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16)화 (116/123)

116.

샬롯은 마차 창밖으로 몸을 쭉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

황궁까지 가는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가득 늘어선 인파들의 손에는 황금색 깃발이 들려 있었다. 황실의 문양인 세 개의 검과 두 개의 방패가 새겨진 깃발이.

그리고 그 깃발들 사이에는 빠짐없이 빼곡하게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이 들려 있었다. 샬롯과 요제프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샬롯과 요제프를 향한 대중들의 호응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기에, 10년 전에도 제법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인파는 이젠 거의 물결처럼 보였다.

하지만 란슬롯이 앓는 소리를 했던 것과는 달리, 군중들은 정말 질서 있게 길을 터 주고 있었기에 마차는 속도를 굳이 늦추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샬롯은 작게 웃으며 란슬롯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제가 요제프를 군중 앞에 세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란슬롯도 그녀를 자랑스러워하는 건지도 몰랐다.

대회가 있을 때나, 큰 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이 광경은 어떻게 된 게 한 번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부모 중 누구 한 명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고아였던 자신이, 어떻게 이계에 와서 이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받고 있는지…… 사람의 연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란슬롯, 나와 자리 바꿔 줘.”

“알았어.”

란슬롯이 웃는 목소리로 마차를 멈춰 세운 뒤 문을 열었고, 샬롯은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고선 마부석에 올랐다. 그녀는 마부석에 앉은 채로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와아아아!”

“샤를로테 님이시다!”

“만세! 만세!”

군중들의 뜨거운 목소리가, 그녀에게 화답했다.

그 순간, 방금 요제프가 내밀었던 반지의 모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요제프와 결혼한다면, 내가 황태자의 비가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런 생각과 동시에, 카밀라의 조언도 떠올랐다. 결혼하면, 가주의 자리를 쉽게 유지할 수는 없을 거라는.

그 생각을 하니까 속이 울렁거렸다.

곧 스무 살이 되는, 이제 고작 열아홉의 나이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해야 했다.

“샤를로테 님!”

“사랑해요!”

하지만 왁자하게 비명처럼 들려오는 소리들은 그 고민에도 불구하고 제법 기분 좋은 것이었다. 샬롯은 고민 따윈 뒤로 미뤄 두고, 웃으며 제게 날아오는 꽃가루들을 즐겼다.

* * *

화려한 조명, 금박과 은박으로 반짝거리는 벽…… 그런 사치스러운 연회장의 모습에도, 이젠 적응할 대로 적응했다.

샬롯은 요제프의 팔을 쥔 채로 익숙하게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제법 일찍 도착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연회장 안은 이미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 오래 시선을 주지 않아도, 연회장 내에 세력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한쪽에는 황후를 비롯하여 탄티누스 후작과 2황자 리카르도,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무리.

그리고 또 한쪽에는 우아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렌느 황비와 세티야 가의 면면들이 보였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샬레스 황녀를 비롯한 세레스 국의 귀빈들도 눈에 들어왔다.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뿐이지, 여기야말로 정말 전장이라니까.’

샬롯은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는 살얼음 같은 분위기의 연회장으로 입장하며 살짝 진저리를 쳤다.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황자 전하, 샤를로테 세티야 님께서 함께 입장하십니다.”

시종이 격을 갖추어 알림과 동시에, 연회장 내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둘에게 와 닿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사람의 입장에, 박수와 찬탄이 쏟아졌다. 샬롯의 아름다움과 강인함, 요제프의 수려함에 대해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물론, 진영이 극명하게 갈렸으니 한쪽 진영에선 비교적 눈치 없는 자들만 손뼉을 치고 있었지만.

‘어우, 살벌해.’

샬롯은 속으로야 이 치열한 분위기에 압도당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방긋 웃어 보였다.

“꺅,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세요.”

“샤를로테 님, 이쪽을 한 번만……!”

어느 날인가부터 또래 귀족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팬이 생겨서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환호를 지르며 따라다니곤 했다.

샬롯은 그것도 그냥 한순간에 지나는 유행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그 모임은 제법 오래 유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이젠 익숙한 일이라 샬롯은 저를 향해 눈을 빛내는 여자아이들에게도 작게 윙크를 해 주었다. 어쩐지 과거에 저를 괴롭혔던 무리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쉽게도 그 뒤로도 마음속 깊이 친한 친구는 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지내는 건 나쁘지 않았다.

“봤어, 봤어? 윙크해 주셨어. 아, 오늘 못 잊어…….”

“봤지! 날 보고 윙크해 주신 거잖아.”

“하…… 그게 어떻게 널 보고 한 거야? 자의식 진짜…….”

소녀들이 아웅다웅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녀는 요제프의 팔을 쥐고 얼른 아렌느 황비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묘한 점이 있었다.

황궁 경비는 본래, 황실 기사단이 도맡아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샬롯은 요제프의 팔을 살짝 세게 쥐며 속삭이듯 말했다.

“있잖아, 요제프.”

“왜, 로테.”

요제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오늘따라, 선이 더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하려던 말을 순간적으로 까먹을 정도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와 내도록 입맞춤을 하며 자라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와 오늘 했던 짧은 입맞춤이 갑자기 머릿속을 지배해서 요제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아니, 그게…….”

샬롯은 고개를 얼른 가로저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떨쳐 내었다.

“오늘따라, 황궁 경비가 무척 삼엄하지 않아? 아니, 삼엄하다고 해야 하나……?”

그녀가 짚은 부분을, 요제프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평소보다 병력이 많지.”

“아…… 뭐야. 미리 계획된 거야? 난, 또.”

“또, 뭐. 황후가 쿠데타라도 일으킬까 봐 걱정했어?”

깜박. 깜박.

샬롯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발까지 멈추고 서선 요제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말이다. 쿠데타라니. 자신은 그런 단어 비슷한 것도 꺼낸 적이 없었고, 황후라는 이름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냥 경비가 많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저런 대답이 돌아오다니.

‘……요제프는, 옛날보다야 능구렁이가 되었지만…… 나에게 이런 농담은 하지 않아. 절대로.’

그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요제프는, 자신에게 절대로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

문득 샬롯은, 요제프가 자신에게 갑자기 청혼 이야기를 꺼낸 것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밀라가 오늘 그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기 때문에?

아니, 그런 이유라기엔…… 조금 이상했다.

‘뭔가가…… 뭔가가 있어. 내가 모르는.’

“……뭔가 있지, 오늘.”

샬롯이, 소리를 죽여 나지막하게 되묻자, 요제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제 팔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나도 체면이 있는데. 로테, 네가 오늘날까지 내 모든 것을 만들어 줬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마지막 파티는, 내 손으로 해야 하질 않겠어?”

“……파티? 그게 무슨 말이야?”

요제프가 말하는 파티가, 지금 둘이 함께 향하는 연회는 아닐 터였다.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요제프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금방 알게 될 거야. 하긴 이번엔 내 손으로 준비했다기보다도…… 이번 파티는 황후가 8할을 준비했지만.”

황후가……?

절대 요제프와 황후는 함께 뭔가를 할 사이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샬롯이 다시 한번 연회장의 경비 체계를 눈으로 살피는데, 부드럽게 흐르던 연회 음악이 잦아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큰 목소리와 함께, 이젠 제법 나이가 든 티가 나는 산체스 황제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화려하지만 입기 편한 튜닉 차림으로 들어선 황제를 향해, 연회장에 모여 있던 모든 귀족이 일제히 경외의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받고선 가장 상석에 놓인 황제의 자리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대제국 체이커에도, 계절이 변해 가고 있소. 오늘은, 이 자리에 모여 준 이들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소.”

황제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샬롯은 그 짧은 소란을 틈타 산체스 황제의 시선이, 흐뭇하다는 듯 요제프를 살피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지? 이벤트라니.’

샬롯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카밀라도, 요제프와 함께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의연하게 서 있었다.

그제야, 불현듯 묘한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왜, 카밀라가 여태 미뤄 왔던 지지를 갑자기 선포하겠다고 했는지. 요제프가 왜, 여태 미뤄 왔던 청혼을 갑자기 했는지…….

그건…….

“오늘, 그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황태자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그 자리의 주인은, 황태자가 됨과 동시에 나와 함께 국정을 돌보게 될 것이다.”

황제의 청천벽력 같은 갑작스러운 선포에 황후와 샬롯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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