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17)화 (117/123)

117.

사람들의 시선이, 황태자 후보인 요제프와 리카르도에게로 쏟아졌다.

당연히 요제프의 곁에서 그의 팔을 쥐고 있는 샬롯 또한 시선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목을 받아 왔지만, 이번의 것만은 예상한 게 아니었다.

샬롯은 요제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미리 언질해 주셨어?”

요제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 라고?’

자신이 지금까지, 그에게 정당한 자리를 되돌려 주기 위해 얼마나 오래 애써 왔는지 그도 알 테다. 그가 가진 능력에 걸맞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얼마나…….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는 게 샬롯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요제프는 샬롯의 심경을 헤아린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쥐며 속삭였다.

“네게 또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야. 네가 알았다면, 난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네 도움만 받게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샬롯은 다시 한번, 요제프가 문득 많이 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함께 나무 둥치에 앉아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엉엉 울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이젠 제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해낼 줄 아는 아이…… 아니,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제법 파트너를 안심시킬 줄도 알 정도로.

챙챙.

부드럽게 다시 한번 주목을 모으는 소리가 들려왔다.

샬롯은 그녀와 요제프에게 쏟아졌던 시선이 다시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하고 싶은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이젠 제법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산체스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연회 홀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갑작스레 발표해서 놀란 이도 있겠지만, 황태자를 선정하겠다 말한 지 어언 10년이 지났소. 그러니, 지금까지 있었던 황자들의 많은 공적을 고려하여, 내 오랜 기간에 걸쳐 깊게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니 다들 그리 알고 이해해 주길 바라오.”

황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시 한번 시선이 두 황태자 후보에게 파도처럼 모여들었다가 달아났다.

“혹, 내가 염두에 둔 황태자의 발표에 앞서, 추천할 사람이 있다면 말해 보실까.”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짧은 백금발의 여인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했다. 드레스 차림이 아닌 바지 정복 차림의 그 여인은, 세티야 가의 가주 카밀라였다.

“세티야 가는, 공식적으로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3황자 전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오오오-.

지금 이게 무슨 이변이야-.

세티야 가가 이렇게 공식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었어?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입을 부채로 가린 귀족들 사이로, 아주 나지막한 술렁임이 오갔다.

그 분위기 속에서 황제의 잿빛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으로 반짝였다.

카밀라가 갑자기 나서서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나서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듯도 했다.

샬롯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황후를 찾았다.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아름다운 셀렌 황후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부드럽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잃는 법이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에 대한 당혹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셀렌 황후의 바로 옆에 선 청년. 리카르도와 그대로 시선이 맞닥뜨렸다.

리카르도도 그사이에 많이 컸다. 어린 시절에도 또래보다 몸집이 컸던 그는, 장성해서도 위협적인 몸집을 갖게 되었다.

황후를 닮은 엷은 녹색 눈동자 속에 뚜렷하게 서린 분노와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당혹감 따위가 고스란히 읽혔다.

샬롯은 차갑게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리카르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거의 10년째 만날 때마다 저와 이야기를 좀 하자는 둥,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나 하자는 둥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멍청이 같은 말들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이렇게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 속에는 그녀에 관한 호의보다는 정복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절대 숨기지 못했다.

‘리카르도가 나를 원한다 해도, 항상 나를 도구로 원했던 거야.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그 옆에 가겠느냐고.’

샬롯은 리카르도의 멍청함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가 만약 황후의 반만 따라갔더라면,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이였을 텐데. 리카르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저 황후의 꼭두각시로서의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 이상 시선을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돌리는 순간, 고요한 연회장에 다시 하나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제게도 발언권이 있을까요?”

아름답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레스 국의 샬레스 황녀였다.

샬롯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샬레스 황녀가 재밌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려 샬롯을 마주 보곤 작게 윙크를 해 보였다.

“우리의 우방, 세레스 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 아니신가. 그래, 어디 마음껏 말씀해 주시게.”

황제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는 깊은 미소를 띠고 샬롯을 바라보며 말했다.

“샤를로테 세티야, 저의 친우에게 그동안 진 빚이 많습니다.”

“샤를로테 세티야라면, 3황자의 약혼자 말이군.”

“네. 하여, 제가 누군가를 지지할 이유도, 그럴 권리도 없겠습니다만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황자가 황태자가 된다면 저는 빚을 청산할 기회가 생기겠지요. 그러면 그때는 나라 대 나라로, 나쁘지 않은 거래를 하겠다 미리 약속합니다.”

오오오-.

샬레스 황녀는 이미 하나뿐인 후계자로 낙점되어 후계자 수업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다. 곧 세레스 국의 주인이 될 사람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빚’을 인정하는 말이 나오는 것의 무게는 무거웠다.

사람들 사이로 다시 한번 술렁임이 스쳐 지났다.

그리고 연이어, 제대로 된 연회도 시작하기 전에 황제의 폭탄 발언으로 얼어붙은 연회장 안에서 귀족들이 차례로 요제프 황자의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기뻐하긴 일렀다. 나머지는 이미 요제프의 편으로 낙점된 이들뿐이었다. 아렌느의 친정이나, 몇 안 되는 요제프의 지지자들.

그들의 발언 이후로 연회장에 정적이 흘렀다.

샬롯은 눈썹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만약 이 이후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반수 이상의 귀족들이 리카르도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황제가 이미 마음속에 황태자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나왔다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든 여깄는 귀족들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거다.

귀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정치는, 그 본인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제 뜻을 펼치지 못하기가 쉬웠다.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사람을 잘 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게 마지막 시험일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초대에도 많이 응할 것을 그랬다.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눠 볼 걸 그랬다.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일로 바빴고, 세티야 가의 가주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답시고 정신없이 이것저것 머리 아픈 책들까지 읽어 대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정적이 너무 길었다.

이대로라면, 황제가 결정한 답안이 무엇이든, 이 분위기에서 리카르도가 황태자가 되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샬롯이 요제프의 팔을 꼭 쥐는 순간, 황후와 가까이 모여 서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불쑥 손이 하나 올라왔다.

* * *

셀렌 황후는 황제가 갑자기 폭탄 발언을 하고 나선 뒤의 연회장을 계속해서 자세히 살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아렌느 황비가 워낙 태연하게 굴었고, 요제프 황자도 이 사태를 짐작이나 했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굴었으니까. 뭐 대단한 계획이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렌느를 요즘 그렇게 끼고 다니던 황제도, 그냥 생각 없이 마구 던진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결국, 지지를 바꾼 것은, 세티야 가 하나였다. 물론 세티야 가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고, 세티야 가의 지지를 잃는 것은 셀렌 황후로서는 정말 아쉬운 일이었지만…….

‘재정적으로 보복해 주면 그만이야. 내가 자금줄을 조이겠다고 선언했는데도,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기사단을 운영할 돈도 없는 세티야 가문은 이제는 아무런 위협도 아니야.’

황후는 한쪽 입술을 당겨 여유 있게 웃었다.

연회장에 흐르는 어색한 정적이, 더욱더 승리를 확신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게, 황후는 계속해서 세력을 규합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제 사람이 된 이들을 단단히 옭아매 두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제게 등을 돌렸을 때, 절대로 그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을 약점을 하나둘씩 틀어쥐고 있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이가 문득 황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탄티누스 가문의 수장이자, 셀렌 황후의 언니인 라모레이 탄티누스였다.

“셀렌 황후 폐하.”

“……어?”

“저는, 탄티누스 가문이 앞으로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뒤를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2황자 전하께서 황태자가 되시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샤를로테 세티야라는 아이를 보면서.”

“……언니!”

셀렌 황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언니를 잇새로 불렀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라모레이 탄티누스는 부드러운 미소로 제 딸인 케이트를 한 번 돌아보더니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곤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았다.

“탄티누스 후작가 또한, 공식적으로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3황자 전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귀족 대부분이 절대로 예상하지 못한 폭탄 발언이었다.

세티야 가의 발표 때에 맞먹는, 어쩌면 그보다 더한 큰 술렁거림이 연회장을 휘감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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