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2)화 (92/123)

#92.

하지만 아렌느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제프를 믿는단다. 당연히 믿지. 그렇지만, 우리 꼬마 아가씨가 잘 모르는 위험이 세상에는 많지 않겠니? 나는 그냥 요제프가 행복하길 바라서 그런 거야.”

“요제프의 행복이요?”

샬롯은 그 조그마한 주먹을 꽉 움켜쥐고,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도저히 이 상황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렌느 님이야말로, 2황자 전하를 잘 모르는 것 아닌가요? 그간 요제프는 온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어요. 어떻게든 황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 죽어 버리는 게, 2황자에게 견제당해서 죽는 것보다는 열 배 낫지 않겠어요?”

고작 아홉 살.

요제프 황자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라며 데려온 아이의 외침은, 나이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절박했다.

아렌느는 그렇게 어린아이의 항변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가 당황한 채 요제프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이런 대화 자체가 불편한 사람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샬롯은 요제프가 당했던 일의 절반도 모르는 듯한 아렌느의 시선을 보고서야 이 모든 일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나친 참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입을 다물고 이 방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가엾었다, 요제프가.

아렌느가 생각하는 그녀의 아들 요제프는, 현실에 있는 요제프와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실제의 요제프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엔 관심을 두지 않고, 아렌느는 그냥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보호하고 있는 거다.

아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게 반드시 잘못되었다곤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요제프도, 엄마를 위해서 제가 당하는 모든 걸 다 숨긴 것 같으니까.’

그게 이 모자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이었겠지.

서로 좋은 모습만 보여 주는 거.

서로 원하는 방식으로 아껴 주는 거.

만약 모든 게 잘 풀리는 상황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요제프는 모르겠지만, 책대로라면 아렌느는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될 거다. 병사인지, 음해인지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더라도.

이런 속 빈 강정과 같은 관계로만 지내면, 틀림없이 후회할 거다.

샬롯은 요제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요제프가 이 상황이 마뜩잖다는 듯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고 있는 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참견한 이상.

“요제프, 네가 대답해.”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렴. 샤를로테의 말이 대체…… 사실이 아니지? 그렇지?”

요제프는 인상을 그었지만, 샬롯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두 여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참 동안 머뭇거리듯 샬롯만 바라보고 있던 그는, 긴 한숨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는 이 이야기를 감당할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나지막이 대답 아닌 대답을 털어놓았다.

아렌느는 그 자리에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니?”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말했지만…… 그냥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었어.”

“요제프……?”

“어차피 이제 난 황궁에서 머무르니까, 또 들러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샤를로테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니까, 굳이 또 들을 필요는 없겠죠.”

“……요제프.”

요제프는 어딘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다시 올게요.”

그러고는 그대로 샬롯을 끌어당겨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샬롯도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잽싸게 한 손으로 냅킨에 쿠키를 몇 개 싸 든 그녀는 요제프가 이끄는 대로 그를 따라나섰다.

문을 막 나서기 직전 샬롯은 굳은 채로 앉아 있는 아렌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부축을 바라지도 않고, 어떻게든 혼자서 제 몸을 지탱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리러 올게요.”

아렌느가 대답하려고 고개를 돌린 것 같았지만, 샬롯은 그대로 요제프에게 끌려 건물 밖으로 나가느라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

밖으로 나온 요제프가 긴 숨을 토했다.

마치,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가 한꺼번에 숨을 몰아쉬듯이.

별궁 앞에 놓인 계단을 모두 내려간 요제프를, 계단 하나 위에 올라선 샬롯이 꼭 안아 주었다.

조금 차갑게 식어 있던 요제프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로, 샬롯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아마, 요제프만은 이해할 거다.

그녀가 이렇게, 요제프조차도 바라지 않는 이해를 바라며 아렌느에게 참견한 이유도.

“남들도 이런 걸까?”

샬롯은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남들도…… 태어나서 자라면, 그냥 당연하게 저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애를 쓰면서 살아가는 걸까? 우리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닌 걸까?”

말을 하다 보니까, 분명 요제프를 위로해 줄 생각이었는데 샬롯은 또 멋대로 혼자 눈물이 났다.

‘아홉 살짜리 꼬맹이가 자꾸 울면…… 그냥 진짜 꼬맹이로 보일 텐데. 그건 싫은데…….’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요제프의 일이면 그저 쉽사리 고장 나 버리는 눈물샘은 오늘도 제멋대로 굴었다.

“……흐끅.”

“괜찮아.”

“내가, 흐끅. 너무 참견해서 미안해.”

“로테.”

“내가…….”

“나는, 너만 있어도 되는데. 하지만 고마워. 참견해 줘서 고마워.”

요제프가 부드럽게 하는 말은, 어쩌면 그녀를 달래기 위한 말이겠지만 그 말에서는 퍽 깊은 진심이 느껴졌다.

샬롯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너만 있으면 돼.”

요제프는 샬롯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든다는 듯 마주 안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아렌느는 두 아이가 나간 뒤에도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샤를로테가 잔뜩 집어 나간 바람에, 쿠키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요제프는…… 또 안 먹고 가 버렸네.”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요제프가 어릴 때부터, 아렌느는 병적으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어찌나 먹지 않았는지 직접 수유를 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요제프가 자라는 과정에서도, 아렌느는 제가 음식 자체를 너무 싫어하다 보니 요제프에게도 제대로 뭔가를 먹이지 못했다. 그나마 제가 정말로 신뢰하는 요리사 몇 명을 기용했지만, 그마저도 뭔가 의심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요리사를 금방 내보내 버렸었다.

그러다가, 황제의 배려로 요제프와 함께 추방당하다시피 한 뒤에는 사정이 조금 나아졌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차츰 요리를 배웠다.

요제프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이고 싶어서.

하지만 너무 늦었을까?

요제프는 그녀가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음식을 거부하던 것을 그대로 배웠다. 그녀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의심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요제프의 해골같이 비쩍 말라 있던 얼굴과 팔다리에 살이 올랐다. 그래서인지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키도 훌쩍 큰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가, 샤를로테 때문이라는 건 뒤늦게 알았다.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시종을 통해 일일이 수소문해서야 알았다.

정말로 너무 늦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요제프가 그렇게 제가 보지 않는 곳에서 훌쩍훌쩍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마음속의 불안은 가실 줄을 몰랐다.

아렌느는 알고 있었다.

셀렌 황후의 야욕이 얼마나 큰지. 셀렌 황후가 얼마나 거침없는 자인지.

첫째 아이를 그렇게 보낸 뒤, 증거를 손에 넣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던 그녀를 셀렌 황후가 직접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셀렌 황후는 언제나처럼 황후다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렌느를 위로하는 척 말했었다.

증거를 찾으면, 뭐가 달라질 것 같냐고. 네까짓 것의 말을 누가 믿어 줄 것 같냐고. 분수에 맞게 굴라고.

그게 전부였다.

그 뒤로 증거를 찾아낸 것도 아니었고, 셀렌 황후가 한 말을 저 말고 들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고해바칠 수도 없었다.

그냥, 깨달은 거다.

셀렌 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하찮은 시녀 출신의 황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그녀가 낳은 아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얼굴을 가린 손바닥 안에 눈물이 묻어나서, 아렌느는 깊은숨을 내쉬며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요제프가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그 맹랑한 아이가 한 말이 자꾸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지금까지 요제프가 그런 말을 제게 하지 않았던 게 제일 마음이 아팠다.

요제프마저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최대한 몸을 낮추고 살았던 제 판단이 틀렸을까?

요제프에게 아무런 권력도 쥐여 주지 않으려 했던 제 판단이…….

‘요제프가 황태자 후보에 오른 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요제프를 믿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샬롯이 하고 간 말이 심장을 두드렸다.

요제프를 믿어 달라는 말이.

솔직히 말해서, 요제프를 믿었던 적은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 사랑했다.

제게 남은 유일한 존재였다.

그 아이마저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느라, 요제프가 어느덧 제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랐다는 사실을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구도, 제게 해 주지 않았던 말을 듣고 나니까 심장이 너무 뛰어서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문득 그 순간, 그녀의 뇌리로 황제가 하고 갔던 말이 떠올랐다.

‘요제프에겐 제 편이 많이 없는데, 아마…… 요제프의 어미가 황비의 지위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그 아이에겐 꽤 다른 일일 거요. 그냥, 그대가 생각을 해 보았으면 해서, 이야기를 해 두려고 왔소.’

아렌느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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