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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공녀님 (115)화 (115/123)

115.

샬롯은 멍하니 흔들리는 마차를 느꼈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천천히 제 감각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란슬롯의 인기척, 말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는 소리, 아직 공작저를 다 빠져나가지 못한 마차의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거대한 나무들의 풍경, 그리고 제 옆에 앉아 있는 요제프와…… 그리고 요제프의 손에 들려 있는 반짝이는 섬세한 세공의 반지.

“……요제프.”

샬롯이 멍하니 꺼낸 이름에, 요제프가 그녀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답했다.

“그래, 로테.”

“아니…….”

“줄곧, 내가 네 가족이 되겠다고 했잖아. 물론, 10년 전과 지금의 우리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 그때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조금 덜 절실하게 느끼게 된 건 맞을 거야. 그래도, 언제나 같은 편에 서겠다는 다짐으로, 이 반지를 준비했어.”

담담한 고백은, 샬롯이 상상했던 그 어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프러포즈보다도 더 심금을 울렸다. 하긴, 화려한 고백으로 치자면야 10년 전에 있었던 칼그림자의 날에 요제프로부터 받았던 청혼이 가장 화려했으니, 이젠 이렇게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을 할 때가 되었다.

되긴 했는데…….

샬롯은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은 감각을 애써 누르며, 요제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눈썹을 살짝 덮는 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담담한 시선이, 10년 동안 제 곁을 지켜 오며 언제나 먼저 자신을 바라봐 주었던 그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 냈다.

“……정말로?”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듯한 타박도 하나 없이, 요제프는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로.”

“……나에게 하는 거야?”

“로테, 네게 하는 거야. 지난 10년 내내 했던 말이지만, 필요하다면 한 번 더 말할게. 네가 아니면 안 되고, 이 청혼은 너에게밖에 할 생각이 없어.”

샬롯은 문득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요제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발견하고는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반지를 받쳐 든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듯도 보였다.

그제야, 이 모든 것이 동화가 아니라 현실 같다는 실감이 났다. 남자주인공의 고백이, 여자주인공이 아니라 저를 향해 있다는 실감도.

두근.

두근.

심장이 천천히 속도를 빨리했다.

너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요제프의 청혼이라니. 정말로 진지하게, 결혼을 염두에 둔 청혼이라니.

계속 그건 제 일이 아니라고 피하듯이 생각을 넘겨 버렸기 때문에, 눈앞에 들이밀어진 진지한 청혼에 뭐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싫은 건 아니었다. 확실한 건 그것 하나. 정말로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가져왔던 의문이, 이 반지 하나에 불식될 리는 없었다. 요제프가 샬레스 황녀에게 흔들리는 모습은커녕 그런 기색조차 단 한 번도 느낀 적도 없건만, 묘하게 그 생각에 계속 집착하게 되는 건 왤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피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날의 인연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도록, 스스로 계속 핑계를 대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더.

‘결혼할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인지…… 그냥 줄곧 귀여운 동생이라고만 생각해 왔단 말이야.’

그래서, 떨리면서도 이상했다.

생각할 시간을 아주 조금만 갖고 싶었다.

“요제프.”

“왜? 내가 무릎을 꿇지 않아서 그래?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를 세우고…….”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다만 이게 10년 전의 청혼과는 달리…… 이제는 우리도 진짜 결혼을 생각해도 좋을 나이잖아.”

샬롯이 거절의 밑밥을 깔기 시작한다 싶었던지, 지금까진 제법 부드럽던 요제프의 표정이 서서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샬롯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거절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니면, 승낙이야?”

“그, 그것도 아니고…….”

“둘 말고, 뭐가 더 있는데?”

샬롯은 요제프를 달래듯 말했다.

“……중요한 일이잖아, 결혼은. 너에게도, 네가 지금 있는 위치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에도.”

“알아. 지금 당장 식을 올리자는 건 아니었어. 그냥 대답을, 들어 두고 싶었어. 그리고, 미리 고백해 두고 싶었어. 네 말을 들어 보니 카밀라 가주의 선언 이후엔 폭풍이 몰아칠 것 같으니까. 그전에, 정확히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말을 어쩜 이리도 예쁘게 할까.

샬롯은 저도 모르게 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얼른 고쳤다.

이젠 이런 습관도 정말 고쳐야 할 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응, 그런데…… 우리가, 뭐랄까……. 남자 대 여자로…… 그…… 연인? 같은 게 된다고 생각하면…… 나아가서 부부 같은 게 된다고 하면 뭔가 낯간지럽달까? 좀 그런 게 있지 않아?”

그러니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요제프는, 샬롯의 말에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곤 반지 함을 탁 접어 제 호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곤 그녀에게 성큼 다가앉았다.

요제프는 키가 샬롯보다 훨씬 컸지만, 비율이 좋은 편이라 앉은키는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데도, 바로 옆에 붙어 앉으니 제법 위압감이 있었다.

샬롯은 눈을 깜박이며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달리고 있는 마차 안은 지극히 좁은 공간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라곤 없었다.

그녀가 창문에 기대듯 해서 요제프 쪽을 올려다보자, 그가 허리를 슬쩍 굽혀 얼굴을 가까이하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계속 말했지. 한데 넌 우리 사이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 온 건데?”

“……아니, 네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나도 생각했는데.”

“왜? 내가 남자면 부담스러워? 그럼 넌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데?”

“요제프.”

“내가 남자로 안 보인다는 뜻인가?”

“……요제프.”

기분이 상해도 단단히 상했는지, 요제프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고개를 바싹 기울여 샬롯의 입술 앞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상하면 말해, 그러면. 해 보면 알잖아. 내가 남자로 보이는지, 애송이로 보이는지. 해 보면.”

“……요제…… 흡.”

이제 와서 해 보면 알기에는 뽀뽀를 장난치듯 제법 많이 해 온 게 아니냐고 항변하려던 말은, 요제프가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겹치는 바람에 그대로 사라졌다.

말캉거리는 부드러운 입술과 섬세한 선을 가진 입술이 닿았다. 마치, 매일같이 만날 때마다 키스하던 사이가 아니라 오늘 처음 입술을 맞대는 사이인 것처럼 부드럽게 털끝처럼 스치는 키스였다.

요제프의 입술에서는, 언제나처럼 맑은 풀 내음이 풍겼다.

평소에 하는 키스들도 한결같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려 대었지만, 이번의 것은 그중에서도 제일 그랬다.

진중한 요제프의 진심이 전해져 왔기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봐 달라는, 장난기 한 점 없는 진지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두근, 두근.

이보다 더 짙은 키스도 했었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이 제일 심장 떨렸다.

그가 입술을 부딪쳐 오면서 한 질문을, 어쩔 수 없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저도 모르게 답을 떠올렸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요제프를 남자로 보고 있었구나. 일부러 그렇게 보지 않으려고 했던 거지……. 이렇게나…… 이렇게나 장성해 버렸는걸.’

키스에서는, 거북함이나 우스꽝스러움 같은 것들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떨려 왔다.

그녀의 판단을 기다리듯 오랫동안 기다리던 요제프가 눈을 사르르 떴다.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다시 담았다. 그사이에도 눈을 감을지 아니면 계속 뜨고 있을지조차 결정하지 못해 차마 내리깔지도 못했던 연둣빛 눈동자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래도 내가 아직 여전히 애처럼만 느껴져? 너무 오래전부터 알아서? 아직도 나와의 입맞춤이 어색해? 혹은 모르겠어?”

그가 천천히 쏟아 내는 질문들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훅, 온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귀부터 시작해서, 온 얼굴이 타들어 가듯 뜨거웠다.

그리고 속이 이상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했고, 답답한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의 제 경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샬롯은 더듬더듬 입술을 열어 말을 꺼냈다.

“이번 연회가 끝나고…… 끝나고 다시 청혼해 줄래? 그러면 그땐 제대로 대답할게.”

요제프는 샬롯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0년도 기다렸는데, 고작 반나절쯤.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그때부터, 그 꼬마 시절부터 요제프가 자신을 신부로 봐 왔다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둘도 없는 친구이자, 둘도 없는 연인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나 친밀한 사이였는데. 지금까지 줄곧.

덜컹.

그때, 마차의 이동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느낌이 남과 동시에 마부석에서 란슬롯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를로테, 네가 나와서 인사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널 보겠다고 몰려든 인파가 장난 아냐.”

샬롯에 대한 질투 대신, 유쾌함과 존경심이 묻어 나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반색했다.

요제프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는, 겪어 본 적 없는 불편함으로 터질 것 같은 속내를 숨길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얼른 창문을 활짝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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