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5)화 (95/123)

#95.

“지금부터 대회가 시작됩니다!”

그때, 개회식이 모두 끝났는지 사회자가 큰 소리로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휘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참가자들이 탄 말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샬롯은 서두르지 않았다.

샬롯의 이번 대회 참가 목적은 남들과는 달랐다.

요제프가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 물론 그게 첫 번째 목적이었지만, 그건 제가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요제프와 쫑이 알아서 해낼 일이었다.

샬롯은 이번 대회를 통해서, 아렌느에게 요제프가 얼마나 건재한지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무사히 대회를 마쳐야 했다.

사냥제에서 작은 사고 정도는 흔히 일어나게 마련이었지만, 그런 작은 사고도 사양이었다.

요제프가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샬롯은 다른 참가자들이 조금 멀리 떠난 뒤에, 요제프의 망토를 빼앗듯 걸치고서야 나이트메어를 타고 천천히 숲길을 달렸다.

그녀는 망토를 휘감고 달리며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슬란을 탄 요제프는 당연하다는 듯 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황실의 상징이 그려진 망토인데 이렇게 달라고 하니까 반항 한 번 없이 순순히 주다니. 그래도 되는 건지 몰라.’

아마, 그녀의 의중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샬롯은 요제프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치를 본 게 들킬세라 작게 웃어 주곤 얼른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제프와 샬롯은 덩치가 그리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이젠 키가 한 뼘 조금 넘게 차이 나긴 하지만, 말에 올라 있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였다.

무림에서는 운송, 경비 업체를 표국이라고 불렀다. 그런 표국에서 일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누군가를 호위할 때는 일행 중에 지켜야 할 자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더미를 만든다고 했다.

그 풍문을 한번 실전에 적용해 보기로 한 거다.

요제프가 그녀의 마음을 안다면, 제 약혼녀를 자신을 대신할 더미로 만드는 것에 결코 동의해 주지 않을 테니까 비밀로 한 거고.

‘뭐, 정말로 무슨 사건이 생기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조심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고 요제프는 당연하다는 듯, 샬롯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쫑.”

요제프가 말을 달리며 도저히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붉은 펜던트에서 귀가 축 늘어진 사냥개가 튀어나왔다.

장모종 특유의 긴 갈색 털이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고, 바람에 털이 흩날릴 때마다 온몸이 반짝거렸다.

“찾아.”

요제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쫑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샬롯과 요제프의 말이 명마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둘의 승마술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뒤를 쫓지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조심해, 요제프! 알았지?”

요제프는 오늘따라 잔소리가 많은 샬롯에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와 함께 달려 나갔다.

* * *

“여덟 번째 보물의 발견자는 샤를로테 세티야 님! 보물의 정체는 고대 금화 세 개! 황제 폐하께서 이번 대회를 아주 통 크게 준비하셨군요!”

“아홉 번째 보물의 발견자는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황자 전하! 보물은 바로 금세공 반지입니다. 오, 이 반지는 해룡이 내놓은 진주가 박혀 있다고 합니다. 오오!”

“서른두 번째 사냥감은 멧돼지, 서른세 번째 사냥감은 야생 오리라고 합니다. 각기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황자 전하와 아이작 세티야 님께서…….”

와아아아-.

만세-!

작은 거인 만세-!

사회자가 하나하나 참가자들의 성과를 읊을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함성이 쏟아졌다.

직접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관중석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야유회를 즐기던 귀족들도 그때마다 각기 응원의 함성을 터뜨리거나 저들끼리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속삭여 댔다.

“이번 사냥감도 야생 오리군요! 리카르도 베로스 체이커! 2황자 전하께서 사냥하셨습니다.”

그때, 야유회장의 한쪽에 마련된 단상 곁에 자리 잡고 있던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참가자의 성과를 들을 때는 다른 이야기로 관심을 돌리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처음으로 사냥감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흐뭇하게 미소까지 지어 가며 박수를 쳤다.

“역시 리카르도 황자 전하십니다.”

“올해도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실 겁니다.”

리카르도의 성과를 찬탄해 주는 이들 사이에서, 셀렌 황후의 얼굴에는 그저 태연한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딱, 사냥하기 좋은 날이네요.”

그녀는 눈부시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 * *

사냥제는 즐겁고, 순조로웠다.

화산파가 자리한 곳답게 경사가 가파르고 암석이 많은 화산을 누비던 샬롯에게, 평지에 펼쳐진 숲속에서 사냥하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귀엽고 말 잘 듣는 사냥개가 함께하기까지 한다면야.

이변이 있다면야 사냥감들이 화산파에 있던 동물들과 외견이 좀 다르다는 점이었다. 멧돼지는 샬롯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덩치가 두 배만 했고, 먹을 수 있을지 도저히 의심이 드는 건장해 보이는 토끼라거나 잘못 들이받히면 죽을 것만 같이 거대한 사슴이라거나.

하지만 샬롯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동물들을 상대했다.

사냥감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며시 다가가서, 일격에 급소를 쳐 기절시키는 거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녔던 건지.”

어지간해선 샬롯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요제프도 그런 말을 할 정도였다.

리카르도가 뭘 얼마나 대단한 사냥감을 잡아 올지는 모르겠지만 시작한 지 한 시진도 안 되어 멧돼지를 여섯 마리나 사냥한 요제프가 오늘의 우승감인 것은 당연하리라.

게다가 보물찾기도 말에 싣기엔 묵직할 정도로 많이 찾아냈다.

다양한 보물들이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고, 쫑은 그것들을 순식간에 찾아내 입에 물고 돌아오곤 했다.

“이제 좀 천천히 다녀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겠지?”

요제프의 말대로 우승이 확정된 것 같자, 샬롯은 느긋하게 쉬어 갈 생각으로 공터를 찾아 나이트메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히히힝!

그때, 묘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응?’

샬롯은 반사적으로 요제프를 돌아보았다.

“쉬이, 괜찮다.”

요제프는 아슬란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 주고 있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사냥 때문에 흥분한 것 같은데?”

사냥 때문에?

샬롯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산파 마구간에서 꽤 오래 일을 도왔다.

아슬란은 전생에서 제가 본 말까지 다 합쳐도 손에 꼽을 만큼 훈련이 잘된 명마였다. 시종들이 접근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제 주인을 스스로 고를 줄 아는 말이라는 의미다.

그런 아슬란이 이렇게 흥분한 울음소리를 낸다는 건 뭔가가 있었다.

“요제프.”

“응?”

“잠깐만 내려 볼래?”

“응.”

역시나 요제프는 별다른 이견 없이 등자에서 발을 빼곤 수월하게 뛰어내렸다.

샬롯은 아슬란에게 다가가 아슬란의 입과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워낙 자주 봤던 데다, 샬롯이 아슬란이 좋아하는 대로 말 갈기를 쓸어 주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아슬란은 그녀에게 퍽 순종적으로 굴었다.

평소라면 샬롯이 다가가기만 해도 앞발을 꿇고 그녀가 탈 수 있도록 몸을 숙여 주었을 텐데, 아슬란은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흥분한 듯 어딘가 초조하게 굴었다.

‘어디가 이상하냐고 하면, 딱히 어디라고 할 순 없지만…… 뭔가 이상한데.’

샬롯은 제 감을 잘 믿는 편이었다.

타인을 믿지 못하게 된 뒤로는, 더욱더.

“있잖아, 요제프.”

“응.”

“내가 아슬란을 탈 테니까, 네가 잠깐만 나이트메어에 탈래?”

요제프는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슬란의 상태가 그렇게까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지 잠깐 망설이는 눈치였다.

샬롯은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얼른 고삐를 움켜쥐고 땅을 박차 말 위에 올랐다.

“샬롯, 그냥 네가 나이트메어에 타는 게 좋겠어.”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바꿔 타면 어때서? 아슬란은 내 말도 잘 들어.”

“……그건, 맞는 말이지만.”

요제프는 끝까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사냥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이만 돌아가자. 사냥은 그만하고.”

“응.”

샬롯은 아슬란을 쓰다듬어 주다가 고개를 들었다.

앞에, 묘하게 많은 일행이 보였다.

“……저기 앞에, 황제 폐하 일행 아니야?”

“맞네.”

“여덟 번째 마주치는데…….”

사냥터가 제법 넓은데도, 시종에게 사냥감을 넘기러 돌아올 때마다 황제의 일행과 마주쳤다.

심지어는 요제프가 떫은 표정으로 그때마다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샬롯과 요제프는 제법 사냥터를 가로지르며 길게 이동하며 사냥을 했는데도 그랬다.

샬롯은 처음에는 줄곧 경계심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황제가 있는 곳에서 별다른 사건이 벌어질 리는 없겠다 싶어서 점점 경계를 늦추었다.

“쫑, 이제 쉬자.”

요제프가 막 쫑을 거둬들이려는 순간, 쫑의 귀가 바짝 솟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뭔가에 흥분한 것처럼 코를 한참 킁킁거리더니, 어디론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샬롯은 황제의 일행이 요제프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만남은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움직이려는 요제프를 막았다.

황제가 사냥제를 틈타 요제프와 친해지려고 하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거다.

“이제 사냥 그만할 거면 내가 데려올게. 넌 여기 있어.”

“아니, 내가…….”

“금방 올게!”

샬롯은 쫑의 뒤를 쫓아 아슬란을 몰았다.

쫑은 뭔가에 홀린 듯 자꾸 숲속으로, 더 깊은 곳으로 자꾸만 뭔가를 쫓아 달려갔다.

샬롯은 그 뒤를 뒤쫓아가다가 문득, 손을 대고 있는 갈기 아래로 느껴지는 아슬란의 기가 몹시 흥분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워, 워.”

부드럽게 아슬란을 제지해 봤지만, 아슬란은 어느 순간부터 쫑의 뒤를 따르는 게 아니라 제 의지로 어딘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샬롯은 바싹 긴장한 채로 아슬란의 갈기에 매달려 엎드렸다.

아슬란은 지금 이지를 잃어버릴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등 뒤에 기수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서 달리고 있었다. 기수를 배려해 줄 턱이 없었다.

‘……여차하면 뛰어내려야겠어.’

그렇게 이를 악다물고 각오를 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절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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