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샬롯과 아이작이 검을 주고받는 소리가 세티야 가를 깨웠다.
황궁 방문 일로 자리를 비웠다가 귀환하던 러슬과 비야키는 세티야 가의 정원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소리를 들었다.
황곰 기사단의 재정 문제로 온종일 골머리를 앓았던 러슬의 얼굴에 대번에 웃음이 번졌다.
“아이작 형님께서, 또 신나신 모양인데.”
“그래 봤자, 이젠 샬롯도 팔 길이가 길어져서 옛날처럼 손쉽게 상대하기는커녕…….”
“전적만 치면, 샬롯이 승리한 게 더 많으니까 말이야.”
러슬과 비야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란히 웃음을 흘렸다.
원래부터 둘은 이렇게까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게 당연했다. 대부분의 검과 무예를 숭상하는 가문들의 경우, 더 강한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는 구도를 자연스럽게 마련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세티야 가는, 예외적인 걸출한 후보가 한 명 탄생하면서 그 구도가 완전히 뒤집혔다.
황곰 기사단의 부단장들이 탄 말 두 필이, 마구간으로 바로 향하는 대신 본관 앞 연무장에 먼저 들렀다.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만 듣고도 이미 예상했던 대로, 진지한 얼굴의 아이작과 샬롯이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이작의 발아래에는 부러진 목검이 세 개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샬롯은 언제나 그렇듯 그 낭창낭창하고 가느다란 목검을 어떻게 그렇게 잘 다루는지 한 번을 부러뜨리는 법이 없었다.
“흐압!”
아이작이 큰 기합과 함께 몰아붙이는 것을, 샬롯이 물 흐르듯 받아넘기며 몸을 휙 회전시켰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분홍색 머리카락, 단정한 무복 차림이 다인데도 샬롯은 검을 쓸 때 어딘가 화려함이 있었다. 검 끝이 허공에 꽃 모양을 수놓는 듯한 환상이 보일 정도로, 허초가 많은 검술은 우아하고 치명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러슬은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십 년 전,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한 제 동생은 순식간에 성장하여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거다.
솔직히 처음에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도 많았다.
란슬롯이 가장 티를 내고 덤벼서 그렇지, 굳이 란슬롯이 아니라도 그전까진 반편이 취급도 받지 못하던 샬롯의 급성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샬롯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샬롯은 검술만 대단한 게 아니라 그릇이 넓었다.
그 누구도 조성하지 못했던 이 분위기를 만들어 낼 만큼, 샬롯은 제가 먼저 나서서 베푸는 법을 알았다.
샬롯을 향해 먼저 베풀었던 이는 아무도 없는데, 고작 아홉 살 무렵부터 그녀는 먼저 나서서 베풀었다. 황곰 기사단 수련생들의 무술을 봐주거나 사용인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심지어 그게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러면서 그 시기와 질투도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천천히, 샬롯은 세티야 가문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뒤로는 후계자 후보들 간의 사이도 점점 좋아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젠 모두가 구획을 나누기보다는 함께 모여 수련을 하는 일이 많았고, 검술에 대한 지식도 꽁꽁 감춰 두려 하기보다는 서로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후계자 선정을 위해 검을 배우기 시작했던 이들 모두, 지금에 와서는 그 목표는 흐려진 지 오래였다.
곧 세티야 가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자리가 마련되느니 어쩌느니 하고 말이 돌아도, 이미 세티야 가의 후계자 후보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샬롯이 아직 어리니까 만약 지금 당장은 다른 사람이 후계자가 되고 가주가 되더라도, 결국엔 샬롯에게도 가주의 자리가 돌아갈 거야.’
후계자 후보인 러슬조차 그렇게 생각하니, 가문에서 일하는 다른 식솔들의 눈에도, 가문에서 통솔하고 있는 기사단 소속원들의 눈에도 당연히 그렇게 보일 거였다.
‘누구 하나,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품지 않은 이가 없는데…… 다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다니. 내 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한 존재지.’
탁!
러슬이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웃는데, 큰 소음과 함께 아이작의 손에 들려 있던 목검이 또 부러졌다. 그리고 그사이를 놓칠 리 없는 샬롯의 목검이 아이작의 목젖을 그대로 겨냥했다.
아이작이 시원스럽게 두 팔을 들어 보이며 패배를 인정하자, 샬롯이 그를 한 번 꽉 안아 주곤 물러났다.
짝짝짝.
어느샌가 연무장 주위에 모여 있던 사용인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러슬과 비야키도 손뼉을 쳤다.
샬롯은 그렇게 정신없는 속검 대전을 펼쳤으면서도, 러슬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러슬 오라버니, 왔어?”
“그래.”
러슬은 대답과 함께 샬롯에게 다가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 번 흘끗 바라보곤 그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샬롯은 묘하게 검 실력이 대단해지고 머리가 큰 뒤에도 이렇게 애정 표현을 부끄러워할 때가 있었다.
그게 또 귀엽기도 했지만, 유년 시절에 잘해 주지 못한 탓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러슬이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샬롯을 한 번 번쩍 안아 들었다가 놓았다. 샬롯이 까르르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는, 연습 안 해?”
연습이라.
샬롯의 실력은, 그사이에 정말로 일취월장했다. 아이작이 저렇게 비등비등한 적수인데 제가 덤벼 봤자 패배가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러슬은 그렇다고 해서 빼는 성격이 아니긴 했다. 십 년이나 꾸준히 패하다 보면, 어느 날부턴가 부끄럽지도 않고 제 동생이었지만 존경심만 들었다.
러슬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황곰 기사단의 소문난 교관님의 지도를 좀 받아 볼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말이지.”
“지난번에 지적당한, 어깨를 먼저 움직여서 행동을 읽히는 건 이제 완전히 수정했으니까.”
샬롯이 진지하게 눈을 반짝였다. 정말로 샬롯은 이럴 때마다 진심이었다.
러슬은 문득, 궁금해서 장난을 반쯤 섞어 물었다.
“샬롯, 너 가끔 보면 기사단을 잘 양성해서,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사람 같아.”
샬롯이 깜짝 놀란 얼굴로 러슬을 바라보곤, 씩 웃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
“들켰네.”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일까.
러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동생을 바라보았지만, 샬롯은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그의 목검을 가지러 가 버렸다.
‘……샬롯이 말하면 진심 같아서 무섭다니까.’
뜬금없이 말한 모든 일이, 정말로 이뤄졌었으니까. 당장, 샬롯의 기이하리만큼 대단한 실력부터가.
흔들, 흔들 부드럽게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그는 얼굴을 한껏 구겼다가 한숨과 함께 폈다.
전쟁.
세레스 국과도 이례적으로 사이가 좋은 상황에, 굳이 그런 일이 벌어지겠냐마는…… 짐작되는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황곰 기사단의 예산을 감축했다던 황후에 관한 이야기가 문득 머리를 스쳤다.
두근, 두근.
나직하게 심장이 뛰었다.
싸우는 걸 좋아한다는 게, 같은 나라의 식구들끼리 굳이 검을 들고 피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만약 샬롯의 말대로 정말로 어떤 사태가 생긴다면, 그때는 샬롯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어느 황자님의 줄을 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러슬은 솔직히 정치적 지형이니 뭐니 하는 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카밀라 가주만큼 아직 큰 책임을 지녀야 하는 자리에 올라 보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황후가 샬롯을 죽일 뻔했던 사냥제 사건 이후로 리카르도를 지지할 마음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을 뿐.
샬롯에게 눈독 들이는 그 요제프 황자님도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쪽이 차라리 나았다.
* * *
툭, 탁!
탁, 탁!
카밀라는 창가에 서서 제 후계자 후보들이 목검을 주고받는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이젠 제법 오래된 문화나 관습처럼 자리 잡은 일이었다. 원래 카밀라가 쓰던 연무장에서 다 함께 모여 수련을 하는 건.
‘언제 봐도, 참 보기 좋군.’
실제로 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면은, 십 년째 그녀의 집무실 밖을 계속 지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십 년째, 그 풍경의 중심에는 샬롯이 서 있었다.
카밀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기울이는데, 문득 문밖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노크 소리도 나기 전에 먼저 묻자, 문밖에서 그녀의 비서 웨인이 답했다.
“샬롯 아가씨의 주치의옵니다.”
“……벤? 들어오시게.”
벤이 이 가문에서 봉사한 지도 오래되었는데도 자신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식솔이 그렇듯, 집안일의 실무를 맡은 제롬과 차라리 이야기할 일이 더 많을 테다.
그런 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카밀라는 조금 놀라서 답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벤은 품에 뭔가 제법 무거운 것을 안고 있는지, 평소보다 발을 살짝 땅에 끌며 걸었다.
“무슨 용무지? 샬롯이 어딘가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벤이 제게 올 만한 일이라고 해 봐야 그런 것밖에 없을 듯하여, 먼저 짐작하여 꺼낸 이야기에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닙니다, 가주님.”
“그러면?”
벤은 대답 대신 제가 망토 속에 품고 온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묵직하게 짤랑, 짤랑 소리가 나는 주머니가 여덟 개.
소리만 들어보아도 모두, 금화인 모양이었다.
“이게 다…….”
“개당 천 하스론이 들어 있습니다.”
2년 치 기사단의 운영비를 덜렁 들고 들어온 벤을 보며, 카밀라는 그녀답지 않게 주홍색 눈을 크게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