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세티야 가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가였고, 축재하고 있는 재산도 많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하로서 돈을 불리기에 치중하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할 때가 많았기에, 돈은 들어오는 족족 나가곤 했다.
게다가 재산 대부분은 현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총 8천 하스론의 거금을 한꺼번에 내놓는 건, 하자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야말로 세티야 가의 자금줄을 탈탈 털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년에 걸쳐 2천 하스론을 충당하는 것은 늘 해 오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카밀라가 천천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깡마른 벤의 얼굴에서는, 이 이례적인 상황에 대한 자부심이나 놀라움 같은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직접 대면할 일이야 별로 없었다고 해도 카밀라는 벤을 잘 알았다. 꾀를 부릴 때도 있지만 대체로 순박한 구석이 있어서 오랫동안 기용해 오고 있는 의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큰돈을 들고도 태연하다니. 만약 이런 큰돈을 갑자기 만져 본 거라면 저렇게 태연하진 못할 거야.’
그렇다면 뭘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 물었다.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난 거지?”
벤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모두, 샤를로테 님의 것입니다.”
“……이게 모두 내 손녀의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주님. 모두 기사단 운용 자금으로 마음껏 사용해 달라 전하셨습니다.”
그 말에 카밀라는 조금 전 샬롯이 한 말을 떠올렸다.
손녀가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했던 그 말을. 황후가 황곰 기사단의 자금줄을 조여 온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활짝 웃으며 했던 그 말을.
워낙 대단한 기적 같은 일들을 여러 차례 보여 준 아이였지만…….
‘그래도 정말로 이렇게 당장 해결하겠다는 이야기인 줄은 몰랐는데.’
너무 당황스러우면, 허탈한 법일까. 카밀라는 주머니 중 하나에 들어 있는 금화들을 한 줌 집어 올렸다가 떨어트리며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지? 내가 죽기도 전에, 손녀가 그리 대단한 재산을 물려받진 않았을 텐데.”
돌려 묻는 말에, 벤이 공손히 답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가씨께서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으시고 돈을 모아 꾸준히 정보 길드와 상단에 투자하셨습니다.”
10년 전부터 투자를? 고작 아홉 살짜리 꼬맹이가?
눈앞의 돈도 비현실적이었지만, 벤의 태연한 설명은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샬롯이 용돈을 주어도 도통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검사라면 누구나 여러 개의 화려한 검을 갖고 싶어 하는데도, 샬롯은 그녀가 선물해 준 것들로 충분하다고 하며 아홉 살 때 맞춘 검을 아직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 묻은 돈을 한 푼, 두 푼 허투루 쓰지 않는 것으로…… 이게 가능하다고.”
“샬롯 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별력과 예측력이 있으십니다. 저도 곁에서 도와드리면서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시는 모든 말씀이 딱딱 맞아 들어가는지 매번 소름이 돋아서……”
벤은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카밀라는 벤의 반짝이는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이젠 중년도 아니고, 노년이라 불리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릴 그였는데도 저렇게까지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할 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왔던 걸까.
짤그락. 짤그락.
상념에 잠긴 카밀라의 손 안에서, 금화들이 부딪는 소리를 냈다.
“요제프 황자가, 황궁의 재산을 빼돌렸다고 하는 게 더 믿음직할 지경이군.”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주 초창기의 투자에서부터, 제가 함께 도와드리며 지켜보았기 때문에……”
카밀라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이야.”
그래, 농담이다.
믿어야지, 어떻게 할까.
검술과는 또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도, 이 정도의 재능이 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샬롯이 세상을 보는 눈이 제법 객관적이며 넓다는 것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세태를 아주 잘 읽어서 돈을 불리는 것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물론 이 정도의 돈쯤 되면 재능을 운운할 범주를 뛰어넘은 것 같지만.’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매번, 매 순간 샬롯이 뭔가를 해낼 때마다 그것은 평범한 일이었던 적이 없었다. 카밀라로선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일, 상상해 본 적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런 손녀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황후의 견제를 받게 생겼지만…….
‘재밌어.’
또, 뭘 숨겨 뒀을까. 어마어마한 일들로 가슴이 기분 좋게 놀랄 때마다, 카밀라는 제 손녀의 성장에 뿌듯해졌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뿌듯해할 처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천재적인 아이의 열아홉은, 제가 생각하는 그 어떤 열아홉 살과도 달랐으니까.
10년이나 돈을 불려 오고 있었다면 말이 새 나갔을 법도 한데, 가주인 제 귀에까지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면모도, 가주 된 자에겐 꼭 필요한 역량이었다.
‘가주 자리도, 이제 곧 물려줄 참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빨라도 괜찮겠어.’
카밀라는 더 이상 돈의 출처에 관해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떡이며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해 볼 만하겠어.”
“네?”
“이걸 당장 다 운용 자금으로 써 버렸다간, 반역을 도모하는 게 아니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한 큰돈인데. 이게 있으면, 굳이 세티야 가도 물러날 필요는 없으니까.”
반역이라는 단어에 깜짝 놀랐는지, 벤이 두 눈을 토끼처럼 뜨고 주변을 살폈다.
카밀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생각에, 샬롯의 가장 큰 재능은 사람을 볼 줄 아는 거였다. 어떻게 자금을 융통하는 경로로 저렇게 순박한 의원을 골랐을까?
더 약삭빠른 이였거나, 더 굼뜬 이였다면 이렇게 모든 것이 조용하게 유지될 수가 없었을 테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수염 기른 말라깽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저 의원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게, 샬롯이 둔 가장 큰 한 수일지도 몰랐다.
“이제 물러나도 좋다.”
“아…… 네, 가주님.”
“아, 그리고 추가로 궁금한 게 있는데. 그렇게 열심히 모은 돈인데 내게 이 돈을 전부 주어도 괜찮은 건가?”
벤은 물러나려 인사하다 말고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이건 샬롯 님께서 가진 자산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당장 융통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만, 며칠 더 말미를 주시면 이것과 같은 금액 정도는 더 융통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진 그렇게 철저히 숨겨 왔던 주제에, 이젠 그냥 탁 털어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벤은 솔직하게 대답을 해 왔다.
‘저 말이 진짜라면…… 큰손도 이런 큰손이 없군.’
카밀라는 쓰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제 가도 좋다. 가서 내 손녀에게 전해. 10년 전의 청은, 들어주겠다고. 이제, 그럴 때가 되었군.”
벤은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 * *
같은 시각, 샬롯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즐겁게 수련을 하다 말고 베티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베티, 갑자기 왜?”
샬롯이 불만이 섞인 얼굴로 불퉁하게 묻자, 베티가 샬롯의 손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가만히 두면, 또 해가 지고 나서도 대련만 하실 거잖아요.”
“……그러면 안 돼? 할머니의 훈련장은 조명이 제법 밝아서 밤에도 대련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리고, 아이작 오라버니도 오랜만에 보고……”
“아가씨만 본가에 돌아오시면, 아이작 님이나 러슬 님께서 모든 일을 다 제쳐 두셔서 기사단의 업무가 안 돌아간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들리는데요.”
샬롯은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베티의 그 불평도 제법 오래 듣고 있는 거라 어쩔 수 없이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기사단의 행정을 돌보는 간부들은 샬롯에게 직접 뭐라고 하진 못하고 베티를 붙들고 종종 하소연을 늘어놓는 모양이었다.
하루 이틀 일을 안 하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냐 싶어도, 샬롯과의 대련이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오는 아이작과 러슬 때문에 일이 엉망으로 꼬이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듯했다.
“그럼 그냥 나 혼자라도 수련을 좀 하다 들어가면 안 돼?”
“안 돼요, 아가씨. 맨날 황궁에 계셔서 그동안 관리도 제대로 안 받으셨잖아요. 이번 연회 때는 정말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셔야 해요.”
관리라는 말에 샬롯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사지를 받는 것도, 꽃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머리카락에 매끄러운 기름을 바르는 것도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막상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쩐지 그렇게 귀찮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뭐, 이제 와서 누구에게 잘 보이겠다고.”
이렇게 샬롯이 치장하는 걸 귀찮아할수록, 베티는 더욱 안달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샬롯을 봐 온 유모였던 만큼, 샬롯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자란 이상 그녀를 잔뜩 꾸미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가씨! 아가씨야말로 이제 갓 성인이 되신걸요? 이제 정말 언제 청혼을 받으실지 모른다고요.”
“글쎄.”
“원랜 요맘때가 제일 주목받고 싶어 하실 땐데. 어쩜.”
“주목이라면,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어.”
샬롯의 웅얼거림에, 베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10년째 쏟아지고 있는 팬레터는 일일이 다 관리하기도 어려워서 분류하여 창고에 쌓아 놓아야 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베티는 이번에야말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가씨, 하지만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번 연회에 세레스 국의 황녀님이 오신다지 뭐예요. 아가씨께서 맨날 노래를 부르며 질투하시던 그분이요.”
그 말에 샬롯은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