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리카르도는 알고 있었다. 황후가 얼마나 완벽을 추구하는지. 공식적인 행사에서 완벽한 복장과 완벽한 모습으로 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오늘 새벽에도, 틀림없이 남들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 향기 나는 꽃물로 온몸을 씻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들여 치장하셨을 터였다. 향기 하나, 손톱 하나, 머리카락 매무새 하나하나에 모두 정성이 들어갔다.
그 모든 것이 다른 귀족들의 앞에서, 그리고 아바마마의 앞에서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서임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돋보이고 싶기 때문인 것을.
그런데, 그런 어마마마가 남들이 다 보는 곳에서 저렇게 기사단의 천막으로 가다니.
물론 누군가가 억지로 끌고 간 것도 아니었고, 아바마마도 그냥 함께 조사를 구경하러 가자는 식으로 권한 것 같았지만…….
‘……아바마마께서도 이제 나와 어마마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진 않으시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은 지독히 충격적이었다.
리카르도는 발밑이 다 꺼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가정이었다. 자신은 황태자가,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요제프 따위에게 대회에서 패배하고, 그 비열한 자식이 황태자 후보로 지목당하면서 그 철벽과도 같은 믿음에도 조금씩 금이 갔지만, 그래도 너무 당연한 것이라 잃어버릴 것을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의 시선이 샤를로테에게 가 닿았다.
아바마마의 지지니, 다른 귀족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예전만 한 맹목적인 충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니 뭐니 하는 모든 것이, 오늘 이후에 다 정리가 돼야 했었다.
그런데 남은 거라곤, 엉망진창인 분위기와 샤를로테의 안부를 걱정하고 그녀의 무사 귀환을 반기는 환호들뿐이었다.
‘어마마마의 말이 맞았어.’
황후는 칼그림자의 날, 분명 자신에게 경고하듯 말했었다.
샤를로테의 환심을 사 두라고. 가까이 두라고.
그 말대로만 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터였다.
오늘 일이 다 이 지경으로 틀어진 건, 다 저 계집아이 하나 때문이었다.
어마마마는 계획한 일을 이런 식으로 망치는 법이 없었다.
저 계집만 요제프의 곁에 붙어 있지 않았다면 다 좋았다.
처음부터.
게다가 사냥견의 목걸이를 빼앗긴 것도 치명적이었다. 요제프와 샤를로테 두 명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냥감을 쓸어 가고 보물을 찾아내었는지, 리카르도는 반나절 내내 말을 몰아도 딱히 이렇다 할 그럴듯한 사냥감을 별로 마주쳐 보지도 못했다.
어마마마께서 말했던 대로 성과를 입증하기는커녕, 정말 처참한 결과였다.
그나마 그를 지지하는 중소 귀족들이 직접 갖다 바친 몇 안 되는 토끼니 꿩이니 하는 사냥감들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을 뻔했다.
돌아오는 길에, 기사단들과 함께 사냥터를 누비고 있던 아바마마와 마주쳤을 때, 텅 빈 망을 보시는 그 눈빛을 보았다. 그때의 민망함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의 처음. 저 계집아이와 요제프가 함께 수련한다느니 뭐 어쩐다느니 할 때 철저하게 짓밟아 놓았어야 했어. 게다가 샤를로테가 말도 안 되는 내기를 빌미로 내 목걸이를 빼앗아 간 것도, 절대 들어줘선 안 됐는데.’
리카르도는 편리하게 제게 유리한 것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었다. 샤를로테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먼저 꺼낸 것도 저였으며, 목걸이 따위 필요 없다며 시원스럽게 줘 버린 것도 저였다는 것은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목걸이가 가진 능력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샤를로테는 어떻게 알고 그걸 노린 거지?’
문득 의문을 떠올리던 그는 이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분노에 잠식돼 그런 생각은 곧 잊어버렸다.
그는 이를 드글드글 갈며 분홍색 머리의 귀여운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샤를로테를, 그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샤를로테가 잘되면 잘될수록, 빛나는 것은 리카르도의 이름이 되도록.
* * *
“오늘 대회의 승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샤를로테 세티야 님이십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와아아아아-.
작은 거인 만세-!
샤를로테 님 만세-!
세티야 가 만세-!
샬롯은 단상에 올라 쏟아지는 환호를 들으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모여 제가 단상에서 어서 내려와 자신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서 있었다. 카밀라 가주와 아이작, 란슬롯, 러슬, 비야키, 벤을 비롯한 세티야 가 가족들과 식솔들, 그리고 아렌느의 손을 쥐고 있는 요제프.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냥제의 우승을 기념해 주어진 제법 거대한 트로피를 꽉 움켜쥐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감상이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었다.
아마 샬레스 황녀도 지금쯤이면 자신이 흘려 둔 정보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을 거다. 황실의 큰 변곡점을 하나 없애 준 건데, 그 대가로 제법 물심양면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듯했다.
그것 외에도 샬롯은 제가 아는 정보들을 모두 사용할 생각이었다.
오늘 벌어진 갑작스러운 사건은 그녀가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기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요제프가 제게 말했던 대로, 가주 자리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아니라도.
만약 그런 목적을 갖고 임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세티야 가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세티야 가는 요제프에게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테고, 그리고 자신도 세티야 가에 제법 괜찮은 정보들을 제공할 수 있었다.
지난번 황곰 기사단의 수련장의 모습을 보았을 때, 화산파의 수련법을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얼핏 했었다. 그리고 벤처럼 뛰어난 의학적 실력과 지식을 가진 의원도 그 자신의 몸의 기의 흐름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제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만 전파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생각을 하던 샬롯은 순간적인 깨달음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관중들이 그녀를 향해 붉은 깃발을 흔들어 댔고, 붉은 꽃잎을 던져 오늘의 우승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하늘하늘 흩날리며 떨어지는 붉은 꽃잎은, 마치 매화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면서도, 샬롯은 화산파의 모습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조금도.
‘이제 여기가, 내 고향이야. 난 이제, 이곳과 모두와 함께하는 시간이 정말 좋아.’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발을 움직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이제 무슨 수를 써서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낼 거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 * *
10년 후의, 초여름.
아렌느 황비와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황자가 함께 기거하는 유리 별궁의 경치가 좋은 황자의 방.
유독 하늘이 청명하고, 여름벌레가 소리 높여 우는 날이었다.
열아홉 살의 샬롯은 요제프의 방 침대에 드러누워, 몇 가지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베티가 급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섰다. 세티야 가에서 출발해 지금 막 도착한 베티의 팔에는 온갖 치장 물품이 가득 안겨 있었다.
무복 차림에 엉망으로 하나로 묶은 머리를 한 샬롯을 보며, 베티는 대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머, 아가씨. 이게 도대체 무슨 모습이세요! 제가 이럴 줄 알고 서둘러서 왔어요. 정말이지 아직도 어린애시라니까.”
“왔어?”
샬롯은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나 양팔을 내밀어 베티를 안았다.
샬롯이 아홉 살일 무렵에는 베티를 안아도 허벅지에 매달린 것 같은 모습이 되었을 뿐이었지만, 이젠 키가 거의 같았다.
베티는 제 아가씨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엄한 얼굴로 샬롯을 질질 끌고 가 거울 앞에 앉혔다. 그러곤 그저 편함만을 위해서 정수리로 묶어 올리고 있던 고운 머리카락을 다시 풀어 내렸다.
“어서 단장하셔요. 요제프 황자 전하께서 오늘 돌아오시는 거 몰라요?”
샬롯이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릴 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샬롯은 지금도 자주 그런 자세를 했다.
“알아. 세레스 국에 가서 문화 교류니 뭐니를 한다던가? 그럴듯한 협상자 역할을 맡았던데.”
아무렇지도 않은 뻔뻔한 대답에 베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걸 아시면서, 이렇게 늘어져 계시면 어떻게 해요? 요제프 황자 전하께서 힘든 일을 해내고 정혼자인 아가씨를 곧 보러 오실 텐데, 예쁘게 단장하고 계셔야죠?”
샬롯은 볼을 부풀렸다가 바람을 빼며 베티를 따라 한숨을 쉬었다.
“또, 또. 내가 그 소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 예쁘게 단장은 무슨.”
“또, 또! 또 그렇게 말씀하시다뇨.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기본만 해요. 제발, 네?”
베티는 사정사정을 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샬롯은 세티야 가에서 지내는 날만큼이나 자주 요제프 황자의 방에서 지내고 놀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도 샬롯은 이상하리만큼 제 약혼자를 대하는 숙녀의 태도 같은 건 전혀 모른다는 듯이, 아니면 오히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듯이 굴었다.
바로 지금처럼.
지금도 샬롯은 베티의 말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았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뭐.”
베티는 기가 막혀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호박이니 수박이니 하는 비유를 배워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아홉 살이 된 샤를로테는 그런 덩굴식물 따위에 비견되어서는 안 될 만큼 아름다웠다.
샬롯의 매끄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은 세티야 가의 재능을 전수하였다는 상징,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아니었지만, 지독히 곱고 아름다웠다.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머리카락 색 따위로 시비를 걸지 못할 만큼.
그리고 매일같이 수련해서 그런지 늘씬하게 팔다리가 길었고,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고 윤기가 흘렀으며, 시원시원하고 커다란 연두색 눈동자는 종종 빛을 투영하여 마치 투명한 유리구슬같이 빛났다.
샬롯은 길을 가면 누구나 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미인으로 자랐다.
본인이 그 외모를 자꾸 낭비해 대서 그렇지.
베티는 샬롯이 입고 있는 무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니까 두 분이 그 어린 시절에 약혼한 이후로 요제프 황자 전하께서 아직 본식인 결혼식을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베티는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분의 로맨틱한 데이트 날을 만들어 드려야겠다 다짐했다. 베티가 시종을 시켜 드레스를 가져오도록 하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 샬롯이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베티.”
“네?”
“이번에 요제프가 가서, 샬레스 황녀 전하와 약혼하고 올지도 몰라. 아니, 아마도 그럴걸? 그 소식 듣고서 너무 충격받지 말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야.”
샬롯의 덤덤한 목소리에 베티의 손에서 빗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