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14)화 (114/123)

114.

이틀 후, 연회 날 아침.

“요제프다!”

샬롯은 치장을 받다 말고, 앞뒤 맥락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드레스 장식과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세 명의 시녀가 놀라서 뒤로 물러났지만, 베티는 이제 그런 것으로는 놀라지도 않았다.

문밖은커녕, 아슬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도 샬롯 아가씨는 3황자 전하의 인기척을 알아내곤 하셨으니까.

샬롯이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히자, 예상대로 정원 초입에 들어서던 아슬란과 요제프가 보였다. 그는 오늘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수려한 얼굴로 샬롯을 향해 태연하게 윙크해 보였다.

‘……요즘 안 하던 짓을 한다니까.’

샬롯은 최근 들어 능글맞아진 요제프가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그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턱을 괴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올 생각인지, 요제프가 그녀가 있는 본관 입구로 쏙 들어오는 것을 창밖으로 내다보던 샬롯의 머릿속에 카밀라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쉽지 않을 거야, 요제프 황자를 지지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쉽길 바랐던 적은 없었다. 그녀가 바란 건, 다만 아주 확실하게 상대를 짓밟는 거였다.

그들이, 어린 요제프에게 그랬듯이. 다시는 언감생심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노리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그래. 알고 있다니, 되었다. 어차피 노선을 정해야 할 때가 되었고, 그래서 정한 것이다. 네가 능력을 보여 준 것도, 확실히 방향을 정하는 데에 보탬이 되기도 했지만.’

‘고마워요, 할머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연회를 확실하게 이용해야겠군.’

이번 연회.

세레스 국 황제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나 다름없는 샬레스 황녀까지 방문하는, 아주 거대한 연회.

거기서, 카밀라는 3황자 요제프에 대한 세티야 가의 지지를 밝힐 계획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대단한 연회 자리가 되겠는데.’

하긴, 지금까지 평범한 황궁 연회도 별로 없었다.

그녀가 겪어 왔던 연회마다 제법 대단한 사건들이 터져 왔다.

도화가 샬롯의 몸에 처음 들어온 이후로 참여한 첫 연회에서는 아이작이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기도 했었지만, 요제프를 처음 구해 주었다. 황후와 리카르도의 앞에서 요제프를 구해 냈던 그날을, 샬롯은 절대 잊지 못했다.

‘그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아마 그날이 없었더라면 요제프는 끝내 나한테 마음을 열지 않았을걸. 아무리 내가 요제프의 뒤틀린 기혈들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한들.’

그리고 그 뒤로 있었던 다른 연회들도 제법 대단했다. 아렌느의 복귀를 알리는 연회는 정말 굉장한 기 싸움의 현장이었고, 그 외에도 탄티누스 후작이 그녀에게 직접 감사함을 전했던 연회도 있었고…….

‘문득 돌아보면, 정말 소설 속의 한 장면들처럼 모든 게 극적이고 파란만장하긴 했어. 별 비중 없는 조연의 삶답지 않아서 문제지만.’

샬롯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 당도하는 게 들렸다. 체중이 적게 나가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고양이 같은 발소리.

“들어와, 요제프.”

샬롯의 말에도 바로 대답은 없었다. 베티가 한 번 더 덧붙여 말했다.

“들어오세요, 요제프 황자 전하.”

달칵.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꽃다발부터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그것을 품에 안은 요제프도 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에버폴이라는 이름의 흰 꽃이 흐드러진 꽃다발은 아름다웠다.

요제프는 처음, 저 때문에 그녀가 쓰러졌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샬롯의 방에 올 때마다 이렇게 꼭 꽃다발을 가져오곤 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오면서도 꼬박꼬박 꽃다발을 가지고 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렌느가 그를 그렇게 교육했던 모양이었다. 여자아이를 방문할 땐, 꼭 꽃다발을 가지고 가라고.

그 습관은, 썩 나쁘지 않았다.

꽃다발을 받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도, 요제프를 통해서 알았을 만큼.

샬롯은 앉은 채로 상체만 돌려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요제프는 그런 그녀를 눈부시다는 듯 눈을 살포시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예뻐, 샬롯.”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야말로, 요정이나 천사라는 단어에 어울릴 법한 현실감 없는 미남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게 그런 말을 들으면, 과연 칭찬일까 싶다니까.”

“당연히 칭찬이지. 왜 칭찬일까 싶은데?”

“네가 워낙에 잘생기고 귀여워야 말이지.”

“……그러는 로테, 네 말이야말로 과연 칭찬일까 싶다.”

완전 칭찬인데?

샬롯이 혀를 쏙 빼물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귀여운 건 귀여운 거야.”

“그런 생각이야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는 참아 줘.”

결혼식장?

또.

또 슬쩍 선을 넘는 대화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하지만 샬롯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는 것과는 달리, 시녀들은 둘의 대화에 아주 신이 난 듯 꺅꺅거리는 비명을 질러 댔다.

“정말, 이리도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분들이 또 계실까 싶어요.”

“이번 연회의 꽃은 바로 두 분이실 거예요.”

“두 분이 결혼하실 때는 얼마나 또 잘 어울리실까요? 지금도 이렇게 잘 어울리시는데.”

샬롯은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또, 또.

자신의 팬이라고 밝혔던 시녀를 비롯한 제 주변 사람들은 저와 요제프가 함께 있으면 하나같이 보기 좋다느니,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느니 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는 슬쩍 거울로 눈을 옮겼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의 여자와, 몸의 비율도 얼굴도 무엇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는 황자 전하의 조합은 제법 조화로워 보이긴 했다. 그리고 요즘엔 전혀 다른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서로 인상이 닮아 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휴, 이젠 모르겠다. 이번 연회가 지나면, 뭔가 좀 결정이 되겠지.’

아무튼,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곤 하지만…… 기왕 해결해 줄 거라면 빨리 좀 해결해 줬으면 했다.

“다 됐어?”

“다 됐어요.”

대답은 샬롯 대신 베티가 했다. 마지막으로 반 묶음 한 샬롯의 분홍색 머리를 핀으로 잘 고정하는 게 전부였다.

샬롯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요제프가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제 팔에 앉고서 샬롯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쪽, 닿았다가 떨어지는 식의 키스는 아주 짧았지만, 샬롯의 신경을 긁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너…… 내가 이제 남들 보는 데서 이러지 말라고 했지. 어? 너 일부러 더 이러는 거지? 나 부끄럽게 만들려고!”

샬롯이 요제프의 어깨를 때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광경을, 시녀들은 비명 섞인 한숨을 내쉬며 배웅했다.

* * *

마차 앞에 도착하자, 웃는 낯의 란슬롯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제프 황자 전하. 황궁까지는, 황곰 기사단이 직접 에스코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제프에게 먼저 예의를 차린 뒤, 자신에게로 돌아선 란슬롯을 보며 샬롯은 까르르 웃으며 기꺼이 그에게 손을 내어 주었다. 란슬롯은 장난스레 샬롯의 손등에 키스하고서 몸을 일으키곤, 그녀가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었다.

란슬롯은 근래에는 계속해서 연회 같은 곳엔 일절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꼭 이렇게 샬롯이 오가는 길에 굳이 배웅을 해 주거나 마중을 나와서 얼굴을 비치는 게 다였다. 혹은, 수련장에서 마주치거나.

샬롯은 마차에 함께 오르지 않고 마부 옆에 올라앉는 란슬롯을 고개를 빼고 바라보았다.

그래도, 좋아 보였다.

어린 시절 은발이 섞인 백금발은, 이젠 완연한 은발이 되었다. 장난기가 많이 느껴지던 얼굴도, 지금에 와서는 제법 성숙한 청년의 얼굴로 변모해 있었다.

무엇보다, 검술이 일취월장했다. 지금의 그는, 소설 속의 그와는 전혀 딴판으로 황곰 기사단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기사단 후보생 신분을 면치 못하면서도 노력은 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 없었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일상을 보내고, 누구보다도 열의를 가지고 노력을 하는 게 그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참 올곧아 보이게 변했다.

노력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면 다 그렇듯.

그리고 제 어린 시절, 천방지축으로 굴었던 과거에 대한 사과의 의미인지 뭔지…… 그 뒤로 란슬롯은 샬롯을 제법 깍듯하게 대했다. 누가 보면 그녀가 손윗사람인 줄 알겠다 싶을 정도로.

다그닥, 다그닥. 덜컹, 덜컹.

마차가 흔들리는 사이로, 샬롯이 란슬롯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그리고 요제프.”

“응.”

“우리 할머니가, 이번 연회에서 발표할 거야.”

“뭘?”

“세티야 가가, 공식적으로 널 지지한다고. 그렇게 발표하겠다고 하셨어.”

덜컹, 덜컹.

거대한 바퀴의 마차가, 두어 번 흔들리고 다시 안정을 되찾는 것을 느끼며 샬롯이 마차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요제프가 그녀를 묘한 눈으로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럼 이제, 더 이상 완벽한 순간을 찾을 필요도 없이 말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뭘?”

“결혼하자, 로테.”

요제프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별일도 아니라는 듯 반지 함을 샬롯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꼭 맞을 게 틀림없는 아름다운 반지가 그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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