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09)화 (109/123)

109.

샬롯은 주먹을 콱 움켜쥐곤, 눈앞에 보이는 쿠키 중에서 사과잼이 들어간 것을 세 개 움켜쥔 뒤 카밀라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조금 후에, 다시 찾아올게요. 저만 믿으세요, 할머니!”

카밀라가 인사를 받아 주자, 샬롯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쌩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기대하게 되네. 말이 안 되는 이야긴 줄 알면서도.’

카밀라는 후후,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끼는 검들의 컬렉션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던 벽도, 이제는 절반 이상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정말로 아끼는 것 중 몇 개만 빼놓고는 죄 샬롯에게 주어 버린 거다.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이 온다면, 그땐 불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아이가 하기에 따라서는 어쩌면 더 든든할지도 모르겠어.’

카밀라는 다시 한번,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가주의 방을 나온 샬롯에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티가 다가섰다.

“말씀은 잘 나누셨나요, 아가씨?”

“응.”

“곧 식사 시간인데, 어떻게…….”

“그건 조금 이따가. 우선 벤을 불러 줘. 할 이야기가 있어.”

베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샬롯은 베티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긴 채로 제 방으로 올라갔다.

오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벤은, 10년째 샬롯의 주치의로 행세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가문에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빨리 나타난 것을 보면 그녀가 가문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러 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잿빛 수염을 짧게 다듬은 벤의 얼굴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대단히 신나 보였다.

샬롯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젠 제법 손 크기가 비슷해진 두 개의 손이 허공에서 맞잡아졌다.

“잘 지냈어, 벤? 혈색이 좋아.”

“덕분입니다. 아가씨야말로, 잘 지내신 것 같습니다.”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수하며 쥔 손을 통해, 고르게 그의 몸을 휘감아 도는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전, 샬롯은 만성 통증을 앓고 있던 벤의 왼손과 팔목을 약속대로 치료해 주었다.

벤은 당시에도 그리 젊지 않은 중장년의 나이였기 때문에, 기혈이 좁아진 곳이 많았다. 벤이 무공을 쓸 것도 아니었고, 요제프처럼 큰 기운을 운용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치료는 오히려 쉬웠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일반인의 몸에 기운을 자칫 잘못 불어넣었다간,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샬롯이 내공을 제법 쌓고, 높은 경지에 오른 뒤에도 벤의 손목은 천천히 돌봐 준 것이다.

다행히 그 뒤로 지금까지 다시 그 통증이 재발하지 않고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어때?”

앞뒤가 다 잘린 샬롯의 말에도, 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성과가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일단, 저희 길드를 통해 푸른 물고기 상단 쪽에 흘려 둔 정보는, 이번에도 적중한 것 같습니다. 작년의 풍작 때 넉넉하게 사들인 농작물과 상품 작물들을 올해 세레스 제국의 기근 때 한꺼번에 수출해서, 제법 괜찮은 수입을 올린 것 같습니다.”

샬롯은 그 대단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세레스 제국의 정보라면, 자신 있었다.

샬레스 황녀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보니, 그녀가 아는 정보들은 체이커 제국보다 오히려 세레스 제국에 대한 것이 더 많았다.

샬롯은 그것들을 아예 툭 터놓고 벤에게 말했었다. 어떤 경위로, 미래의 정보 중 일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을 활용하고 싶다고. 가능한 한 자신이 연루된 것은 숨기고 싶다고.

벤은 한때 샬롯이 어리숙한 것을 노려서 아가씨의 주머니를 슬쩍 털어 눈먼 돈을 제 주머니로 가져갈 생각까지 했던 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을 제대로 수립하기도 전에 샬롯에게 바닥까지 탈탈 털린 뒤로는 완전한 그녀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수도 비브로슈의 북문 쪽에 투자하라고 했던 샬롯의 조언도, 그때는 밑져도 본전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대로 적중했다.

그 후로 벤은 샬롯이 콩을 팥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모종의 경로로 미래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 치고 넘겼겠지만, 벤만은 그걸 온전히 믿어 주었다.

벤도 본업은 의원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모든 일을 주관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벤은 돈을 투자해 정보를 유통할 중간 거래상을 하나 만들었다. 작은 정보 길드를 설립한 거다.

길드의 이름은 ‘매화’였다.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름을 가진, 그 작은 정보 길드는 지난 10년 동안 아주 확실한 미래 예측을 통해 고객들의 재산을 불려 주는 데 확실히 기여를 해 왔다.

그중 주된 고객 중 하나인 푸른 물고기 상단은 아렌느의 친정인 백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샬롯은 일부러 그 상단을 밀어주었다.

요제프에게도 그의 세력이 필요했고, 뒷배가 필요했으니까.

벤이 의원이라는 것도 샬롯의 정체를 숨기는 데는 꽤 유용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급부상한 정보 길드의 뒷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도 그런 대단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게 장년의 의원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샬롯과 벤이 접촉하는 것도, 공작가의 영애로서나 수련을 하는 무인으로서나 주치의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특별히 주목을 사지도 않았고.

“우리가 가진 돈이 얼마나 있지?”

“현재 투자 중인 돈까지 포함해서 말씀입니까?”

“당장, 지금 당장 운용할 수 있는 유동 자금.”

벤은 대충 어림잡아 계산을 해 보듯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그도 그럴 게 샬롯이 각종 대회의 상금으로 벌어들인 돈이나, 제롬이 갑작스럽게 가끔 주곤 하는 용돈 같은 것들을 모아 투자한 돈이 10년 사이에 어마어마한 액수로 불어나 있었다.

“글쎄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만…….”

정말로 대답을 듣고자 의도한 질문은 아니었다. 샬롯은 벤이 종종 정리해서 올리는 보고서에서 이미 대략적인 액수를 본 바 있었으니까.

“황곰 기사단의 재정에 좀 보태고 싶은데. 가능할까?”

황곰 기사단의 재정이라면, 공작가가 거둬들이는 세수와 황가에서 나오는 돈으로 충분히 충당될 터였다.

벤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해서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가능하냐니, 무슨 말씀입니까.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저희가 계속해서 운영비 전부를 대는 것도 별 무리는 아닙니다.”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법 큰돈인데, 지금까지는 따로 쓸 일이 없었으니까 내 소유인 걸 숨길 수 있었겠지만 직접 운용하자면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겠군.”

“그렇기야 합니다만. 언제까지 숨겨 두자고 모으신 자금도 아니신 거로 압니다.”

벤의 대답에, 그녀는 결의에 찬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고마워, 벤. 항상 이렇게 도와줘서.”

벤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가씨께서 말씀해 주신 것들이 아니었다면, 아들 녀석이 벌어 온 돈을 싹 날려 먹고 저도 패가망신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월급도, 항상 넉넉히 챙겨 주시질 않습니까.”

“응. 의원 일도 잘하니까 그렇지. 황궁에 있는 의원들보다, 벤이 더 믿음이 가. 요제프의 진찰도 곧 다녀와 주겠어? 세레스 제국에 갔다가 돌아왔거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기꺼이 다녀오겠습니다.”

“응. 궁중 연회 때 나랑 같이 가도 괜찮고.”

“아닙니다. 진료는 자주 보는 게 좋으니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줄래?”

그 뒤로 샬롯과 벤은 일단 지금 확보할 수 있는 자금 중 일부를 당장 찾아오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다음 헤어졌다.

벤이 떠난 뒤로, 샬롯은 제 방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벤이 돈을 찾아오기 전까지의 여유 시간에 복잡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다.

‘황후가, 기사단의 자금줄을 조여 온다라.’

그건 많은 걸 시사했다.

지금까지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던 황후가 드디어 전면전에 나서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일이, 지저분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 황위 다툼으로 괜히 유혈 사태라도 일으켰다간, 귀족들 간 분란만 커질 테고…… 그러면 리카르도가 황태자가 되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모습들처럼 나라가 불안정해질 거야.’

샬롯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아야 해.’

하지만 그게 말이 쉽지, 워낙 황후의 친정인 탄티누스 후작가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을 길게 뱉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샬롯의 귀에, 어디서 목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색한 샬롯이 몸을 벌떡 일으켜 창가로 달려갔다.

어느 날부턴가 세티야 가의 후계자 후보들이 함께 공용으로 사용하게 된 공간인, 본관 앞 카밀라의 연무장에는 수려하기 짝이 없는 금발의 청년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베티! 베티! 나, 이 거추장스러운 옷 좀 벗을래!”

샬롯의 갑작스러운 말에 막 방으로 들어서던 베티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네, 아가씨? 모처럼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베티가 불만스럽다는 듯 종알거렸다.

샬롯은 베티에게 마음껏 눈요기하라는 듯 그녀의 앞에서 드레스를 활짝 펼치며 두 바퀴 빙그르르 돌아 주었고, 베티는 그제야 까르르 웃으며 만족했다는 듯 무복을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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