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네……?”
그러고 보니, 카밀라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자고 저를 부른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샬롯이 고개를 들어 카밀라의 날카로운 옆얼굴을 바라보자,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시선을 받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죠?”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향해 물러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시녀가 테이블 위에 작은 접시를 내려놓고 찻잔을 세팅해 주고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방 바깥으로 물러났다.
처음에는 달콤한 쿠키만 내어 주던 카밀라의 다과들도 이젠 제법 다양해져서 샬롯의 입맛에 꼭 맞는 과자들 사이에는 건강한 제철 과일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었다.
“일단 좀 들렴. 볼 때마다 그 실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게 말랐구나.”
‘아직도 누군가의 할머니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시지만, 그래도 이렇게 챙겨 주시는 것만은 영락없는 할머니시라니까.’
샬롯이 쓰게 웃었다.
하긴 항상 몸을 단련하고 있는 카밀라는 여자치고도 근육이 잘 붙는 편이어서, 좀처럼 근육이 붙지 않는 것을 내력으로 보충한 검술을 쓰는 게 습관이 된 샬롯과는 외형이 제법 다르긴 했다.
오독.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샬롯은 사양하지 않고 쿠키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차피 이 쿠키도 세티야 가의 주방에서 나온 것인데도 카밀라의 방에서 먹는 디저트들은 어딘지 특별한 맛이 있었다.
샬롯이 따뜻한 차와 함께 쿠키 하나를 순식간에 다 해치우는 것을 지켜보던 카밀라가 작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황후가, 압박을 시작했다.”
카밀라가 워낙 여상하게 말했기에, 샬롯은 그녀의 대답을 한 박자 느리게 이해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카밀라는 쫓기는 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수많은 파도를 헤쳐 온 관록 있는 선장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놀라서 다른 쿠키를 향해 뻗던 손을 거둬들인 것은 오히려 샬롯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의외로 정계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아렌느가 다시 황비로 복귀한 초기에, 그녀의 이미지를 좋지 않게 본 귀족들이 왈가왈부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무마되었다.
굵직한 사건이 그 정도니, 정말로 이상하리만큼 별일 없이 잘 흘러왔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평화로움에 물들어 있었을까?
하지만, 놀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황후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현재 정치 지형이 리카르도에게 유리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으니까.
“……압박이라뇨?”
카밀라가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았다.
“전시가 되거나, 조금이라도 불안정한 시기에는 누구나 3대 기사단을 추앙하지. 하지만, 제법 평화가 오래되었어. 얼핏, 기사단에 들어가는 막대한 유지비용이 아깝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시기지. 황후는 그걸 이용한 거야.”
샬롯은 고개를 저었다.
황후의 판단이 좀 안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평화가 여기까지 온 것만도 정말 감사한 일이잖아요. 이제 곧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주변 국가들의 기세가 이렇게 등등한데요.”
“그래. 그건 그렇지.”
실제로, 책 속에서 2황자에게 황위가 물려지고 나라가 파탄 나는 것도, 그래서 체이커 국이 전장의 무대가 되어 버리는 것도 그리 머지않은 시기였다.
샬롯은 하루하루 더 실감했다. 이 평화로운 나라의 모습을 제 눈으로 목격하면서, 제 삶의 터전을 몸 바쳐 일궈 나가는 성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그냥 개념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했다.
어릴 때는, 그냥 제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일차원적인 생각뿐이었는데, 이젠 그런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좀 더 넓은 관점에서도 싫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고아가 생길 테고, 자신같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도 생길 테고…….
그냥 그 모든 굴레가 싫었다.
평화롭게 살기에도 짧은 삶이었다.
“지금이 제일 조심해야 하는 시긴데…… 황후 폐하께서는 왜 그러시는 거죠?”
샬롯이 힘을 주어 항변하는 것을 보며 카밀라는 작게 웃었다.
이상하게, 저 아이는 그런 힘이 있었다. 조막만 할 때부터 가주인 자신이 모든 중요한 의제들을 털어놓고 상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공정한 판단력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식이지만 제롬에게서 이렇게 똘똘한 손녀가 나왔다니…… 하늘이 도우신 거라고밖엔.’
카밀라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대답했다.
“황후가 우리 기사단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감축하는 건, 리카르도 황자를 다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뜻일 거다. 그거 말곤, 황후가 원하는 게 없을 테니까.”
카밀라가 이 이야기를 샤를로테에게 전하는 건,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첫째로, 이제 슬슬 황태자의 자리도 그 주인이 결정될 때가 되었으니 세티야 가도 정말 명확히 태도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 거다.
그런데 요제프 황자에 대한 지지를 고려해 달라고 그렇게 사정사정했던 것치고, 샬롯은 뜻밖에도 그와의 결혼을 그리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대화한 것처럼, 결혼에 별 뜻이 없는 사람처럼 굴기만 했다.
물론 카밀라 개인으로서는 요제프 황자와 리카르도 황자를 두고 고려하자면, 당연히 인품과 실력 양쪽에서 요제프 황자가 월등히 나은 것은 틀림없으나 이 일은 그렇게 황자 개인만을 두고 고려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샬롯에게 확실하게 다시 마음을 정하라고 독촉하는 거였다.
그리고 둘째로, 황태자를 정하는 시기와 세티야 가가 후계자를 정하려고 하는 시기가 맞물리고 있었다. 카밀라는 슬슬 물러날 준비를 하면서, 후계자 후보들에게 이렇게 한 번씩 과제를 던져 주고 있었다.
‘자, 이제 뭐라고 할 거지?’
샬롯이 치열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며, 카밀라가 여유 있게 차를 기울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샬롯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레스 차림이라 곱게 풀어 내린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할머니.”
“그래.”
“재정 문제라면,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그런 압박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든? 알아서 한다고?’
카밀라는 전혀 예상도 못 한 방향의 대답에 조금 놀라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사단이 운용되는 데에는, 상상 밖의 금액이 들어간단다. 기사들 개인에게 주는 월급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불어 기사들의 무구와 군마의 유지 및 보수에 필요한 비용 등…… 허투루 볼 수 있는 돈이 아니야. 물론 세티야 가에서도 본래 그 금액의 절반을 충당하고 있지만…….”
“허투루 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걱정하실 것 없어요.”
제법 단호한 대답이었다.
카밀라는 뭔가 말을 덧붙이려다가 작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은 워낙 삶이 노동에서부터 분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번다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샤를로테가 본가에 돌아오기 전, 러슬과 아이작에게도 이 이야기를 했지만, 둘 다 그저 당혹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당돌하게 제가 해결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열아홉이면, 정말 많이 자란 거긴 하지만 또 사회에서는 이제 겨우 첫발을 뗀 햇병아리였다. 그런 입장에서 도대체 어디서 그런 큰돈을 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제가 그간 보아 온 샬롯은, 너무 많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을 일으킨 아이였다.
누구도 본 적 없는 검법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했고, 누구보다 연약한 몸으로 누구보다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누구보다 대단한 통찰력으로 황후의 마수에서 요제프를 지키는 강단까지 보여 주었다.
게다가, 10년 전 있었던 사냥제 이후부터 샬롯은 직접 황곰 기사단의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일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본인은 체계적인 수련을 받는 자리에 제대로 얼굴을 비친 적도 없는 상황이건만, 이상하게도 샬롯은 수련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녀 본인은 단계별로 수준을 쌓아 온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강해져 나타났으면서 마치, 아이 때부터 무술밖에 모르고 살아온 것처럼 굴었다.
수련생들의 어디가 부족한지, 자세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지 귀신같이 찾아내었다.
그녀의 그 적재적소의 코칭은 인기가 대단했다.
만년 수련생 신세를 면치 못하던 이들까지도 샬롯 덕분에 당당한 기사단의 일원으로 승급한 일이 제법 많았다. 게다가 그 소문이 나자 수련생이 대거 몰려들어서, 실력으로 엄격하게 가려 사람을 뽑아도 황곰 기사단은 제법 인원이 많이 불어난 상태였다.
그런 샬롯이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면, 어쩐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그때는…….’
카밀라는 따뜻한 찻잔을 손으로 감싸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어.’
자신이 공작가를 이끄는 시대는, 분명 대단한 권세를 누렸음에도 다른 가문들의 눈치를 보고 협상을 하고 황가의 세력들에게 줄을 서 가며 균형을 맞춰야 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만약 힘이 없던 황자를 처음부터 지지하고 이끌어 황제위에 올리는 자가 세티야 공작가의 가주가 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거다.
지금까지도 대단한 권력을 누린 가문이었으나, 분명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가문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