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아홉 명을 상대하는 것임에도 샬롯은 순식간에 세 명의 자객들의 다리에 큰 상처를, 두 명의 검을 쓰는 쪽 팔에 큰 상처를 입히면서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검을 쳐내는 순간이었다.
“대회에서 우승했다곤 하더라만…… 정말 대단하군.”
가장 먼저 말을 걸어왔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객이 샬롯에게 검을 길게 찔러 들어왔다.
샬롯은 그것을 쳐내는 대신 유연하게 뛰어올라 그 검의 날을 발로 밀듯 쳐냈다.
“대단하면 살려 줄 것도 아니면서, 혀가 기네요.”
“이 계집이!”
그 순간, 수장이 샬롯의 발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별것도 아니었다.
그냥 몸을 비틀어 피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 사형.’
순간적으로,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환영이 눈앞에 겹쳐졌다.
그녀는 볼의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아니야. 이건 그 상황이 아니야.’
대회 결선에서, 나이트메어에 의해 불려 왔던 환상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보았던 것만으로 속내 어딘가에 기억이 떠올라 있었던 걸까.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전생의 기억이 몸을 지배했다.
몸이 굳은 것은 그리 오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수준 높은 공방이었기에 짧은 방심만으로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발목이 붙잡힌 샬롯에게로 검이 짓쳐 들었다.
재빨리 그것을 쳐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절벽 아래로 집어 던져지듯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절벽에 단검을 박아 넣으려 했지만, 제법 멀리 집어 던져져서 그런지 절벽에 손이 닿질 않았다.
“……읏!”
‘하필, 절벽을 등져서는……! 멍청이!’
또, 한 번 그런 삶은 싫었다.
또다시 죽은 듯이 누운 채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은 싫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 할 수 있어, 정신 차리자.’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발에 내기를 몰아넣는 순간, 절벽 아래에서 그녀의 이름이 들렸다.
“샤를로테!”
“……요제프?”
허공에서 몸을 틀어 아래를 바라보자, 요제프가 나이트메어의 등에 탄 채로 그녀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날개 달린 검은 말과 검은 머리 소년의 모습을 보자 그거야말로 동화의 삽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아름답고,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눈을 한 번 채 깜박거리기도 전에, 샬롯의 몸은 요제프의 품속으로 떨어져 내려 부드럽게 안착했다.
“여긴 어떻게……?”
멍하니 되묻는 샬롯에게, 요제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꽉 안았다. 샬롯을 힘주어 안고 있는 그의 손끝이 아주 차가웠다.
샬롯은, 갑작스레 검을 치고받고 있는 저를 보고 그가 어지간히 놀랐다는 것을 깨닫고서 안심하라는 듯 그의 차디찬 손끝을 겹쳐 쥐었다.
“괜찮아, 요제프. 나는 괜찮아, 이렇게 네가 와 줘서.”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챙, 챙!
샬롯이 대답하려고 위를 올려다보는 찰나, 그녀가 떨어져 내린 절벽 쪽에서 검을 격렬하게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휙 위로 젖혔다. 그 바람에 반 묶음으로 묶은 분홍색 머리가 요제프의 품으로 쏟아졌다.
“누구랑 같이 왔어?”
요제프의 대답보다도 먼저, 고함이 귀를 때렸다.
샬롯이 나이트메어의 목을 톡톡 두드려 위로 떠오를 것을 부탁했고, 나이트메어는 즉시 크게 날갯짓을 해 위로 반원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포위하라!”
“오른 날개, 왼 날개! 각기 전개하여 포위망을 펼쳐라!”
“이쪽으로 한 놈이 도망갑니다!”
“쫓아!”
샬롯과 검을 주고받던 이들 중 몇은 바닥에 쓰러져 있고, 몇은 치열하게 검을 주고받고 있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복면을 쓴 사내들과 싸우고 있는 것은…….
‘황제의 호위 기사단?’
샬롯은 좀 놀라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도 여러 차례 마주쳤기 때문에, 황실의 문양이 가슴에 새겨져 있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고개를 들어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가려진 쪽을 유심히 바라보자,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재색 머리카락의 풍채가 좋은 황제의 모습도 얼핏얼핏 보였다.
“황제 폐하가 함께 온 거야?”
요제프는 이 상황에서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샬롯의 손을 꽉 쥐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같이 왔어. 그보다 로테는 괜찮아?”
샬롯은 제 발아래에서 펼쳐지는 추격전을 멍하니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당겨 웃어 버렸다.
걱정을 가득 담은 요제프의 질문이 무색할 만큼, 이 상황이 개운하고 재밌었다.
놀라긴 놀랐다.
갑자기 타고 있던 말이 절벽을 향해 질주하질 않나, 복면을 쓴 사내들에게 습격을 당하질 않나.
그래서 두려웠었다.
제가 아는, 그리고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의 최악의 상황들을 피해 온다고 생각했는데, 더 최악을 향해 온 것은 아닌지.
아렌느의 말이 맞는 건 아닌지.
‘하지만, 이거 봐. 나빠진 것만큼, 좋아진 것도 있잖아.’
황제와 요제프가 사이좋게 와서 나를 구해 주다니. 정말 원작대로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조합이었다.
샬롯은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던 것을 풀고, 요제프의 품에 몸을 턱 하니 기댔다.
“있잖아, 요제프.”
“응.”
“괜찮은 것 이상이야. 아주, 좋아.”
이 상황에서 너무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자, 요제프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며 샬롯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다.
‘이렇게 완벽히 제삼자가 되어서,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냥 정말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걸. 그리고 솔직히…….’
이번 기회가 나쁘지 않았다.
상대는 뻔하겠지.
황후일 거다.
황후가 요제프를 죽이려 드는 건, 너무 당연했다.
아렌느가 경계하고 있었던 게 어쩌면 옳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샬롯은 이번 기회로 말미암아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방심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는 시원스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응.”
‘당연히 괜찮고말고.’
괜찮다 못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요제프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죄다 하나같이 진짜 너무 심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의 것은 명백히 요제프의 목숨을 앗아 가려는 의도가 보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번에는 적당한 불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어 버릴 거야.’
줄곧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칼그림자의 날 이후로 저도 모르게 해이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일상의 사소한 행복들에 푹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한 번도 손에 넣어 본 적 없었던 행복에 파묻혀 있는데, 어떻게 방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가져 본 적 없는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과, 할머니로부터 보호받는 삶. 게다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것 같던 요제프도 이렇게 훌륭하게 황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하지만 사실 아직 해결된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미래에 다가올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요제프 황자가 황태자가 될 가능성은 아직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이 분위기로 봐서는 외려 그녀와 요제프가 황후에게 살해당할 가능성 쪽이 더 높을 것 같다.
샬롯은 양손을 들어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듯 쳤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정말로 고생이 많았고, 지금의 지위를 획득해 낸 것만 해도 너무 장하고 다행이었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진짜 여기부터가 시작이네.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선 거야.’
샬롯은 솔직히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정보를 백 퍼센트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벤에게는 투자처를 기꺼이 알려 줬지만, 그녀 자신은 따로 어디에도 투자는 하지 않고 있었다.
제가 정보를 활용하는 게 어디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는 주저함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솔직히 전생에서도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꼬마였으니 투자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굳이 그런 일에 손을 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다.
정치적인 인맥에 대한 정보도, 직접 활용한 것은 거의 없었다. 샬레스 황녀에게 귀띔해 준 것이 전부였다.
‘왜냐하면, 내가 맞부딪혀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했던 건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 그렇게 다양한 분야의 자원을 동원할 건 아니었으니까.’
세티야 가에서 쫓겨나지 않기, 요제프가 황태자 지위를 획득하기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요제프의 목을 지키기라니.
정말 과제의 규모가 제법 커졌다.
샬롯은 얼굴을 뒤로 꺾어 요제프의 얼굴을 코앞에서 바라보며 방긋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