 손에 들어온 행복이 너무 커서, 늘 불안했었던 모양이었다.

원작에 집어삼켜질까 봐. 제 손에 들어온 행복을 잃어버릴까 봐.

원래 행복도, 가족도, 가져 본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내내 불안한 사람처럼 굴었던 거다.

한 발짝 물러나 있으면, 무슨 일이 터져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

샬롯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보았다.

금관이 잘 어울리는 흑발 머리 아래로, 선이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다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마차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나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래. 남자로 보여. 남자로 보일 뿐만 아니라…….’

샬롯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평생 함께해도 좋을 만큼, 좋아해.’

“좋아. 요제프, 결혼해.”

생각이 불쑥 말로 옮겨진 순간, 귀가 따가운 박수 소리와 함께 요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샬롯을 꽉 껴안았다. 빈틈없이 그녀를 껴안으며,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로테.”

사랑.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수많은 좋아함과 수많은 사랑함이 있었지만, 특별히 연인 간에 고백하는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건 그저 가슴 뛰고,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서서, 당신과 줄곧 앞으로 함께한다면 내 인생이 더 완벽해지리라는 뜻이었다. 당신과 함께한다면, 날마다 감사하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두근, 두근.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소리 속에서, 샬롯은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제대로 말해 줘.”

그 와중에도, 요제프가 조르는 게 우스워서 샬롯은 깊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사랑해. 요제프.”

요제프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곤, 장갑을 벗기고 왼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러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샬롯을 다시 품에 꽉 껴안았다.

“여기까지, 오래도 걸렸지만…… 이젠 놓아주지 않을 거야.”

놓아준 적도 없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부도 이만큼 자주 얼굴을 보고 가까이 지낼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지내 왔는데.

샬롯은 요제프의 말이 다디달아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의 연회를, 연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연회가 시작하자마자 몰아닥친 거대한 이벤트들에,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하고 참석한 귀족들은 혼비백산하며 온종일 요제프와 친한 이들에게 줄을 서려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가 된 요제프는 물론이고, 샬롯까지 그날의 연회에는 숨 한번 돌릴 틈 없이 수많은 귀족에게 에워싸여 원치 않는 이야기에 시달려야 했다.

“……어휴, 이제 좀 살 것 같다.”

샬롯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요제프가 손수건을 깔아 준 정원 벤치에 살포시 앉았다.

제법 일찍 시작한 연회인데도, 달이 뜨도록 도무지 열기가 식지 않았기에 둘은 도망 나오듯 빠져나온 참이었다.

계속 이렇게 시달려야 한다면, 드레스 차림이고 뭐고 경공을 써서라도 빠져나오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요제프가 그녀를 데리고 나온 거다.

“여긴, 변함이 없네.”

요제프의 말에, 샬롯은 고개를 들어 정원을 둘러보았다.

“여기?”

“그래. 여기. 여기서 내가 황후와 형님과 대치하고 있었지.”

요제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샬롯의 손을 쥐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요제프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이 그대로 기억났다. 샬롯이 덤불 뒤에 숨어 있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도.

그때의 요제프는, 정말로 주화입마라도 걸릴 듯이 불안정한 기운을 가진 소년이었다. 물론 단순한 기의 흐트러짐을 넘어서서 정말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처럼 힘들어 보이는 삶을 사는 소년이었다.

“그땐, 그랬지.”

“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난 없었어.”

요제프가 선선히 고백해 오는 것에, 샬롯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요제프는 줄곧 그녀에게 감사하는 법밖에 모르는 것 같지만, 샬롯이야말로 그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다. 지켜야 하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이, 이 세계에 뚝 떨어져서 방황하던 그녀에게 얼마나 큰 목적과 힘이 되어 주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가 제게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한 뒤로는, 정말로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나야말로. 나야말로 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난 없었어.”

“로테, 너는…… 그렇게 대단한 일들을 해내고도, 이상할 정도로 겸손해. 이제 그 습관도 고칠 때가 됐는데.”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정말이야.”

“듣기는 좋으니까, 그럼 잠깐만 그런 거로 해 두자.”

요제프가 나른한 미소를 머금으며 샬롯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바싹 굳혔다. 마차에서의 키스 이후로, 요제프에게 닿는 것 하나하나가 이상하리만큼 의식되었다.

지금 그가 그녀의 손을 쥐고 있는 것도, 묘하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키스라니.

‘싫은 건 아니지만…….’

너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몇 번이나 있어 왔던 일인데, 새삼스럽게도.

“……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샬롯이 저도 모르게 외치듯 말하자, 요제프가 그녀와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고개를 멈추었다.

“싫어?”

“아니. 아니……”

“그러면, 천천히 준비해. 기다릴게.”

그녀는 손을 내밀지 않아도, 가까이 있는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평소보다 훨씬 빠른 박동이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여유가 사라졌다는 것도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나만 긴장되는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새끼 호랑이들처럼, 서로 목검을 휘두르고 흙바닥에서 뒹굴며 지내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래도 저 혼자 긴장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요제프, 우리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하기도 하고…… 지금과 달라질 게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여러 가지로, 책무만 늘어나는 귀찮은 일이 될 거야. 솔직히 미안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래도…… 우리 약속은 지킨 셈이네.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주기로 한 거.”

샬롯의 말에, 요제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사랑해, 샬롯.”

아직 청혼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결혼을 갓 약속한 사이라 그럴까. 고백을 들을 때마다,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너무 간지러웠고 심장 떨렸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했다. 기뻤다.

샬롯은 제게 키스를 조르듯 몸을 잔뜩 굽히고 있는 요제프에게, 먼저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풀 내음이 물씬 풍기는, 달콤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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