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전력으로 부딪혀야,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진짜…… 이렇게 된 이상,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걸 보여 주자.”
“로테, 그러면…….”
“우리를 만만하게 본 걸, 후회하게 해 주자. 선전포고라도 할까 봐, 지금. 황후한테 가서.”
샬롯을 안고 있던 요제프의 기세가 대번에 음험해졌다.
“지금, 저자들을 보낸 게, 황후라는 거지?”
그녀가 다시 똑바로 앉으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응.”
“황후가 왜 너를……?”
그건 샬롯이 요제프의 더미를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잠깐 말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숨길 수도 없는 문제였다.
샬롯은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일단 아슬란에게 가자. 아마, 너도 느꼈을 테지만 오늘 아슬란에게 뭔가 장치가 되어 있었어. 그것부터가, 너를 노리려는 계략이었을 거야.”
샬롯이 절벽으로 돌진했던 아슬란의 이야기부터 복면을 쓴 사내들이 나타났을 때 망토의 후드를 벗었던 이야기까지를 늘어놓았다.
요제프가 입술을 꽉 깨무는 기척이 등 뒤로 느껴져서, 샬롯은 그를 달래려고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 짧은 사이에, 잔당의 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는지 황제의 기사들은 대부분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중 두 명이 남아 주변에 추가 잔당이 있는지, 혹 주변에 이상한 기척이나 남겨진 증거가 있는지를 수색하고 있을 뿐이었다.
샬롯과 요제프가 탄 나이트메어가 절벽 위로 내려서자, 두 명의 기사가 다가와 경례를 붙이고 다시 멀어졌다.
“뭐야, 요제프. 황제 폐하의 기사들이랑 이제 친하게 지내나 보네.”
샬롯은 요제프를 팔꿈치로 톡 치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별로 신나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나이트메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바로 황후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아슬란이 있는 곳으로 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자 그렇지 않아도 흥분 상태였던 아슬란은 요제프가 직접 목을 쓰다듬어 주고서야 겨우 진정해서 투레질을 멈췄다.
“이런 게, 아슬란의 뒷다리에 묶여 있었어.”
“……젠장.”
샬롯이 준 투명한 줄을 받아 들고서, 그는 다짜고짜 평소엔 하지도 않던 욕설부터 잇새로 뇌까렸다.
그녀는 요제프의 심정을 알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하는 거다.
요제프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생각해 주는지 잘 아는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슬쩍 흩트려 놓았다.
“난 괜찮아. 네가 와 준 덕분에.”
“……응.”
“근데, 내 생각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 이건 하나의 사전작업에 불과하고, 아슬란을 절벽으로 이끈 무언가가 있어.”
요제프가 미간을 가볍게 좁혔다.
“그게 뭐지?”
“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샬롯은 요제프가 아슬란을 살피는 사이에, 아직도 절벽 앞 돌 틈 바닥을 긁어 대고 있는 쫑에게 다가갔다.
“쫑, 여기 뭐가 있어?”
그녀가 단풍잎 같은 작은 손으로 쫑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 주자, 흥분한 쫑이 배를 발랑 까뒤집고 누웠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서 소리 없이 짖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온몸이 너무 반짝거려서 낮인데도 눈이 부실 정도였다.
샬롯은 귀여운 쫑을 마구 쓰다듬어 주곤 제 뒤로 물려 놓았다. 그러곤 돌 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 뭐가 있어?”
하지만 돌 틈으로 고개를 파묻어 봐도, 역시 아까 맡았던 달짝지근한 냄새만 날 뿐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샬롯은 주위 바닥을 한 번 둘러보았다.
돌이 잔뜩 모여 있는 쪽은,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오간 뒤인데도 바닥의 흙색이 아주 미세하게 달랐다.
최근에 누군가가 바닥을 헤집었던 흔적이다.
‘뭔가를 묻어 둔 건가? 하지만 이쯤 파묻어 뒀으면 주최 측이 묻어 둔 보물 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역시 한번 파 봐야겠어.’
샬롯은 기를 주입한 검으로 바닥을 쾅쾅 두드렸다.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하며 같은 지점을 두드리자 돌덩이들이 검을 버티지 못하고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더 넓은 돌 틈이 드러났다.
툭툭툭.
샬롯이 돌 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데,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거대한 눈동자와 그대로 시선이 맞닥뜨렸다.
“이게…… 뭐지?”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와 동시에, 거기 묻혀 있던 보물 위로 똬리를 틀고 있던 거대한 뱀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 * *
세티야 가의 아이작, 러슬, 비야키, 란슬롯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사냥을 하고 있었다.
샬롯 덕분에 억지로라도 함께 모여서 대련을 한 뒤로 부쩍 서로를 대하는 데 격의가 좀 없어진 탓이었다.
워낙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면면들이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에, 넷이 함께 지나가는 모습을 멀리서라도 본 다른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춰 세우고 감탄을 터트리곤 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함께 모여 사냥하는 이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이좋게 사냥을 하기보다는 제법 많이 부딪혔다.
어쩌다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성질이 급한 란슬롯과 비야키는 다짜고짜 활을 쏘거나 달려들었고 러슬과 아이작은 완벽한 상황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축이었기 때문에 의견이 하나도 맞질 않았다.
활 솜씨가 제일 좋은 아이작이 성과를 가장 많이 내는 것에도 나머지 셋은 불만이 많았다.
결국, 참지 못한 비야키가 제일 먼저 불만을 토로했다.
“저희가 뭐 언제부터 함께 다녔다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닙니까?”
러슬도 한마디를 보탰다.
“그것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각기 사냥하고 나중에 만납시다.”
란슬롯도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작도 뭐 굳이 잡지는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뭔가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경계심이 확 끼쳐 든 얼굴로 그는 검집에 손을 가져가고는, 다른 손은 검지를 세워 입 앞에 대었다.
황곰 기사단의 일을 하면서도 아이작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몇 번 본 적 없는 반응이었다.
나머지 셋은 웃고 떠들다가도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주변을 경계했다.
아이작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지금? 들었어?”
“무엇을 말입니까, 형님? 저흰 못 들은 것 같습니다.”
“짧은 단말마였지만…….”
“네?”
“아무리 생각해도, 샬롯의 목소리였던 것 같다. 나는 먼저 이동하지.”
아이작이 먼저 말에 박차를 가했고, 러슬과 비야키 그리고 란슬롯은 지금까지 서로 함께 있는 게 불편하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을 모두 새카맣게 잊은 사람들처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아이작을 뒤따라 말을 출발시켰다.
아이작을 비롯한 세티야 가 일원들이 마주친 건 샬롯이 아니었다.
갈림길에 서서 거대한 군마를 타고, 반짝이는 은색 경갑옷 차림으로 사냥터를 둘러보고 있던 이 나라의 기둥이자 세티야 가문의 수장, 카밀라 세티야였다.
목이 시작되는 곳에서 똑 떨어지는 백금발 사이로, 그 어떤 사내조차 범접하지 못할 기운을 가진 두 눈이 차분하게 제 식구들을 맞았다.
아이작은 눈썹 사이를 모으고 말고삐를 당겼다. 급한 보폭으로 걷던 아이작의 말이 속도를 현저하게 늦추자, 그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인사를 올렸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아이작은 카밀라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혹시, 가주님께선 샬롯을 못 보셨습니까?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어서 말입니다.”
카밀라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때 차례로 나머지 세 명이 도착했다.
“샬롯은 걱정할 것 없다. 현재 무사하고, 황제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있다. 걱정할 건 없다.”
러슬이 카밀라의 든든한 장담에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되물었다.
“걱정할 것 없는 애가 왜 황제의 호위 기사와 함께 있습니까? 지금 저희를 막고 있는 게 아니라면, 가 보아야겠습니다.”
카밀라가 쓰게 웃었다.
“말장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가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들렸나 보군. 그래, 가 보아라.”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러슬, 비야키, 란슬롯이 즉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카밀라가 허가하며 얼른 지나가라는 듯 제 앞의 길을 턱짓까지 해 보였는데도, 말을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쏴아아아-.
그사이 거센 바람이 불었고, 풀들이 일제히 누웠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둘밖에 없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있던 아이작은 그 바람 소리를 듣고서야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아이가, 사냥제에서 어지간한 위험에 빠질 아이가 아닌데. 뭡니까?”
카밀라는 쓰게 웃었다.
세티야 가의 이번 손자, 손녀 농사가 너무 잘됐다. 요즘은 뭐든 적당히 넘어가지는 일이 없었다.
“너라면 물어볼 것 같았다. 네게만 말해 두는 거지만, 정황상 요제프 황자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지금 그게 무슨…….”
아이작이 당황하는 얼굴을 했지만, 카밀라는 태연히 이어 말했다.
“샬롯이 요제프 황자 전하의 망토를 입고 있더군. 샬롯도 그렇게 짐작하는 눈치고. 황제 쪽에서는 살아 있는 놈을 확보했다고는 하는데, 아마 쉽진 않을 거다. 배후를 확실하게 알아내는 건.”
“……지금 그 말씀은…….”
“아무래도 황후가 보낸 자객들인 것 같다.”
아이작의 금안이 살짝 놀란 듯 커졌다가, 곧 앞뒤 사정을 파악한 듯 이내 가라앉았다.
그리고 앞뒤 사정을 알고 나자, 카밀라가 여기 왜 있는지 알 만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카밀라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지금 그래서…… 가주님께서는 여기 이러고 서 계신 겁니까? 황곰 기사단에게 샬롯을 공격한 놈들의 배후를 캐라 명하지 않으시고?”
카밀라가 아이작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 내며 대꾸했다.
“내가, 리카르도 황자 전하의 편을 들고자 이 정황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거냐?”
“아닙니까? 세티야 가야말로 리카르도 황자 전하와 황후 폐하의 가장 큰 우방 아닙니까? 가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으시니, 그 대단한 친분을 위해서라면 샬롯의 일을 모른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이시겠지요.”
짝.
아이작의 고개가 제법 거칠게 한쪽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