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02)화 (102/123)

#102.

사냥제가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기사단이 삼엄하게 군중들을 통제하며 한 명, 한 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소지품을 검사하는 상황이었지만 군중들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모두 샤를로테 님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더 빨리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열성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였다.

대회장 입구로 돌아오던 산체스 황제는 눈을 가늘게 감았다 뜨며 대회장의 뜨거운 공기를 즐기듯 살폈다.

거대한 뱀 마수의 등장으로 대회장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활동 상태인 마수들은 절멸 상태이며, 그나마 지금 볼 수 있는 마수들은 마탑의 통제를 받는 복원 개체들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주 가끔, 지하에서 생활하는 마수들이나 아주 긴 수면기를 갖는 마수들의 경우에는 야생에서 발견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건 드물디드물었다. 갑자기 대륙에 있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만큼 인간들과 간섭이 없이 자신만의 생태계를 형성해서 살아왔던 마수라면, 굳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니까.

뭔가 강력한 원인이 있다면 또 모를까.

산체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실 기사단과 황곰 기사단의 합동 수사의 결과에 따르면,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유혹의 향이 사용되었습니다.’

‘유혹의 향이?’

‘네. 동물, 마수에 주로 효과가 좋은 것으로 지나친 흥분을 일으켜 다량의 사고를 유발했던 물질입니다. 재료들이 모두 고가인 데다 제조법도 거의 다 폐기된 물질이라 어떻게 이런 것이 나타났는지는 저희가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기사단장이 제게 보고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범인은 사실, 그 누구로 특정될지 모르겠으나 그 배후에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황제도 그걸 알고 있었다.

‘황후. 혹은 황후와 리카르도의 지지자.’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황후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후의 표정에는 항상 서려 있던 그 대단히 우아하고 고상한 미소가 지워져 있었다.

다시 한번, 황제의 잿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제 와서 더 명확해진 사실이지만, 지금껏 황후가 후계자 다툼에서 유달리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던 건 별다른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도가 황태자가 되리라는 건, 너무 뻔하디뻔하게 정해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1황자가 아니라 2황자가 강력한 후보라는 건 또 어떻게 생각하면 나이와 서열과 관계없이, 능력으로만 황태자가 될 수 있다는 강한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마당에 요제프가 칼그림자의 날 우승이라는 성과를 입증한 게 눈에 거슬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대놓고 일을 벌이는 건, 이 일을 그대로 묻고 넘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지. 다른 곳도 아니라, 내가 주관한 사냥제에서.’

이윽고 사냥터의 입구에 도착한 황제는, 제가 탄 흑마를 시종에게 맡기고 시중을 받아 내리며 눈 사이를 날카롭게 좁혔다.

솔직히 불유쾌한 일이었다.

황후의 세력이, 그리고 리카르도의 지지 세력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다.

이 나라의 세력을 양분하는 두 개의 귀족 가문에서 지지를 받아 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체이커 국에서 무를 숭상하며, 어지간한 후계자 다툼은 용인해 주는 것 또한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제가 이렇게 두 눈을 뜨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제가 후계자 후보라 이미 천명한 요제프를 이런 식으로 죽이려 들었겠다?

만약 샤를로테라는 그 아이가 우연히 요제프의 망토를 빌려 쓰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래서 정말로 황후의 모든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렇다면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는 깔끔한 일이 되었겠지.

‘황후께서는, 나를 어지간한 허수아비로 보신 게로군.’

황제는 샤를로테 세티야라는 귀여운 여자아이는 볼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뛰어난 활약상을 보인다고 생각하며 황후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때, 나무에 가려져 있던 시야 사이로 황후의 곁에 서 있는 다른 여자가 보였다.

긴 은발의, 수수한 원피스 차림의 여인.

황제의 눈은 그 여인의 반 묶음 한 머리에 꽂힌 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눈에 지독히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애틋한 그리움, 당혹스러움, 미안함.

‘솔직히 이런 일이 벌어진 자리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아렌느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제 권고를 받아들여 주리라곤, 그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또한 비록 수포가 되었다곤 하더라도, 정말로 요제프에 대한 살해 위협이 있었던 현장에 아렌느가 있는 게 너무 민망하고 미안했다.

아렌느는 아이를 한 번 잃고 나서, 지독할 정도로 제가 만든 테두리 안에 틀어박혔다. 다시는 거기서 나오지 않으려 했고, 그 의사가 너무 확고해서 결국엔 황제 스스로가 인정해야 했다. 애초에 그녀를 비로 들였을 때부터, 그녀의 불행이 시작되었음을.

그래서, 더 이상의 위협에 대해서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렌느가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때, 저 멀리 나무 틈새 사이로, 아렌느가 작게 웃는 것이 보였다.

산체스 황제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미소는, 처음 만났던 시녀 아렌느의 모습 같았다.

다시는 그녀의 미소를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특히 이런 자리에서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아렌느가 여기서. 샤를로테를 향한 살해 위협이 있었던 자리에서 웃고 있는 거지? 요제프를 향한 위협이었단 걸 그녀라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의아함을 품은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아렌느의 바로 곁에 서 있는 두 명의 아이에게로 가 닿았다.

그중 한 명은 요제프였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샤를로테였다. 샤를로테는 마주 보면 함께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밝게 웃으며 뭔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참 이상하지.

다시 한번 샤를로테에게 시선이 갔다.

아까 기사단이 증언을 받는 현장에 황제도 함께 있었지만, 저 아이는 시종일관 밝은 태도였다. 무척이나 놀라고 무서웠을 텐데도.

여기서 제일 두려워하고 웃지 못해야 할 사람 두 명이 함께 웃고 있는 풍경은, 묘하게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그 웃음의 원인은 샤를로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해.’

황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 분홍색 머리의 꼬맹이, 샤를로테가 가는 곳마다 묘한 일들이 벌어졌다.

절대로 제힘으로 모든 것을 떨치고 올라올 수 없을 듯 나약해 보이던 요제프가 불현듯 칼그림자의 날 우승자로 나타나질 않나, 절대 이런 곳에 참석할 리 없는 아렌느가 지금 제 눈앞에서 태연하게 웃고 있질 않나, 카밀라 가주가 황후파가 벌인 일을 조사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질 않나…….

황제는 오늘 온종일 들었던 샤를로테를 향한 군중들의 함성을 새삼스레 다시 떠올렸다.

황제가 된 뒤 절절하게 느끼게 된 것이었지만, 군중들을 힘과 권력으로 굴복시키기는 쉬워도 그들의 지지와 인기를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조그마한 소녀가 그 함성과 열기의 주인공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거, 카밀라가 그렇게 싸고돌 정도면 세티야 가의 후계자 구도에도 이미 균열이 생겼을지도 모르겠군.’

황제는 언제 한번 카밀라 가주와 함께 머리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독주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번에야말로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후가 직접 개입되지 않은 황후파의 범죄로 결론이 난다면 모르나, 황후가 직접 개입한 일이라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머릿속에, 첫째 아이를 잃어버린 아렌느가 펑펑 울며 매달리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만 해도 황위에 오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산체스 황제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해 냈던 탄티누스 후작가 출신의 황후에게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니면? 정황상의 의심 말고, 아무것도 증거가 없는데. 의심했다가 아니면?

신관이 진찰을 다녀갈 때마다 쇠약해졌기에, 아렌느가 다른 신관과 의원도 청했지만 아이는 이상하리만큼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리고 물론 힘도 없었거니와, 아무리 그래도 설마 후계자 때문에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연약하디연약한 아기에게 손을 쓰겠냐는 안일함도 있었다. 그땐, 어쩌면 아렌느가 너무 큰 슬픔에 잠겨 잘못된 의심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다.

산체스 황제의 눈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황제 폐하, 이제 참가자들이 모두 집결하였습니다. 대회를 끝낼까요?”

그때, 사회자가 다가와 그에게 은밀하게 여쭈었다.

황제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폐하. 명을 받듭니다. 그러면 워낙 범죄자 색출로 어수선하니 그냥 폐회식은 생략하고, 이대로……”

황제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렇게까지 기대가 뜨거운데. 제대로 우승자의 탄생을 알려. 샤를로테 세티야의 우승이다.”

사회자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얼른 몸을 굽혀 예를 차리곤 몸을 돌렸다.

* * *

리카르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우아한 걸음으로 귀족과 관중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 황실 기사단이 갑작스러운 샤를로테의 습격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세워 둔 임시 천막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아렌느가 나타난 뒤부터 줄곧 표정이 좋지 않던 어마마마는, 아바마마께서 함께하길 청하신 뒤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요하게 일어나 동행했다.

어마마마의 그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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