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샬롯과 요제프는 황궁 정원을 좀 더 구경하다가, 해가 다 질 무렵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싸 온 쿠키를 꺼내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잔뜩 부려 놓았다.
“……이건.”
“너도 빨리 앉아. 같이 먹게. 아렌느 님의 쿠키야.”
“……이걸 뭐 하러 가져왔어.”
요제프가 표정을 살짝 구겼다.
샬롯은 그런 그가, 모처럼 반항기의 소년 같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모처럼 그렇게 준비해 주신 건데. 먹지도 않고 나오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어?”
“……그렇지도 않아. 그리고 요리에 재능도, 관심도 없으셔.”
“관심 없는 사람이, 그렇게 요리를 하진 않지. 넌 먹기 싫음 먹지 마. 나 먹으려고 가져온 거니까. 이것만 먹고 갈 거야.”
오독, 오독.
그녀가 대뜸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쿠키를 먹기 시작하자, 요제프는 한숨을 쉬며 큰 손수건을 샬롯의 치마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곤 테이블 옆에 나란히 앉아 주었다.
“와, 맛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제법 맛있어.’
요제프는 아렌느의 요리를 먹은 지 오래된 걸까?
요제프가 단호하게 한 말과는 달리, 아렌느의 쿠키는 단것을 무척 좋아하는 샬롯의 입맛에는 조금 덜 달긴 했지만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두꺼운 쿠키인데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잘 구워졌다.
하지만 샬롯이 그렇게 감탄사를 연발해 가며 부스러기를 잔뜩 흘리고 쿠키를 먹고 있는데도, 요제프는 전혀 먹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예 소파 등받이에 등을 붙인 채였다.
샬롯은 손바닥만 한 쿠키 두 개를 다 해치우고서야, 하나를 집어 들어 제 옆쪽에 앉은 요제프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아.”
“……뭐?”
“아, 몰라?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리라고.”
아무래도 그는 뜻을 몰랐던 게 아니라, 조금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눈만 되록되록 굴리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벌렸다.
‘뭐야, 진짜 귀엽잖아.’
샬롯은 흐뭇한 미소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쿠키를 요제프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요제프는 쿠키를 몇 입 오물오물 씹고서야 뒤늦게 좀 놀란 표정으로 샬롯의 손에 들린 쿠키를 바라보았다.
“맛있지?”
“……맛있네.”
“거봐. 이 누님의 말은 다 믿으라니까.”
요제프가 쿠키 하나를 다 먹는 걸 보고서야, 샬롯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고 시간이 늦어지면 곧장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해 두고 나왔던 참이라, 아쉽지만 슬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제 가 봐야지.”
“그래.”
샬롯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가, 방 안 가득 들어온 노을을 배경으로 선 요제프가, 너무나도 청초하고 아름다워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 주인공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그는 너무 예뻤고, 귀여웠지만, 한편으론 그대로 스러져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넓고 높은 방 안에서 홀로 남아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이대로 홀로 두고 가면, 어쩐지 울 것 같았다.
둘 중에서 울보는 샬롯 자신 쪽이라는 걸 아는데도.
“요제프.”
“응.”
“사냥제 있잖아.”
“응.”
“이번에는 제법 큰 대회가 되지 않을까? 황태자 어쩌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온 마당인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샬롯은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빼내 그에게 내밀었다. 요제프는 붉은 펜던트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그거, 어떻게 쓰는지 잘 익혀 둬. 오늘 숙제야.”
“……이게 뭔데?”
“대회에 큰 도움이 될 만한 거?”
샬롯은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의 요제프를 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쓸데없이 우울한 생각에 빠질 겨를이 없겠지.’
제가 생각해도 아주 만족스러운 숙제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샬롯은, 혼자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결국 잠이 들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황궁까지 다녀온 일정으로 몸은 피곤했음에도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요제프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다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번에 요제프가 황태자 후보에 올랐다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
‘있잖아, 그걸 그만두게 해 주겠니? 요제프를 위해서.’
아렌느가 오늘 제게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울려 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제프에게 너무한 말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정작 당사자인 요제프는 덤덤한데, 제삼자인 제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몇 번이고 다시 눈을 감았던 샬롯은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 위에 앉았다가, 슬리퍼를 꿰어 신고 일어났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렌느가 계속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요제프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서로 꼭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는 사이가 돼 버렸다고 해도…… 그래도 아렌느는 요제프가 먼저 나서서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요제프도, 엄마의 인정도, 지지도 받고 싶을 게 틀림없었다.
‘내게 엄마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엄마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멍하니 방 한가운데 서 있던 샬롯의 시선 끝에, 테이블 위에 놓인 세 개의 은쟁반이 들어왔다. 거기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서 온 초대장과 팬레터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그녀는 무심코 거기로 다가가 편지를 하나씩 손에 들어 펼쳐 보았다.
[작은 거인, 샤를로테 님께.
안녕하세요.
칼그림자의 날, 샤를로테 님의 무위를 본 뒤로 줄곧 동경하는 마음을 품고만 있다가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어쩜 그렇게 작은 몸으로 그리 폭발적인 무위를 보이시는지…….]
[샤를로테 세티야 님 귀하.
저는 샤를로테 님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기사단 수련생입니다.
항상 작은 키가 콤플렉스였고, 이런 키와 짧은 리치로는 덩치가 큰 사람들을 대적할 수 없다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샤를로테 님께서 보여 주신 경기를 본 뒤, 제 좁던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고…….]
[안녕하세요, 샤를로테 님.
칼그림자의 영광이 요제프 황자님과 샤를로테 세티야 님께 함께하길.
두 천사분께서 보여 주신 놀라운 기적을 본 뒤로, 두 분의 영광된 길을 따르고 축복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멍하니 하나씩 편지를 폈다 접으며 눈으로 훑어가던 샬롯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래.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잖아. 이분들도 나에 대해 항상 안 좋게 생각했을 것 아냐? 그런데 대회에서 직접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뀐 거잖아.’
샬롯은 제 생각이 마음에 들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 번 듣는 게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내가 백 번을 설득하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나을 거야.’
요제프는 충분히 단단했고, 2황자가 견제한다고 해서 그리 쉽사리 당할 아이가 아니라는 걸.
그렇게까지 심려하는 아렌느를 설득하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인 것 같았다.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곤 책상 앞으로 다가가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아렌느가 절대로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요제프와 그렇게 붙어 지냈던 그녀 자신조차 아렌느를 어떻게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심지어 그 큰 대회인 칼그림자의 날에도 참여하지 않았을 만큼.
‘하지만, 앞으로도 그대로만 지내라는 법은 없잖아.’
제가 만약 요제프의 엄마라면,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요제프가 활약을 다하는 모습을.
[아렌느 님께.
사냥제 날, 요제프와 제 모습을 보러 오세요.
직접 와 주신다면, 요제프가 기뻐할 거예요.]
아홉 살짜리의 손이 야무지지 못해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삐뚤빼뚤한 글씨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샬롯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봉하고서야 침대에 다시 기어들어 갔다.
* * *
이른 아침부터, 사냥제의 행사가 펼쳐지는 비브로슈 바로 옆의 백색숲 앞은 인파로 들끓었다.
칼그림자의 날이라는 거대한 대회가 끝난 뒤, 사냥제라는 이벤트는 사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작은 일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리 큰 주목을 받지도 못할, 의례적인 행사였으니까.
대회에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2황자에게 눈도장을 찍을 일이 없는 이들은 굳이 참가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매년 행해지는 행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좀 달랐다.
1, 2, 3황자를 모두 황태자 후보로 삼겠다는 황제의 선포는 파격적이었다.
거기에다 샤를로테와 요제프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으로 치솟은 점까지 더해져, 이번 사냥제만은 이례적으로 많은 군중의 관심을 산 거다.
다그닥, 다그닥.
리카르도가 탄 거대한 갈색 말이 군중의 가운데를 지나자, 붉은색과 까만색 깃발을 든 군중들이 자신들의 깃발을 슬쩍 숨기며 몸을 잔뜩 굽혀 예를 표했다.
‘망할 것들.’
리카르도는 입술을 짓씹으며 애써 군중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여론이라는 게 애초에 그때그때 시류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우매한 군중들이 저들의 황제가 누가 될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이상한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