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19)화 (119/123)

119.

그러자 요제프에게 반대하기 위한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그가 황제감인 것도 맞았으며 모든 인기와 시류가 그와 샤를로테를 향하고 있는 것도 맞았으니까.

“저희 세인트 후작가도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3황자 전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제임슨 가도, 공식적으로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3황자 전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합니다.”

“라임 가도,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3황자 전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합니다.”

그때,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총 여섯 개의 지지를 더 얻게 되겠지. 요제프 황자의 설계대로.’

라모레이는 회상을 끝내며 제 눈앞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선 제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끝났군.’

제가 사랑하는 여동생이었지만, 여기서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셀렌 황후가, 수를 잘못 뒀다. 앞을 잘못 내다본 결과가 여기 있었다.

* * *

셀렌 황후는 파리한 낯으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부터, 항상 이 공간은 그녀의 놀이터였다.

그녀를 추종하는 이들이 이곳을 가득 메웠고, 그녀의 옷차림과 행동마저도 이곳에선 번지듯 유행이 되었다.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 하는 말들이 그날 연회장의 분위기와 화제를 결정했다.

그런데, 오늘의 연회장은 달랐다.

황후의 시선이, 연회장 곳곳에 가 닿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의 연회장의 꾸밈도 대부분이 아렌느 황비가 고른 것들이었다. 맛깔스럽게 준비된 음식들도 그랬다.

이상했다.

‘……여긴 분명 내 것인데.’

연회장에 서 있는 사람 중, 분명 제 사람이어야 할 사람들까지 요제프 황자의 이름을 대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언니, 라모레이가 지지 의사를 밝힐 때만 해도 언니가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다.

낯설었다.

분명히 그녀의 것이어야 할 공간인 이 연회장도, 그녀의 충직한 개들이나 다름없어야 할 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내가 굳이 발표하지 않아도, 이미 뜻은 모아진 듯하군. 그렇다면 기쁘게 발표할 수 있겠군. 요제프, 앞으로 나와 내 앞에 서거라.”

황제의 목소리가 윙윙, 울려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고 있는데…… 제가 뭔가를 똑바로 준비하기도 전에 먼저 이뤄진 이 발 빠른 일들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셀렌 황후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너무 작아지는 그런 기분.

그녀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음의 상황을 대비하여 의연하게 굴어야 함을 알면서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거기에 속한 존재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어서. 도저히,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 요제프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려 있어서 온 귀족들의 뒤통수만 제게 보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또각. 또각, 또각.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셀렌 황후가 천천히 무리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대부분의 귀족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와아아-.

셀렌 황후와 그녀의 아들 리카르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환호성이 연회장에서 멀어지는 황후의 귀를 가득 메웠다.

* * *

요제프는 신성을 상징하는 성전에 손을 올렸다. 머리에는 황금관을 받아 썼으며, 나머지 한쪽 손에는 왕홀을 받아 쥐었다.

일제히 박수 소리가 터졌다.

요제프는 천천히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지지 의사를 표명한 자들은, 모두 사전에 자신과 이야기가 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거물들이 모두 3황자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이제 와서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는 것뿐, 연회장의 모두가 지금 이 상황을 반기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황후를 비롯해 3황자가 황제가 되면 그야말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3황자를 지지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렇게 한순간에 뭔가 대단한 일을 이뤄 냈다는 기쁨은 없었다.

“어떠냐, 아들.”

며칠 전 자신을 불러, 황태자로 임명할 것을 미리 밝혔던 아바마마가 흐뭇한 얼굴로 제게 물어 왔다.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산체스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굵은 주름들 사이로 잔주름도 깊어진 것이 보였다.

자신의 어린 시절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였지만, 요제프는 이제 와서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황제의 힘이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은 나이가 들며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그게 그 나름의 자신과 아렌느를 지키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정이 싹튼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제게 황위를 물려줄 아바마마를 향한 예우를 다할 뿐이었다.

“제 맡은 소임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딱딱한 대답에, 요제프의 심사를 짐작했을 산체스 황제가 쓴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는 황제의 곁에 서 있는 제 어마마마도 함께 바라보았다.

황비로 돌아온 뒤 항상 의연한 얼굴만을 보여 주셨던 어마마마셨다. 하지만 아렌느는 지금, 이 순간만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계속해서, 황제가 이 순간을 예고해 왔을 텐데도. 절대 그것이 사실이 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요제프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마마마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절대로, 이렇게 강인한 분이 아니셨는데. 동굴 속에 숨어 지내는 법 말곤 모르는 분이셨는데. 그대로 두면, 어느 날인가 스스로가 알아서 스러져 버릴 것처럼 보이는 그런 유약한 분이셨는데.

어마마마를 바꾼 것도, 모두 샤를로테였다.

요제프는 제가 떠올린 이름을 찾아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귀족들 사이에 서 있는, 한 명의 여인을.

허리를 지나 엉덩이께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카락, 흰색과 분홍색이 아름답게 뒤섞인 드레스, 새하얀 피부와 사슴같이 맑고 깊은 연둣빛 눈동자. 꽃잎 같은 입술.

하지만 외적인 아름다움은 샬롯이 가진 수백 가지의 매력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샬롯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그가 지금, 이 나이까지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칼그림자의 날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이유를 붙여도, 그 모든 것이 샬롯의 덕분이었다. 심지어는, 아렌느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서, 지금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조차 샬롯의 덕분이었다.

불가해한, 도저히 어떤 식으로건 이해를 해 보려고 해도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샬롯은.

“로테. 샤를로테 세티야.”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크고 아름다운 두 눈으로 멍하니 요제프를 바라만 보고 있던 샬롯이, 그제야 마법에서 깨어나듯 깜짝 놀라며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샬롯의 시선이 요제프의 머리에 올라간 금관을 오래도록 담았다. 그녀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고였다.

요제프는 천천히 샬롯에게 다가갔다.

샬롯이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을 만들 수 있어서, 기뻤다.

샬롯이 저를 항상 어린애 보듯 보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화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 버렸으니까. 도무지 그녀의 넓은 식견을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항상 그는 더 발돋움했다.

샤를로테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황태자가 된다고 해서, 황제가 된다고 해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는 없으리라. 황자라는 이름을 달고도 일반 귀족만도 못한,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자랐던 세월을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 지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검술도, 문학도, 교양도 필요한 것은 닥치는 대로 익혔다.

그리고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리카르도 따위와 비견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있었다.

단순히 황태자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이 순간을 얻기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순간 때문에 그는 지금 떳떳했다.

샤를로테에게, 제 마음을 전하기에.

방금 막 황태자의 직위를 받은 요제프가 샤를로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자, 온 연회장 안에 작은 비명 소리가 퍼져 나갔다.

샬롯도 제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촉촉이 고여 들었다.

‘연회가 끝나면, 다시 고백하겠다고 했지만. 짓궂게도, 지금 그 대답을 듣고 싶어졌어.’

모두의 축복을 받고 싶었으니까.

누구보다도 외로웠던 자신들이니만큼, 샬롯이 많은 이들로부터 축복받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요제프는 다시 한번 반지를 내밀었다.

“로테. 샤를로테 세티야. 나의 비가 되어 줘.”

“……요제프.”

샤를로테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자, 아무렇지도 않고 담담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속에 뒤늦게 긴장이 번져 갔다.

샬롯의 눈가에 번져 있는 눈물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 어느 날인가, 샬롯의 눈물을 닦아 줄 깨끗한 손수건 한 장이 없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빨리,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얼른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재촉하는 대신 그는 천천히 샬롯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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