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9)화 (99/123)

#99.

카밀라로부터 체벌을 받은 건, 정말로 손에 꼽아도 될 정도로 없는 일이었다.

아이작이 당장 카밀라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고개를 홱 돌리는데, 그녀가 덤덤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밀라의 주홍색 눈에는, 언제건 당당하게 적을 베어 넘기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바라보는 그 눈에는, 항상 명징한 빛만이 스며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가주 카밀라의 눈에는, 묘한 슬픔 같은 어두운 빛이 서려 있었다.

아이작은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왜 저런 눈을 하는 거지? 마치. 상처받은 사람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를 식혀, 아이작.”

카밀라가 서리 같은 목소리로 충고하며 그 자리를 떠 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머리가 식기는커녕, 생각할수록 제 말이 맞았다.

아이작은 속을 삭이며 말을 몰아 러슬, 비야키, 란슬롯이 먼저 도착해 있는 숲속 공터에 도착했다.

온 사냥터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사냥제는 여기서 중단됩니다. 모든 참가자분들은 다시 입구로 돌아가 주십시오.”

“사냥제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안전을 위해 모든 참가자분들은 혼자 계시지 마시고…….”

“모든 참가자분들은 데려온 시종을 포함하여 참가자 등록을 한 인원수와 이름, 얼굴이 확인되어야 귀가할 수 있으니 함부로 귀가하지 마시고…….”

여기저기에서 시종들이 뛰어다니며 귀족들에게 공지 사항을 알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흉흉한 기세의 기사단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샬롯은?”

아이작의 물음에, 비야키가 손을 들어 공터 한쪽을 가리켰다.

분홍색 머리의 꼬마가 황곰 기사단의 옷을 입은 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작은 성큼성큼 걸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샬롯에게 붙어 있던 황곰 기사단 셋은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부단장님!”

“부단장님, 오셨습니까.”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기사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는 사이로, 샬롯이 고개를 한껏 꺾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작은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샬롯을 안아 올렸다.

그러면서 얼핏 이리저리 살펴본 것으로는, 드러난 팔이나 다리에 상처도 없었고 표정도 이상하리만큼 기분 좋아 보였다.

충격을 받은 피해자라기보다는, 이상할 정도로 호전적이고 신나 보이는 표정이…… 무슨 나들이를 앞둔 소녀 같다는 게 이상한 점이긴 했지만.

“괜찮아, 샬롯?”

샬롯은 연두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을 길게 접어 웃었다.

“안 괜찮았다간, 큰일 나겠어요.”

“음?”

“아니,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도대체 몇 명짼지 모르겠어요. 그냥 척 봐도 너무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뭐, 어디 누구한테 당하겠어요?”

아이작은 그제야 러슬, 비야키, 란슬롯이 이미 샬롯과 이야기를 다 나눈 뒤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카밀라와도.

호기롭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지금 말하는 게 진심이라는 건 너무나 잘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작은 제가 들었던 비명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기가 잘 관리되는 구역이라고 해도 혼자 다니면 안 돼.”

“알아요. 그냥 잠깐…… 잠깐, 혼자 있었던 건데 그렇게 됐네요.”

“오늘은 요제프 황자 전하와 함께 다니기에 뒀던 건데, 다음부턴 나와 같이 다니자.”

샬롯은 아이작이 잔소리해 대는 게 싫을 법한데도, 그냥 다 좋기만 한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이작은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 아이를 많이 걱정했구나.’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바짝 긴장해서 굳어 있던 어깨가 내려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샬롯은 아이작에게 이젠 제법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샬롯이 선보이는 검술, 그 실력 자체가 아이작에게는 혼자 갇혀 있던 답답한 우물에서 그를 꺼내 준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젠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샬롯 자체에게 너무 많이 녹아들어 있었다.

샬롯은 고작 아홉 살이었고, 이번 일로 많이 놀랐을 거였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제 망토라도 둘러 주려다가, 이미 제 품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샬롯의 몸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망토로 휘감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웃음을 흘렸다.

“아, 웃었다.”

“음?”

“아이작 오라버니가 오늘 내내 안 웃는다고, 다음 사냥제 때는 같이 다니자고 오라버니들께서 그랬는걸요.”

아이작은 제 입매를 슬쩍 만져 보았다.

딱히 의식하고 웃는 건 아닌데, 샬롯의 곁에 있을 때 웃을 일이 많은 건 확실했다.

그는 샬롯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의식적으로 한 번 더 씩 웃어 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돌아가자. 본부로.”

샬롯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바람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이작의 볼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왜?”

그녀는 깊은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아이작에게만 이 말을 한다는 듯이 소리를 잔뜩 죽여 불평을 쏟아 냈다.

“전 못 가요.”

“못 간다고?”

“황실 기사단도 그렇고, 황곰 기사단도 그렇고……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아낼 생각인가 봐요. 수장으로 보이는 한 명이 아직 도망 중이라면서, 인상착의든 검술이든 뭐든 기억해 내라고 아주 닦달인데…… 어휴, 제가 직접 잡고 말지. 전 이런 서류 작업은 진짜 딱 질색이거든요. 오라버니도 천생 무인이시니 제 마음 알죠?”

아이작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정말 샬롯의 걱정에 눈이 멀어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기사단이 많다고만 생각했는데, 거기엔 황곰 기사단이 더 많았다. 정말 당장 범인을 잡아들이지 못하면 밤까지 수색할 기세인지, 2인 1조로 움직이는 기사들의 품에는 횃불용 나무 막대까지 들려 있었다.

‘……말도 안 돼.’

아이작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섰다.

카밀라 가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리카르도 황자에 대한 단호한 지지를 철회한 적이 없었다.

‘……황후가 요제프 황자를 잡기 위해 사람을 쓴 거라면, 황후가 직접 개입했든 안 했든 그쪽에서 주관한 일이라는 게 너무나 명백한 건데…… 그걸 지금 이렇게 범인을 잡겠다고 사냥터를 뒤집어 놓았단 말인가.’

아이작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수치심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이건 뭐, 카밀라 가주에게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카밀라 가주를 섣부르게 잘못 판단한 건지, 여기 이 꼬맹이가 그럴 만큼 대단한 존재인 것인지…….’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 오해를 쉽게 탓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었다.

그럴 만큼, 세티야 가문과 탄티누스 후작가의 사이는 공고했으니까. 그리고 탄티누스 후작가는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혹, 탄티누스 후작가의 가주와 카밀라 가주 사이에 뭔가의 이야기라도 오간 걸까?’

그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혼자 생각해 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곤 금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어찌 되었건 확실한 건, 카밀라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거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식구들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냉혈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이작 스스로도 제가 카밀라를 보던 시각을 고집스레 바꾸기 싫어하는 게 바보 같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자꾸, 샤를로테 때문에 내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네.’

이제는, 어쩌면 카밀라에게 제 아버지의 장례식 때 오지 못한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한번, 직접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이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는데, 정말로.’

그는 제 품에 안겨 있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한 번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으악, 오라버니. 힘으로 그렇게 하면 저 터져요.”

샬롯이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듣는 게, 제법 귀엽고 유쾌했다.

“하하하. 샤를로테.”

“네, 오라버니?”

“정말…… 매번 생각하지만, 너 같은 꼬맹이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인지. 판을 바꿔 놓는 데는 일가견이 있구나, 너.”

“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아이작은 세티야 가의 여자들에게 어쩐지 당해 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곤 체통 없이 샬롯의 볼에 제 볼을 비벼 버렸다.

* * *

발칵 뒤집힌 건 사냥터뿐만이 아니었다.

관중석 또한 발칵 뒤집혔다.

오늘 사냥터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존재, 샤를로테 세티야의 습격 소식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빠르게 전해져, 사냥터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군중들은 하나같이 샤를로테를 걱정했다.

“아니, 사냥제 같은 행사장에서…… 그것도 대낮에 습격을 당한다니요?”

“저희 제국도 이제 안전하지만은 않은 걸까요?”

“샤를로테 님의 인기를 경계한 게 아닐까요……?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러니까 말이에요. 멀리서 보기만 해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던데. 그렇게 귀엽고 멋진 분을 도대체 누가…….”

“샤를로테 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소식을 아시는 분 계신가요?”

그러한 소란 가운데서 황후는 말을 아끼며 부채만을 흔들었다.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속내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샤를로테 세티야가 습격을 당했다고? 요제프가 아니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혹시 일을 그르치더라도 목격자가 생기지 않게 하라고 명령한 건 맞았다. 하지만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샤를로테 같은 공작가의 막내딸을 건드리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뭐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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