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아이작 오라버니!”
아이작은 제게로 달려오는 여인을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았다.
샬롯은 정말로 많이 컸다. 무복 차림에 어울리게 하나로 높게 묶어 올린 분홍색 머리카락과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가 누가 봐도 성숙하게 자랐다는 느낌이 물씬 났다.
샬롯이 워낙 귀찮다며 소매를 걷어 올리는 통에, 이제 샬롯의 무복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아이 때는 베티가 샬롯에게 보호대까지 권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법 파격적인 차림새였다.
아이작은 그런 샬롯을 보며, 딱딱하게 굳어만 있던 얼굴을 허물고 픽 웃어 보였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샬롯이 날듯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샬롯도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었음에도, 아이작은 그런 그녀를 별것 아니라는 듯 가뿐하게 받아 안았다. 그뿐만 아니라, 양팔로 샬롯을 안아 올려 한 팔로 쏙 안아 올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습관이 잘못 든 건지, 아이작은 아직도 만날 때마다 샬롯을 안아 줘 버릇 하고 있었고 샬롯도 거기에 별 이견이 없었다.
“오라버니도 요제프와 같이 세레스 국에 다녀오셨다죠?”
“그래. 다녀왔지.”
“둘 다 없으니까, 제법 허전하더라고요.”
아이작이 한쪽 입꼬리를 피식 당겨 웃었다.
아이작도 요제프도 없어 허전했다 말을 하긴 해도, 이제 이 가문에서 샬롯만큼 주목을 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초청장이 하루에도 스무 통이 넘게 쏟아져 들어왔다. 샬롯을 만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각계각층에 어찌나 많은지 몰랐다.
그런데도 저렇게 허전하다는 소리를 하는 건, 빈말이 아니라 마땅한 대련 상대가 없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수련은 좀 했고?”
“오라버니야말로 여행 다니시느라 근육이 좀 빠지셨겠어요.”
아이작은 샬롯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목검이 걸려 있는 곳까지 걸어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샬롯이 너무 많이 자라서, 이젠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혹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이젠 다 큰 성인끼리 거리를 좀 두라는 이야기도 많았고.
하지만 정말이지 지난 10년 동안 소중히 아껴 왔던 사촌 동생은, 이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뻤다.
요제프와 결혼을 한다면, 반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세레스 국은, 어땠어요?”
“뭐, 문화 교류라는 게 다 그렇지. 형식적으로 떠들어 대는 이야기들……. 그래도, 타국 기사들의 무술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니까. 괜찮았다.”
“거기서 새로운 인연은 없었고요?”
아이작이 피식 웃었다.
다른 인연.
글쎄, 가주가 되겠다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열망한 시기가 있었다. 가주가 되어서, 기필코 아버지의 복수를 해 주겠다고 열망했던 때가.
그런데, 그런 열망도 다 한풀 꺾였다.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다짐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지만, 샬롯을 지켜보는 카밀라를 보면서, 아이작은 천천히 떠올렸던 거다. 제 아버지를 바라보던, 카밀라의 시선도. 재능 있는 젊은 청년을, 어떻게든 최대한 키워 주고 싶다는 그 전폭적인 지지도.
카밀라와 그 뒤로도 아직까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나눈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무덤에는 아직도 흰 꽃이 놓이고 있었지만, 무덤 앞에서 마주친 적도 없었고.
하지만 인제 와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서, 마음속의 그 불꽃 같던 증오와 원한도 가닥을 잡지 못하게 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자에게도 크게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많이 겸손해졌다.
가주가 된다면 후계자를 생산해야 하니, 당연히 부인이 있어야겠지만…… 꼭 제가 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부쩍 든 지가 오래되었다. 특히, 황곰 기사단의 수련생들을 잘도 지도하는 갈래머리 소녀를 지켜본 뒤로는 더욱.
세티야 가는 전통적으로 실력과 재능만 있다면 여인들도 가주 자리에 많이 올라왔기 때문에, 성별을 따질 필요도 없었고.
“나는 샬롯만 있으면, 딱히 다른 여자는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이작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샬롯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더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샬레스 황녀 전하도 뵈었어요?”
“샬레스 황녀님?”
“요제프와 샬레스 황녀님이 전 정말 친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만날 때마다 아웅다웅하질 뭐예요. 둘이 정말 특별한 사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아직 둘 다 몰라서, 도대체 언제 알게 될지 모르겠다니까요. 오라버니는 뭔가 들은 거 없어요?”
톡, 톡.
기껏 골라 든 목검으로 애꿎은 밀짚 인형만 두드려 대며 샬롯이 불만스레 하는 말에, 아이작의 눈 속에 작은 그림자가 스쳐 지났다.
천재적인 구석이 많은 아이라 그런지, 샬롯은 가끔은 정말 대단하다 싶은 소리를 했지만, 또 가끔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도 하곤 했다. 요제프 황자에 대해선 특히 그런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약혼했는데, 실은 친구라느니. 친구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느니. 요제프 황자와 샬레스 황녀가 이어질 거라느니.
처음에는 그냥 듣고 흘렸는데, 시일이 지나고도 계속해서 그 말을 듣다 보니 이게 점점 더 이상한 거다.
아이작은 이번에 요제프 황자와 함께 문화 교류를 하러 간 김에, 아예 대놓고 황자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세레스 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둘이 함께 마차에 올랐을 때였다.
‘황자 전하께서 정말 샬롯과 혼인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태도를 분명히 밝히시죠. 애가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
아이작이 먼저 꺼낸 말에, 요제프가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처럼 못 들은 척해 버리려나 생각했는데, 어쩐 일로 요제프 황자는 그 특유의 새카만 눈동자로 아이작을 참 오래도 응시하더니 느릿하게 답했다.
‘지금, 내가 샬롯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면. 세티야 가를 이용하는 게 되어 버릴 텐데. 그래도 괜찮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건 여유 있고 안이한 생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다른 누가 샬롯에게 먼저 청혼을 하면 어쩌실 생각으로 그렇게 여유 있게 구십니까?’
‘……다른 누구라. 그럴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샬롯을 믿으니까 괜찮아. 그런 것을 신경 쓰기보다는 모든 것을 빨리 정리하고 정식으로 청혼할 거야. 괜히 조바심에 서둘러서, 샬롯에게 폐가 되고 싶진 않아.’
그런 말을 천천히 되받아치는 요제프도, 더 이상 소년의 인상은 아니었다.
제법 제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경고의 시선을 보내오던 요제프 황자의 얼굴을 기억해 낸 아이작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당겨 웃었다.
‘나를 그런 눈으로 봐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그러곤 그는 샬롯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들은 거? 없는데. 아무것도.”
요제프 황자의 그 거창한 의도를 위해 숨겨 주는 건 아니었다. 그냥 심술이었다.
아이작의 대답을 들은 샬롯은,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작은 그녀의 고운 옆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어 생각을 털어 내고는 제가 쥐고 있던 목검을 더 가벼운 것으로 바꾸었다. 샬롯의 속검을 상대하기에 더 적합한 것으로.
샬롯은 한숨을 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도 그사이 많이 성숙해졌다.
샬롯도 제법 많이 자랐는데도, 아이작도 쑥쑥 자랐다. 여덟 살 차이가 크기는 한지, 이제 스물일곱의 아이작은 정말로 훤칠한 청년이 된 거다.
수도 비브로슈에 사는 귀족들은 체이커 국의 다른 지방에 비해서는 결혼을 늦게 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이미 혼인을 해도 충분히 했을 나이였는데도 아이작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었다. 만나는 여인조차도 없는 눈치였다.
‘오로지 가주가 되는 것밖에 다른 목표가 없는 걸까? 아직도?’
샬롯은 아이작의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그를 보고 있자면 꼭 그렇게만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그녀를 대하고 있을 때의 아이작은 요즘엔 정말이지 그렇게 유할 수가 없었다.
“일단, 한판 할까요?”
“그래, 그러지.”
샬롯과 아이작은 천천히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다.
“매향성류(梅香成流)!”
먼저 덤빈 것은, 샬롯이었다. 하지만 아이작도 그녀와 함께 대련한 세월이 제법 길었다. 처음에는 샬롯이 도대체 무슨 말을 외치는 건지 의아했지만, 이젠 그녀가 미리 제가 사용할 검의 초식 이름을 외친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 초식의 이름을 들으면 이제 샬롯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샬롯의 목검이 수많은 변화를 그리며 그에게 쇄도해 왔다. 샬롯이 검을 쓸 때마다 풍기는 이젠 익숙한, 묘한 꽃향기가 그녀의 검을 감싸고 있었다.
‘이건 뭐, 안다고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그 난감함이 즐거웠다.
아이작은 오랜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적수와 검을 섞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서 만면에 미소를 짙게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