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6)화 (96/123)

#96.

샬롯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났다.

이대로라면 아슬란은 절벽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아슬란이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할 행동이 아니었다. 기수뿐만 아니라 자신도 해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지금 이러는 건…… 뭔가가 있는 거다. 뭔가가 아슬란을 이렇게 만든 거다.

그녀가 등에서 뛰어내리면, 아슬란은 죽을 거다. 반드시.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요제프가 아끼는 말이자, 그런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 예쁜 백마를 이런 식으로 죽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샬롯은 이를 악물고 고삐를 당기며 양쪽 다리에 기를 실어 바싹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슬란은 기수의 명령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읏!”

샬롯은 달리는 말 위에서 벌떡 일어서서, 양발을 한쪽 등자에 싣고선 몸을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였다. 마치, 몸이 땅에 닿기라도 할 듯이 기울어진 채로, 양손에 기를 싣고서 고삐를 힘차게 당겼다.

아무리 그래도 샬롯의 몸무게와 아슬란의 몸무게는 비견도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났다.

아슬란의 진로를 돌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당황하기보다는 침착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샬롯은 절벽이 다가오는 것을 똑바로 보면서, 온몸의 내공을 바닥을 향해 눌러 붙이는 것을 상상하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천근추(千斤墜)!’

천근추는 내력을 사용하여 몸을 무겁게 만드는 무공이다. 이런 용도로 쓰게 되리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분명 익힌 적이 있었다.

순간적인 힘은 눈먼 듯 앞으로만 달리던 말의 방향을 바꾸기 충분했다. 아슬란은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었다.

툭! 투두둑!

절벽 끝을 아슬란의 말발굽이 거세게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돌덩어리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히히힝-!

“워, 워!”

히힝!

“쉬이, 괜찮아. 괜찮아, 아슬란.”

아슬란은 계속 흥분한 상태로 제자리를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았지만, 갑자기 불어난 기수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었는지 천천히 투레질하면서 발을 멈춰 세웠다.

샬롯은 아슬란이 멈춰 서자마자 뛰어내려 아슬란의 고삐를 나무에 묶고 난 뒤에야 겨우 숨을 가누었다.

처음 써 보는 무공이라서, 온몸이 뻐근하고 숨이 다 가빴다.

‘……하아.’

샬롯은 숨을 고르면서 아슬란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말이 이렇게 흥분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것도 아슬란처럼 잘 훈련받은 군마라면 더더구나.

‘뭐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슬란은 완벽했다. 어딘가 상처를 입은 곳도 없는 것 같았고, 털도 보기 좋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아슬란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녀는 마침내 뒷다리에 뭔가 가느다란 실 같은 게 감겨 있는 것을 찾아냈다.

‘……이게 뭐야?’

손으로 슬쩍 쓸어 보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투명한 실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말은 기수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저 혼자서는 이기지 못할 맹수 앞으로도 돌진하는 생물이지만, 본래 겁이 대단히 많다. 특히 말의 후방은, 말로서는 사각지대이기 때문에 그 부분의 자극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민감했다.

그녀가 마구간 일을 도울 때도 귀가 따갑도록 경고를 들었던 부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뒷다리에 뭔가가 닿는 것도 싫어했는데, 이런 실이 매여 있었다면 당연히 민감한 상태가 되었을 거다.

절대로 어쩌다가 바람이 불어서 우연히 실이 엉킨 게 아니라, 인간의 손길로 단단하게 몇 번이나 매듭지어 묶여 있었다.

‘용케도 묶었네.’

샬롯은 단검을 꺼내 그 실을 툭 잘라 냈다.

그제야 아슬란은 조금쯤 안심한 듯 보였지만, 아직도 흥분한 기색은 채 다 가시지 않아 보였다.

‘이게 전부가 아닌가?’

말은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다. 기억력도 좋고, 상황에 대한 판단력도 제법 훌륭하다. 칭찬을 받는 것도 알고, 위협을 받는 것도 안다.

잘 훈련된 말을 이렇게 벼랑 끝으로 돌진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샬롯이 무심코 아슬란의 콧잔등에 대고 제 볼을 비비는데, 문득 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향기. 뭔가…… 낯선 향기가 나는데.’

그 냄새는, 아슬란에게서도 풍겼고 다른 곳에서도 났다. 뭔가, 달콤한 듯하면서 동물의 체취 같기도 한 냄새가…….

킁, 킁.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냄새를 맡던 샬롯은 향기가 어디서 풍겨 오는지를 깨달았다.

낑, 낑!

어디냐면…… 쫑이 코를 박고 있는 돌 틈에서.

“쫑, 거기에 뭐가 있어?”

쫑은 빛나는 몸을 하곤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댔다. 지금까지 어떤 사냥감을 만났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을 살펴보려고 다가가지는 않았다.

문득 사위가 무척이나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흔한 새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그나마 들리는 소음이라고는 쫑이 절벽 가까이에 있는 바위틈에 고개를 처박고 발을 긁고 있는 소리뿐이었다.

주변에, 분명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기척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잠깐 헤아리기에도 열에 가까운 인기척이었다.

그리고 그 인기척들은 하나같이, 제법 대단한 무위를 가진 자들이었다.

인기척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을 살피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정체를 감춘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라.’

복면.

이것도 참 전통이 있는 물건인데, 일단 정파에서는 어지간한 일에서는 쓰지 않는 물품이었다.

반면 살막이나 혈막 같은 살수 단체나 혈교 등의 사파에서는 필수 보급품 수준으로 자주 쓰는 물건이었다.

즉, 정체를 감추고 싶은 자들이나 범죄자들이 쓰는 물건이란 건데…….

‘……이렇게 대낮에 열리는 사냥제에 오기에는 제법 칙칙한 차림샌데.’

샬롯은 쓰게 웃으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튼, 저런 복장을 하고 선한 목적을 가졌을 리는 없으니까.

‘총 아홉 명. 모두 성인. 모두 절정 고수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수준이 높은데. 이거,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피곤하겠는데.’

딱 부러지게 승리를 점칠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스릉.

그러나 그녀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드는 것을 신호로, 사방의 나무 위에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샬롯을 덮쳤다.

챙! 챙, 챙!

날카롭게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샬롯은 모두에게 둘러싸이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훌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경공을 쓴다고 해서 허공을 디딜 경지까진 아니었지만, 복면을 쓴 자들은 순간적으로 샬롯을 놓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아주 잠깐의 여유를 확보한 샬롯은 얼른 나무 밑동을 걷어차며 포위진의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저들이 내 망토를 자꾸만 확인하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요제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샬롯이 후드 아래로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아슬란을 요제프와 바꿔 탄 게 이런 일로 이어질 줄이야.

‘차라리 잘됐어.’

요제프를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지 않아도 되어서.

뭐, 실력으로야 어쩌면 별문제 없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이는 상황을 겪는다는 게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닐 거 아냐.

하지만 웃음 한편으로, 가슴 한쪽이 싸했다.

아무리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쉬운 사냥제라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사람을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제가 전혀 모르는 미래가 닥칠 때마다 심장이 크게 쿵쿵거렸다.

또, 책의 서술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닥칠까 싶어서.

‘이거 누님 노릇을 톡톡히 하게 생겼네. 나중에 요제프에게 뻐겨야지.’

애써 밝은 생각으로 복잡한 심사를 털어 낸 그녀의 위치를 포착한 적들이 단검을 일제히 던졌다.

팅! 팅! 팅!

제게 쏟아져 들어오는 단검 세 자루를 동시에 쳐내고 나머지는 피한 그녀는 훌쩍 물러서서 은폐물을 찾아 키가 작은 나무 옆에 가서 섰다.

그러곤 시야를 가리는 망토의 후드를 벗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를 덮치던 이들이 한꺼번에 멈칫하며 공격을 멈췄다.

그중 가장 실력자인 듯 보이는 사내가, 샬롯을 향해 당황한 눈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요제프 황자는 어딨지?”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요제프 황자? 말끝이 제법 짧군. 와라, 내가 상대해 주지.”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샬롯의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들은 주저하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묘하게 긴 침묵 끝에,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의 사내들은 그제야 한꺼번에 샬롯을 향해 검을 내질러 왔다.

‘뭐…… 목격자는 살려 둘 수 없다는 거겠지.’

샬롯은 쓰게 웃으며 검을 빠르게 쳐냈다.

챙, 챙!

검 실력이 대단한 성인 자객 아홉 명을 상대하는 거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정말로 실력이 다들 대단했다.

제게로 쇄도해 들어오는 검들을 쳐내다 보니 점점 그녀는 아까 떨어질 뻔했던 벼랑으로 떠밀리듯 다가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호재가 되었다.

등 뒤를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를 점하는 것만으로, 샬롯의 검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낙매성우(落梅成雨)!”

샬롯은 이를 악물며 검을 흩뿌렸다.

그녀의 검끝이 붉은 꽃 모양을 그렸고, 그 꽃 모양은 마치 비처럼 제 앞의 자객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분명 대련밖에 할 줄 모르는 명문가 아가씨라 생각하고 상대하고 있던 자객들은, 샬롯이 실전임에도 검을 쓰는 데에 조금의 주저도 없는 것에 당황했다.

게다가 샬롯이 사용하는 초식들은 검에 익을 대로 익은 자들의 눈에도 낯선 것들이었다.

허수가 많은 샬롯의 검을 처음 본 자들은, 고작 아홉 살짜리의 검을 상대로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샬롯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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