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황궁 연회는 고작 이틀 뒤에 시작한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일단 세티야 가에 들렀다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야 한다니. 그냥 요제프의 방에 눌어붙어 있으면 편한걸.
샬롯은 입까지 차오른 불만을 토로하려다가 그만두고 얌전히 마차에 올라탔다.
오라버니들과 점점 친해진 것도 썩 좋은 일이었지만, 최근 들어선 잔소리가 늘었다.
요제프를 만날 때마다 샬롯과 결혼을 할 거면 확실하게 하고, 안 할 거면 순진한 애를 가지고 놀지 말라는 둥 어떻다는 둥……. 샬롯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오라버니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러슬만 그러는 게 아니라 아이작까지도 은근히 그런 기색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휴, 못살아. 정말 참견쟁이들.’
샬롯은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젓다가, 문득 혼자 웃음이 샜다.
정말로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거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신경조차 써 주지 않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간섭하는 게 지겹다는 생각까지 들다니. 모든 게 너무 많이 바뀌었다.
제가 생각해도 배부른 불만이었다.
그녀가 눈을 접어 웃는데, 샬롯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러슬이 그런 샬롯을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짜 가족이 생긴 기분인 건 사실이야.’
특히 러슬과는, 이제 정말 남매같이 지냈다. 서로 옥신각신하며 말다툼을 할 때도 있었고, 가끔 검을 맞대고 전력으로 대련을 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 결국엔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 사이랄까.
그런 게, 좋았다.
가져 본 적 없는 오빠가 생긴 게, 좋았다.
그녀의 주변에 별 이유 없이 남자가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도끼눈을 뜨고 오지랖을 떨어 대는데도, 그저 다 감사하기만 했다.
“샬롯, 그런데 드레스도 드레스지만…… 본가에 들러야 할 다른 이유도 있다.”
샬롯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러슬이 제법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샬롯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샬롯. 가주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을 그 자리에서 할 수는 없으니까, 아까는 그 얘긴 빼고 한 거야.”
“카밀라 할머니가?”
카밀라를 할머니라는 다정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샬롯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샬롯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 하나 갈아입자고 본가로 오라 가라 한다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됐었는데.
무슨 일일까?
카밀라는 샬롯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마치 어른인 것처럼 진지하게 상대를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샬롯이 점점 자람에 따라, 조금씩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지금에서는, 국경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분쟁들이나 황곰 기사단의 재정 이야기 같은 제법 골치 아프고 규모가 큰 일들까지 모두 들려주고 있었다.
제롬보다 오히려 카밀라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랄까.
그렇다 보니 카밀라가 그녀를 어떤 볼일로 찾았을지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설마 벌써 세티야 가의 후계자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닐 테고…… 정말로 연회 드레스 때문일 수도 있어.’
카밀라는 어느 날부턴가, 정말 아낌없이 샬롯에게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샬롯이 부담스러워서 다른 손자들에게 주라고 거절하면, 손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막무가내로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주거나 값진 장신구를 사 주곤 했다. 내로라하는 무구를 안겨 주는 것은 물론이었고.
샬롯이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사이에, 마차는 날듯이 달려 세티야 가로 향했다.
* * *
황궁 내 너른 연회장.
아직 연회의 준비가 시작되지 않은 연회장은, 안에 손님이 가득 들어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넓은 홀 속에 열 명 남짓한 인원이 한 테이블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대화를 나누는 건 의전 장관과 황후였다.
의전 장관이 물으면, 황후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초대 손님의 자리 배치는 이대로면 좋을까요?”
“그래. 탄티누스 후작가의 손님 자리를 특별히 장식해 꾸미는 것을 잊지 말고.”
“연회장을 꾸미는 꽃은, 올해는 뭐로 할까요?”
“초여름을 상징하는 꽃은 역시 장미지. 퀸 로즈 위주로 장식해.”
“이번 연회를 위해 마련한 음식의 목록입니다. 추가할 것이 있을까요?”
“글쎄. 이대로 진행해도 좋을 것 같은데. 당장 이틀 뒤가 연회인데, 인제 와서 어떻게 바꾸겠나.”
두 개의 목소리가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 가며 주고받는데, 전혀 색이 다른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먹지 않고 연출만을 위한 요리인 앙트르메는 유행이 많이 지난 것 같아요. 그리고 황궁에서부터 그런 허영이 섞인 음식을 없애는 게 좋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것보다는 질 좋고 먹기 좋은 다른 메인 요리를 놓는 게 어떻겠어요?”
연회를 주최하고, 연회의 아주 작은 요소까지 총괄하여 황제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 그것이 황후의 할 일 중 하나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황후는 이 모든 것들을 본인의 취향대로 모두 주관하면 그만이었다.
바로 지금, 이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인 아렌느 황비가 제자리를 되찾기 전까지만 해도.
셀렌 황후는 웃는 낯으로 아렌느 황비를 바라보았다. 셀렌 황후의 눈동자 속에는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렌느는 황비 자리로 복귀한 뒤부터 이렇게 사사건건 시비였다. 마치 옛날의, 쫓겨나기 전의 유약했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정말 골칫거리인 건 그런 아렌느 황비를 예전처럼 무시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처음엔 황제 폐하께서 사냥제 때의 일로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제법 얌전하게 지내느라 그랬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렌느의 친정 상단은 원래도 체이커 국에서 어딜 가도 이름을 알아줄 만한 큰 상단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상할 정도로 규모가 커 버렸다. 거의 체이커 국의 상권을 틀어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거대 상단이 되어서, 나라의 돈줄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런 상단을 등에 업은 아렌느는 정말로 무시하기가 어려워진 존재가 된 셈이다.
“손님들이 감탄할 만한 요리가 필요하다면, 저희 상단에서 얼마든지 공수해 오지요. 흔히 보기 힘든 향신료나 설탕에 절인 디저트도 들여올 수 있습니다.”
‘……또 유세 시작이군.’
셀렌 황후는 겉으로 고까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황비께서는 좋으시겠소. 그리 든든한 친정이 있으시니. 10년 전까지만 해도 볼품이 없는 상단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고급 정보를 가지고 상단을 키우신 건지…… 대단하십니다.”
“황후 폐하께서 그리 칭찬을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쩜 말 한마디를 지는 법이 없었다.
셀렌 황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보라색 머리를 한쪽으로 꼬아 내리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연회고 뭐고,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할 의욕이 나질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한때는 좋았었는데.
아렌느 황후가 겁을 먹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 때 말이다. 3황자도 그깟 검술의 재능이 조금 있다 뿐이지, 몸이 허약하디허약해서 제 재능의 반절도 펼치지 못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때는 정말 좋았는데.
겉으로야 썩 부드러운 분위기였지만, 궁정에서 오래 몸담은 의전 장관이 이 미세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의전 장관이 난색을 보이며 조그맣게 물었다.
“그럼 식사 메뉴는 다음에 다시 정할까요?”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이라. 그때 가서 다시 또 허례허식이니 뭐니 하고 말하지 말고, 황비가 좋은 대로 정하는 게 좋겠소.”
“어머, 그래도 괜찮겠사옵니까.”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을, 이럴 때마다 아렌느 황비는 꼭 물러서지 않고 받았다.
“그러도록 하시오. 그대의 상단에서 물자도 조달할 수 있다는 데, 내가 더 뭐라 하겠소.”
“그럼 황후 폐하, 논의는 여기까지 하면 되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이만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물러나겠사옵니다.”
“그래요. 그럼 저도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좋겠습니다.”
의전 장관이 눈치를 보며 펼쳤던 두루마리를 다시 접었고, 아렌느 황비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해 왔다.
“……그래, 다음에 보는 게 좋겠소.”
의전 장관과 아렌느 황비가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곤 나란히 멀어져 갔다. 두 명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면서 뭔가의 담소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제법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멀어지면서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눠 대는 모습이 보였다. 황후와도 저리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는 법 없는 의전 장관인데.
긴 은발 머리, 하늘하늘한 치맛단, 흰 꽃 장식이 어울리는 뒷모습도 짜증 났다.
폐비로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푸석푸석 마른 장미같이 시들어 있던 그녀는, 악바리 같은 얼굴로 다시 황비가 되더니만 온갖 추문이 돌든 말든 고개를 빳빳이 들고 궁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상하게 혈색이 좋아졌다.
도대체 무슨 계기가 있었을까?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