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황후는 자연스럽게 10년 전, 사냥제 때의 일을 떠올렸다. 이상하리만큼 그때, 갑자기 나타난 아렌느가 샤를로테 세티야를 감싸고돌 때부터 뭔가가 틀어졌다.
샤를로테, 그 계집애가 끼면 모든 일이 정말 이상해졌다.
요제프와 관련해서도 그랬고, 아렌느와 관련해서도 그랬고……
‘……어떻게 해서든, 황궁으로 다시 기어들어 오지 못하게 해야 했어.’
의전 장관과 황비의 모습이 완전히 연회 홀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황후는 문득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 다 되어 있었다.
여름.
황제 폐하께서는, 지난겨울에 그렇게 발표하신 바가 있었다. 이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날이 더워질 무렵이 되면 황태자를 공식적으로 정하겠다고.
그녀는 눈치 빠른 시녀들이 제 앞에 따뜻한 차와 쿠키를 놓아 주는 것을 보며 따뜻한 차로 속을 달랬다.
지난 10년.
리카르도와 요제프의 대결 구도는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오고 있긴 했지만,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거야 리카르도 쪽이 우세하더라도 그놈의 망할 칼그림자의 날 때문에 요제프가 국민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이번 회차의 칼그림자의 날이 지난 지도 두어 달밖에 되질 않았다. 황제 폐하께선 워낙 그런 점을 의식하시는 분이기도 했고…… 지금으로선 리카르도의 손을 들어주실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장담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분하지만, 조금 뒤질지도 몰라.’
호록.
황후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이제 황제도, 민심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아렌느 그 출신도 대단치 않은 계집에게 어쩜 그렇게 마음을 쓰시는지……. 티 내지 않으려 하시는 것 같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혼인한 황후를 대할 때와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물론, 그것과 후계자 승계 문제는 다른 문제이지만 전혀 연관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런 불확실한 것에 기대느니 더 확실한 것에 기댈 것이다.
무엇보다, 황후도 그간 놀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갖은 수를 써서 세력을 키워 왔다.
세티야 가의 태도가 제법 미적지근해진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세티야 가를 버린다고 하더라도 세력으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만큼 귀족들의 마음을 규합해 둔 터였다.
황태자 자리만은 리카르도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 어떤 수를 써서든, 기필코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 계획을 위해서 황후는 우선, 리카르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만한 짝을 찾아 줄 요량이었다.
‘리카르도가 샤를로테, 그 계집을 유혹할 거리만 있으면 정말 고생할 것도 없을 텐데.’
황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찻잔을 기울였다.
* * *
“샬롯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어머, 샬롯 아가씨! 어서 오세요! 새로운 특제 소스 샌드위치를 만들어 두었답니다.”
“샬롯 아가씨! 무복도 새로 맞춰 두었어요.”
“팬레터도, 선물도 방이 넘치도록 들어온 참이에요. 어서 이것들 좀……”
샬롯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워낙 평소에 샬롯이 허물없이 대해 왔던 시녀들이 그녀에게 달려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샬롯은 방긋 웃으며 시녀들과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눠 가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샬롯의 방은, 10년 전에 쓰던 다락방과는 사뭇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가주가 있는 본관의 가장 조망이 좋은 방 중 하나가 샬롯의 방이었다.
샬롯은 굳이 방을 바꿀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그녀의 앞으로 들어오는 선물이나 물건이 많았기 때문에 그 좁은 다락방에선 더 이상 생활이 되질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방을 창고처럼 쓰다가 못해 결국엔 방을 옮기게 된 거다.
그녀가 제 방 앞에 쌓인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뒤에서 제롬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났다.
“샬롯, 왔구나.”
샬롯이 고개를 돌렸다.
10년이 지나 제롬도, 제법 인자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꽁지로 묶은 백금발만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제롬은 샬롯의 인사를 받을 때마다 어딘가 어색한 얼굴을 해 보이곤 했다. 러슬이나 아이작, 카밀라처럼 반가워하면서도 이렇게 불쑥 다 커 버린 딸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친밀하지 않은 느낌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한 보석함과 큰 봉제 인형을 내밀었다.
샬롯은 눈을 가볍게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저 이런 거 이제 넘치게 많아요. 또 안 주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딸 시집가기 전에 많이 해 줘야지.”
샬롯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제롬의 선물은 아직도 이렇게 항상 초점이 빗나갔다. 이것도 틀림없이 그냥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라서 사 온 것이리라.
하지만 또, 그 마음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웃는 낯으로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다음에는 저랑 같이 쇼핑하러 가세요, 아버지. 맨날 이렇게 사 오시지 마시고.”
샬롯이 중얼거리는 말에, 제롬이 그래도 되겠냐는 듯 반색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뭐라고, 정말이지.’
샬롯은 그런 제롬이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해서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제롬과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시녀들 사이에 앉아 들어온 선물들을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에, 기사단에 가 있던 카밀라가 다시 돌아왔는지 베티가 그녀를 찾으러 왔다.
“아가씨께선 가주님을 뵈어야 하니까, 다들 비키셔요.”
샬롯이 그간 제법 많이 자란 만큼이나, 샬롯의 유모였던 베티도 제법 지위가 높아졌다. 샬롯의 전속 시녀라는 이유로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게 된 베티가 당당하게 모두를 물렸다.
샬롯은 생긋 웃으며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곤 베티를 따라 본관으로 들어섰다.
“베티도, 은근히 이런 상황을 즐긴단 말이야.”
샬롯이 놀려 대는 말에, 베티가 볼을 붉혔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다 샬롯 님을 위해서잖아요.”
“까르르. 부끄럼도 많으면서.”
“어휴…… 하여튼 놀리는 건 좋아하신다니까요.”
둘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주의 방으로 향했다.
* * *
똑똑.
“들어와.”
청명하게 울리는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압도적인 강함이 느껴졌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가주 카밀라의 목소리에 샬롯이 빙긋이 웃자, 베티가 문을 밀어 열어 주었다.
문 안쪽에는 언제나처럼 한 자루의 잘 벼려진 검과 같은 여인이 서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어째서인지 그 세월의 흐름과는 다르게 점점 더 강해만 보이는 카밀라가.
“할머니!”
샬롯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르자, 카밀라의 그 냉철한 얼굴이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손녀 왔구나. 그래, 그 호랑이 굴은 자꾸 기어들어 갈 만한 재미가 있더냐?”
카밀라는 샬롯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그녀도 소파로 다가와서 앉았다.
“할머니도 참,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그 황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자꾸 황궁이 놀이터인 것처럼 가서 노니까 그렇지.”
샬롯은 작게 웃었다.
그건 사실, 다른 연유가 있었다.
원작에서 아렌느는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하지만 아렌느는 요제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 건강 관리를 요즘 지독하게 하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일부러 샬롯이 아렌느의 가까이에 머무는 것도 있었다.
“할머니는 제가 황궁에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샬롯이 소곤거리자 카밀라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단단한 무인의 손이 그대로 느껴졌다.
“좋아할 까닭이 있나. 샤를로테, 네가 우리 가문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결혼이라는 것 하나로 빼앗길 생각을 하면, 속이 뒤집히지 않겠니.”
또, 또 이 이야기다.
샬롯과 요제프의 약혼이 그 뒤로 지지부진하게 다음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샬롯이 모든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있기 때문이긴 했지만…… 어쩌면 카밀라가 이렇듯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탐탁잖다는 듯이 자주 말하는 것도 영향이 있을지도 몰랐다.
“요제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시잖아요.”
“그래, 하지만.”
“저도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보다 다른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다면 가주도 할 거고요.”
카밀라는 갑작스러운 당돌한 이야기에도 놀란 기색은커녕, 샬롯의 포부가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래. 결혼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아. 아무리 도와주는 이가 많아도 그렇지. 그게 쉬운 일이 아닐 거다.”
샬롯도 알고 있었다.
보통은 부부 중 한 사람이 대외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고, 그 배우자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게 대부분이라는 걸. 일단 카밀라부터가 그랬고, 탄티누스 후작도 그랬다.
게다가 요제프가 지금은 황자였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황태자가 되고 언젠가 황제라도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 부인이 다른 직위를 가지고 있다면 둘이 너무 바쁘게 되어 버릴 거다.
하지만, 샬롯은 정말로 요제프와 자신이 결혼한다는 생각을 그리 깊게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보다 온 팬레터 중에는 거의 청혼 수준의 편지들도 있었지만…… 샬롯은 정말로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결혼이니 뭐니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세티야 가 안에서 이렇게 다 같이 지내는 게 너무 행복한데…… 당장 그런 얘기를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샬롯이 투정 부리듯 말하자, 카밀라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내가 너희의 울타리가 되어 줄 수는 없으니까.”
카밀라의 의미심장한 말에, 샬롯이 눈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