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1)화 (91/123)

#91.

쏴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풀을 스치고 지나면서, 키가 큰 나무들이 잎새 흔들리는 소리를 냈다.

그제야, 샬롯은 느리게 눈을 떴다.

스치듯 닿았던 입술은 그대로 떨어졌다.

‘……이거, 이렇게 점점 익숙해져도…… 괜찮은 건가?’

샬롯은 제 눈앞에서 까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요제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의 눈동자 속에, 왜 뜻 모를 초조함과 답답함이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깜박. 깜박.

보통 먼저 말을 꺼내곤 하는 샬롯이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눈만 깜박이는데, 멀찍이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둘에게 다가섰다.

“들어가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황자 전하.”

“……그래.”

요제프는 그제야 느리게 샬롯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요제프의 손에 땀이…….’

분명,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샬롯은 그에게 거절의 말을 해 두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한 채로 요제프를 뒤따라 걸었다.

* * *

시종에게 안내받아 들어간 별궁의 공간은, 아담했지만 외관과 꼭 같은 정갈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에 에버폴 꽃이 장식되어 있었고 몇 없는 가구들 위에 정갈하게 장식된 물건들에서 주인의 취향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베이지색 소파 위에 놓인 흰색 뜨개 천이라거나, 목제 테이블 위에 놓인 꽃 자수 테이블보라거나.

한때나마 황비였던 여인이 사는 장소라기엔, 지나치게 소박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응접실로 안내받은 샬롯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느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한 여인이 다가와 섰다.

샬롯은 조금 놀라서 그대로 멈춰 섰다.

‘……닮았어.’

척 보기에도 권위를 상징하는 옷을 즐겨 입는 황후와는 달리, 이렇다 할 장신구 하나 없는 간소한 흰 튜닉 차림의 그 여인은,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전혀 달랐지만, 요제프와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동그란 이마, 그려 넣은 듯한 아름다운 눈, 피부와 확연히 대비되는 붉디붉은 입술.

‘하지만 지금의 요제프보다는, 처음 만났을 때의 요제프와 닮았어.’

은빛의 머리카락과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은빛 눈동자도 어딘가 많이 지쳐 보였고, 왠지 모르게 우려와 근심이 있어 보였다.

“왔구나, 요제프.”

그녀는 요제프를 바라보곤 가까이 다가와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리고 의문을 담은 시선으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은 얼른 치맛자락을 잡고 아렌느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샤를로테 세티야라고 해요.”

아렌느는 딱딱해 보이는 얼굴을 부드럽게 허물며 웃어 보였다.

표정이 없는 얼굴은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데, 입술을 슬쩍 당겨 웃으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 보이게 인상이 확 바뀌는 점도 요제프와 닮았다.

“그렇구나. 네가, 샤를로테구나. 요제프가 누군가를 데려오는 건 처음이라서, 어쩌면 너겠다는 생각은 했단다. 만나 보고 싶었어.”

“……아, 저를요? 저를 왜…….”

“일단, 앉으렴.”

샬롯과 요제프가 자리에 앉자, 아렌느는 사람을 시키지 않고 손수 다기에 물을 채우고 차를 내렸다. 미리 구워 놓은 듯한 쿠키들을 작은 접시에 옮겨 담는 것도 직접 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렌느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유교 의식이 몸에 밴 샬롯이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도 뭐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요제프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괜찮아. 어마마마는 이런 것들을 직접 하는 강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내버려 둬.”

“……어?”

당사자 앞에서 하는 것치곤 퍽 객관적인 평가에, 샬롯이 좀 얼떨떨한 표정으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요제프는 제 어머니를 소개해 주러 온 것치곤 그렇게 신나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보며, 미리 경고하듯 말했다.

“어마마마께서도,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냥 인사만 하세요. 로테와 저는 금방 갈 겁니다.”

아렌느는 쿠키와 차를 다 차리고서야 흐릿하게 웃었다.

“샤를로테에게 내가 뭐 험한 말이라도 할 것 같니, 얘는?”

샬롯은 아렌느의 미소가 너무 온화하고, 요제프와 닮아서 차를 홀짝이면서도 계속 눈알을 되록되록 굴렸다.

제가 아는 소문 속의 경박한 여인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랐다.

오히려 지나치게 지쳐 보였다. 그대로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릴 것처럼.

샬롯이 계속 그녀를 지켜보는 사이, 아렌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고맙다, 샤를로테. 고마워.”

“……제가 뭘요.”

“요제프는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니까, 상세한 이야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아이가 이렇게 밝게 지내는 걸 보는 건 처음이야.”

“……그건…….”

샬롯은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요제프의 눈치만 흘끗 살폈다.

그때, 아렌느가 찻잔을 톡 내려놓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요제프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다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번에 요제프가 황태자 후보에 올랐다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

“어마마마, 별다른 말씀은…….”

“있잖아, 그걸 그만두게 해 주겠니? 요제프를 위해서.”

샬롯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쿠키를 향해 뻗던 손가락을 그대로 멈췄다.

“……네?”

동시에 요제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샬롯의 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됐어, 가자. 이만했으면 오래 인사했다. 어마마마께서도 강녕히 지내십시오.”

샬롯은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질 않아서, 요제프가 저를 끌어당기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힘을 주어 버텼다.

“그만두라뇨? 아니…… 요제프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그사이에 아렌느가 은빛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며 부드럽게 웃더니 말을 더했다.

“요제프는 여린 아이란다. 보기엔 건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주 아프기도 하고. 그런 어지러운 정치판을 버틸 수 있는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두고 싶지도 않고.”

“……황비 전하께선…… 아니…….”

“아렌느라고 부르렴.”

“아렌느 님은…… 요제프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요제프는 그렇게 여리지 않아요.”

“샤를로테. 글쎄, 요제프가 밖에서는 어떻게 행사하고 다니는지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 아이를 돌봐 온 내가 가장 잘 알지 않겠니? 정말로, 요제프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할 만큼 자주 앓았어. 나는…… 이 아이만은 잃고 싶지 않단다.”

샬롯은 눈을 깜박였다.

아렌느의 생각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옛날 일처럼 생각될 정도로 요제프의 몸 상태는 아주 많이 호전되었다. 요제프가 수련을 거듭해 나가는 중에, 다시금 기의 흐름이 엉킬 가능성이 남아 있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완벽에 가까운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저렇게 누더기 같은 몸 상태를 하고도 살아 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어느 한순간에 망가지지는 않았을 테다.

점점 망가지는 순간들을, 아렌느는 봤을 거다.

그러니까 저런 걱정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껏 노력한 걸 갑자기 그만두라니? 그리고 그걸 나한테 대신 말해 달라니……’

그때 요제프가 다시 한번 힘주어 샬롯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어. 됐으니까, 가자.”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요제프는 샬롯에게 하는 모든 행동에 배려가 섞여 있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가볍게 뿌리칠 수 있는 힘일 뿐이었다.

샬롯은 요제프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제프가 왜 제 부모님과 이렇게까지 대화를 하지 않는지, 왜 오해 아닌 오해를 아직 내버려 두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저를 낳아 주신 분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샬롯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너무 소중했다. 그런 존재인 어머니와 모처럼 대면해 있는 요제프가 지금보다는 더 행복하고 잘 지냈으면 했다.

“오지랖인 건 아는데, 아렌느 님도 제게 굳이 부탁하신 거니까, 저도 말씀 하나 드릴게요.”

샬롯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거절하는 것도 아닌, 당돌하게 연두색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아렌느는 좀 놀란 얼굴을 했다.

고작 아홉 살.

요제프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를 데려오겠다고 할 때만 해도, 아이들의 소꿉놀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 아이는 묘하게 성숙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냥 조숙해 보이는 게 아니라, 제 의견을 떼를 써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상대를 설득하려는 모습이 보이는 게 그랬다.

아렌느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어머, 우리 꼬마 아가씨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일단, 요제프는 건강해졌어요. 그리고 둘째로, 요제프가 황태자 후보에 오른 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요제프를 믿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

아렌느는 놀란 눈으로 샬롯을 바라봤다.

요제프는, 이런 이야기 자체를 질색했고 제가 뭐라고 하건 자리를 피해 버렸기 때문에 아들과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샤를로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것도, 정말로 요제프를 설득해 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냥 요제프에게 할 이야기를 이 자리를 통해서 돌려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진심으로 제 이야기에 맞부딪혀 왔다.

그게 아렌느에겐 너무 낯선 일이라서, 그녀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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