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00)화 (100/123)

#100.

까득.

그녀는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게다가, 습격 소식이 이렇게 손쉽게 일파만파로 전해진다는 것도 이상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소문을 낸 거다.

‘도대체 누가?’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샤를로테가 습격을 당했다 치자. 그런데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남들이 다 있는 데서 습격한 것도 아닐 텐데.

게다가 귀족들이 떠들어 대는 말은 ‘시체를 발견했다’라는 내용이 아니라, 습격당했다는 게 전부였다.

이건, 뭔가가 단단히 틀어진 거다.

까득.

그녀가 다시 한번 손톱을 깨무는 순간,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셀렌 황후의 눈에, 제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아야 마땅한 멍청한 은발 머리의 여자가 들어왔다.

“……아렌느……?”

늘씬한 키에 장식이라곤 긴 은발을 반 묶음 하여 거기에 꽂은 흰 생화 장식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안색과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눈빛은 형형했다.

그 어떤 화려한 치장을 한 것보다도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여자였다.

그제야, 황후는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져 있던 것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민 적 없는 여인에게, 모두의 시선이 가 닿아 있다는 것도.

샬롯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아렌느는 절대로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요제프를,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몰랐다는 그 충격적인 사실이 자꾸 머리에서 맴돌아서 도저히 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요제프가 말한 대로 그녀도 알았다. 스스로가 유약하다는 걸.

하지만 제 자식이 출전하는 대회마다 직접 보지도 않고서, 샬롯의 그 당돌한 눈빛을 다시 마주하면 그때는 정말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초대까지 받고 나서는.

아렌느는 대회장 입구에 도착하고서도, 한참 동안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거기 앉아 있었다.

꽤 먼 곳에 마차를 대 놓았지만, 사회자의 목소리는 제법 또렷하게 들려왔다. 요제프와 샬롯의 이름을 직접 듣자, 요제프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랐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이 되었다.

그녀는 그러고서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지 않았다면. 불안한 목소리들에 이끌리듯 마차에서 내려 사냥터 입구로 다가가는 순간, 습격이니 뭐니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면.

하지만 습격당한 건 요제프가 아니라 샤를로테였다.

그 순간 아렌느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습관적인 안도를 느꼈고, 곧이어 속이 뒤집힐 정도로 그게 창피했다.

그리고 아렌느는 들었던 거다.

‘처음부터 요제프 황자 전하의 망토를 입고 계시던데. 설마 그래서 샤를로테 님께서…….’

‘어허, 말조심해.’

‘하지만 다들 그렇게 말한다고요.’

‘조심하래도!’

작게 속삭이는 군중들의 목소리를.

귀족이 아닌 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대답은 너무 뻔했다.

분명히 황후가 저지른 일이었다.

샤를로테, 그 아이는 그저 그 자리만 모면하면 그만임에도 제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진실을 알려 주었다.

‘요제프에게 그렇게까지 해 준 그 아이를, 이렇게 아무것도 해 준 것 없이 잃을 순 없어.’

아렌느는 손이 저리도록 두려웠다. 제 말 한마디가 요제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황후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선 거다.

“아렌느 폐비.”

셀렌 황후는 지금까진 퍽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 여자를 보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절로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서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단 한 번도 그녀는 누군가에게 질투심 따위를 느껴 본 적도 없었고, 느낄 필요도 없이 살아왔는데 이 못난 시녀 출신의 여자 하나가 저를 그렇게 만든 게 너무 싫었다.

볼 때마다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치가 떨렸다.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타난 거지?”

아렌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낯으로도, 잘도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깊이 몸을 숙여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후,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샤를로테 세티야…… 그 아이까지 건드리진 말아 주십시오.”

셀렌 황후는 아렌느를 쏘아보았다. 말의 내용도 기가 찼다.

아렌느가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릴 만큼 크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문불출하던 폐비와 황후의 대화이기에 너무 많은 이목을 사는 자리였다.

감히 그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왜 내게 하지?”

“이 말을 하는 용기를 내는 데, 12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지금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폐비 주제에 내게 말을 걸 자격이나, 여기에 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황후가 막 당장 아렌느를 끌어내라고 고함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사냥터의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던 평민들이 일제히 각자 깃발을 흔들어 대며 뭔가를 외치고 손뼉을 쳐 댔다.

만세!

역시 아무런 일 없이 돌아오실 줄 알았어!

작은 거인 만세!

게다가 귀족들도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며 웅성거려 댔다.

“저게 뭐야……?”

“사냥제에…… 저런 걸 사냥해 오신 거야?”

“칼그림자의 날처럼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이벤트인가 본데? 햐…… 다른 분들은 다 평범한 동물만 사냥해 오셨질 않아?”

“오늘의 1등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네…….”

워낙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서로의 말소리까지 안 들릴 지경이 되자 황후와 아렌느도 다른 귀족들이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후는 남들이 다 보이는 게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해야 했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사냥터의 입구 쪽에서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거대한 검은 말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분홍색 머리의 작은 기수는 위풍당당하게 황실의 망토를 걸친 채 그 뒤의 백마를 타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황자도 함께였다.

정작 나이트메어의 등 위에는 사냥감이 올라가 있었다.

큰 뱀이었다.

아주 미끈하고 기다란 몸체 위에, 멀리서 보아도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비늘들이 아름다운 문양과 오색 창연한 색을 뽐내며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아름답다고만 보기에는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거대한 괴수를 짊어지고 들어오는 날개 달린 흑마의 모습은, 가히 신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며 백마를 타고 들어오는 소녀와 소년의 모습도.

하지만 군중들의 환호에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 대회의 승리 때처럼 놀람이 섞인 환호가 아니라, 이젠 이 광경에 익숙하다는 듯한 환호였다. 마치 이미 기대하고 있던 것을 보았다는 듯한.

너무나도 신화적인, 그리고 너무나도 귀여운 두 영웅의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싶다는 환호였다.

두 아이의 모습은 작은 거인들을 배출한 체이커 국에 대한 자부심마저 불러일으킬 만큼 어딘가 웅장한 구석이 있었다.

* * *

작은 거인들이 오셨다!

무사히 돌아오셨다!

만세! 만세!

사냥제에 온 군중들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을 보게 된 것에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손뼉을 쳤다.

샬롯은 그들에게 화답하듯 손을 흔들어 주며, 눈으로는 황후를 찾아냈다.

황후는 지금까지 본 중 가장 불유쾌한 표정으로 그녀와 요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는 건 꽤나 유쾌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굴기에 지금도 별반 표정이 바뀌지 않을 줄 알았는데.’

황후가 직접 모든 것을 설계하지는 않았겠지만, 황곰 기사단이 밝혀내 준 사건의 실체는 꽤 지독하고 정교했다.

숲의 사방에 숨기는 보물 사이에, 적당히 값진 물건 하나에다 유혹의 향을 도포하고 묻어 두었다. 그 유혹의 향은 동물에겐 강하게 작용하는 향이라고.

정말로 누군가 찾으라고 둔 게 아니라서, 바위 아래에 던져 놓아둔 거다. 꺼낼 수 없도록.

그 향에 취해 돌진하다가 죽으라고.

아마, 나중에 수거할 예정이었겠지. 증거 인멸을 위해서.

그리고 그 향은 아주 독특해서, 이미 그 향으로 훈련이 된 개체들에만 강하게 작용하는 향이라고 했다. 마치, 캣닢을 처음 본 새끼고양이는 그것이 좋은지도 모르듯이. 그래서 아슬란의 코에도 미리 향을 발라 두어서, 그 향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한 거다.

아마 거기까지가 요제프를 습격한 이들의 계획이었을 거다.

혹시라도 그렇게까지 했는데, 요제프가 살아남는다면 어쩔 수 없이 직접 처리할 셈으로 자객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거고.

‘자칫 요제프가 당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심장이 뛸 만큼 큰 사건이었다. 저도 모르게 결의에 찰 만큼.

뭐…… 게다가 그 냄새를 맡고 지하에 묻혀 살던 마수가 꼬이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겠지.

샬롯이 그것을 잡아서 돌아오는 일도.

“……어머니.”

샬롯은 제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멍한 음성을 듣고서야, 황후의 곁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황후 옆에서 오늘 가장 기대했던 사람이 여기에 왔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아렌느 님, 오셨네요!”

샬롯이 얼른 웃으며,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소문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폐비의 등장에, 그 누구도 인사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고 멸시하는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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