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05)화 (105/123)

105.

샬롯이 천천히 눈을 다시 뜨자, 요제프의 담담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요제프의 까만 조약돌 같은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 시선이 너무 진지해서, 이젠 뭐라고 농담도 못 꺼내겠다.

“왜? 어떤 점이 불편한데? 얘길 해 봐.”

“그런 게 아니라…….”

“불편하긴 불편해? 불편한 게 뭔진 알고?”

투정 부리는 목소리는, 이젠 귀여운 소년의 그것이 아니라 제법 남자답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애교 섞인 투정으로 들리기보다는 반쯤 협박으로 들렸다.

샬롯이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가볍게 툭 밀자, 요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란히 누워 있던 둘 중 한 명이 몸을 일으키자, 샬롯은 침대에 누운 채로 요제프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난데없이 왜인지 모를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있잖아, 로테.”

“응.”

“네가 자꾸 그렇게 이야기를 피하니까 그런데.”

“응. 말해.”

샬롯은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요제프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목에 딱 붙지 않는 옷차림이라, 타블리온과 튜닉의 사이로 요제프의 맨가슴이 들여다보였다.

“로테, 나는…….”

요제프가 뭐라고 하는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샬롯은 잔뜩 신나서 손을 내밀었다.

“요제프. 너, 대흉근 좀 봐. 완전히 잘 발달했다. 이 자세로 보니까, 진짜 와…… 광배근도 좀 만져 보자.”

진지하게 뭔가를 말하려던 요제프의 까만 눈동자에 빛이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요제프는 긴 한숨과 함께 갑자기 탈력감이 온 사람처럼 팔에 힘을 빼고 샬롯의 옆으로 풀썩 드러누웠다.

샬롯은 그 틈을 타서 황자 전하의 몸을 제가 원하는 만큼 주물럭거리고 감탄하고서야 만족한 듯 웃었다.

“와, 진짜 그 먼 여행길을 다녀오면서도 수련한 거야? 몸이 어떻게 날로 좋아지냐. 나는 그런 큰 근육은 정말 붙질 않는데.”

“어.”

“여기도, 와…… 완전, 꽉 잡혔네.”

“그래.”

평소의 요제프라면,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샬롯을 못 이긴다’라느니 앓는 소리로 받아쳐 줄 텐데, 지금의 그는 그럴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 삐져도 단단히 삐졌다.

하지만 요제프는 요즘도 사춘기인지, 이렇게 가끔 기분이 들쭉날쭉 변하곤 했기 때문에 샬롯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때 샬롯의 눈에 베티가 제 머리를 빗겨 주던 빗이 들어왔다. 그리고 베티가 그걸 들고 있었을 때 나누었던 대화도 뇌리를 스쳤다.

샬레스 황녀.

잊고 있던 인물 또한 겨우 떠올랐다.

‘그래, 샬레스 황녀님의 이야기를 해야지.’

샬레스 황녀는, 십 년 전, 샬롯이 흘려 주었던 정보를 토대로 정계의 분란을 완전히 진압하고 그 뒤로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 오고 있었다.

소설 원작 속에 나오는 샬레스 황녀도 제 마음대로 남자를 골라잡아 길들일 만큼 대단하고 강단 있는 여자였지만, 지금의 샬레스 황녀 쪽이 더 탄탄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내가 제공한 정보 때문이겠지.’

이제는 제법 오래 지난 이야기지만, 샬레스 황녀는 샬롯이 제공한 정보 덕분에 세레스의 내정이 혼란에 빠질 위기를 미리 틀어막았다. 황녀의 숙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미리 제지한 덕분에, 황녀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고 현재는 고작 22살임에도 곧 황위를 물려받는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만큼 샬레스 황녀는 샬롯의 정보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우선, 샬롯의 요청대로 세레스 국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요제프 황자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샬롯과 요제프를 국빈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직접 체이커 국에 방문해 친분을 과시해 주기도 했다.

요제프는 애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런지 만날 때마다 세레스 국의 지지 같은 건 필요 없다며 투덜거려대는 데다가…….

‘사랑이 싹트긴커녕, 이상할 정도로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긴 했지만…….’

이젠 다를 거다.

최근 삼 년 동안 샬레스 황녀는 신전 안에 틀어박혀 정식으로 황위 후계자의 수업을 받는 통과의례를 거쳤었다. 그동안에는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에 세레스 국으로 다녀온 요제프와 샬레스 황녀가 만난 것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샬롯도 확신하고 있었던 거다.

이제, 원작의 나이에 가까워진 데다 오랜만의 만남이니까.

요제프와 샬레스 황녀가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서로가 운명의 짝임을 알아보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샬롯은 부드럽게 말문을 텄다.

“샬레스 황녀님은 잘 만났어?”

요제프는 샬레스 황녀라는 이름만 듣고도, 눈살부터 찌푸렸다.

“갑자기 그 여자 얘기는, 왜.”

“아니, 그냥. 어떨까 해서.”

“……어떻긴. 그냥 여느 때와 같았지.”

샬롯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긴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것을 요제프가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여느 때와 같았다니. 별다른 이야기는 없고?”

“별다른 이야기?”

요제프의 새카만 눈동자가 뭔가를 떠올리듯 잠깐 왼쪽 위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천천히 샬롯을 응시했다.

“없었던 것 같은데.”

거짓말이다. 이제 샬롯은 요제프의 얼굴만 봐도,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뭔가 있었네.’

샬롯은 확신하고 요제프를 추궁하듯 매달렸다.

“에이,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 봐. 누님한테 못 할 이야기가 뭐가 있어.”

“없었던 것 같대도.”

“에이, 있잖아.”

요제프는 다른 것에는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간지럼은 제법 잘 타는 편이었다. 샬롯은 요제프의 옆구리를 살살 간지럽히다가, 양손으로 상체를 살살 간지럽혀댔다.

“……항복, 항복. 항복이라고 했다. 항복.”

요제프가 다급하고 빠른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하고서야 샬롯은 손을 거두었다.

“거봐. 뭔가 있지?”

그가 불만에 찬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며 실토했다.

“……딱히 뭐가 있는 것도 아니야. 언제나처럼 네 소식을 궁금해하던데. 이번엔 왜 같이 안 왔느냐부터 시작해서, 요즘엔 뭘 수련하냐, 요즘엔 어떻게 지내냐, 요즘엔 뭘 어쩌고저쩌고. 귀가 따가워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 자세히는 기억도 안 나.”

샬롯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제프를 간지럽혀가면서까지 들어낸 이야기는, 제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다.

“……내 얘기? 그게 다야?”

“그래. 그게 다야. 업무적인 이야기도 해 줘? 그거라면 더 있지. 문화 교류를 하면서, 친교를 다지기 위해 세공사를 서로 파견하여…….”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걸 듣고 싶은 게.

하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덤덤하기만 했다. 눈빛의 흔들림도 없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이번엔 정말 그게 전부인 모양이었다.

왜지?

샬롯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마음의 준비라면 십 년째 하고 있었다.

이 운명적인 소설의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언젠가 빠져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

하지만 준비만 백날 하고,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걸까? 요제프와 내가 칼그림자의 날에서 우승한 것도 올해로 세 번짼데. 우승하는 장면을 보고 반해야 하는 거라면, 진즉에 반해야 했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이었다.

똑똑똑.

“러슬 세티야 님께서 드십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샬롯은 생각에 잠긴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오라버니? 들라 하세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러슬이 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짧게 잘라 올린 백금발의 머리, 성인이 된 뒤로 더욱더 커진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남자다운 외모.

이제 스물다섯이 된 러슬은 듬직하기 짝이 없게 자랐다.

샬롯이 반가운 얼굴로 러슬을 바라보는데, 러슬이 방 안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표정을 굳히고 큰 보폭으로 샬롯에게 척척 다가왔다.

“요제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샬롯을 좀 데려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키지 않아 하는 요제프의 표정을 본 샬롯이 먼저 끼어들었다.

“그래, 요제프. 아렌느 님도 뵙고 오고, 난 조금 이따가 다시 올게.”

일단, 제일 궁금했던 이야기는 들었기도 하고. 요제프도 피곤할 테니 살짝 자리를 피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요제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러슬은 말 안 듣는 철부지 동생을 대하듯 샬롯을 번쩍 안아 들었다.

“샬롯, 가자.”

러슬은 샬롯을 한쪽 팔로 안아 들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샬롯은 발버둥을 칠까 하다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축 늘어뜨렸다.

“황성엔 무슨 일이야?”

“황자님께서 돌아오셨으니, 곧 연회가 시작될 거다. 너도 참여해야지.”

“이대로 참여하면 되는데?”

“가주님께서 새 드레스를 맞춰 주셨어. 아직 사나흘은 시간이 있으니, 본가에 들렀다가 다시 와.”

“……알았어.”

샬롯이 귀찮다는 듯 수긍하는 말에 러슬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맨날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하면 진지한 약혼 사이가 아니라 친구 사이니 뭐니 하더니. 이런 친구 사이가 어디 있어? 넌, 그런 꼴을 하고 누워 있을 거면, 나한테 들어오지 말라고 하던가.”

러슬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쏘아붙였다.

샬롯은 그제야 둘이 나란히 누워 요제프를 간지럽히던 모습이 러슬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샬롯은 그걸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친구 사이가 왜 없어?”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지만, 러슬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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