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그러고선, 제롬의 당황한 얼굴 앞에서 혀를 샐쭉 내밀어 보였다.
“말 한마디로 갚을 수 있는 빚은 별로 없는 법이지만, 사과를 안 듣는 것보다는 낫네요.”
“……그래.”
“감사히 잘 쓰겠다고 꼭 전해 주세요. 저도 직접 뵈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샬롯은 또 제롬의 사과 같은 건 별일도 아니었다는 듯, 금세 다시 신난 얼굴로 돌아가서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멀어져 버렸다.
제롬은 멍하니 샬롯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제 딸은 너무 어려서, 아직까진 괜찮다고만 생각했었다. 언젠가 좀 더 크고 나더라도 그때도 아직 세티야 가에 머물러 있다면, 그때부터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좀 더 좋은 사이가 되면 되겠거니, 그렇게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어차피, 샬롯은 가문에서 쫓겨날 예정이었으니까. 이르게 혼처를 찾아볼 생각만 하기에 바빠서.
그런데, 샬롯의 말이 맞았다.
말 한마디로 갚을 수 있는 빚은 별로 없었다.
아무리 어려도, 샬롯은 너무 많은 걸 알았다. 칼그림자의 날에서 우승할 만큼 자라 버린 거다.
제롬은 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로도, 비서 레이트가 그를 찾으러 올 때까지 멍하니 거기에 서 있기만 했다.
앞으로 샬롯과 다시 친해지더라도, 서로에게 정말로 마음의 바닥까지 털어놓는 부녀가 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문득 깨달아 버려서.
그게,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 * *
방으로 돌아갔던 샬롯은, 말끔하게 씻고서 미니 드레스로 갈아입고선 얼른 다시 요제프를 찾았다.
그냥 무복 차림으로 나와도 상관없었지만, 오후에는 검 수련은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베티가 그러도록 둘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미리 도시락을 챙기지 않아도, 요제프가 머무는 거처에 야외 피크닉 테이블을 차려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손이 퍽 가벼운 채였다.
요제프도 그사이에 씻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새하얀 블라우스에 잿빛 바지 차림이었다.
샬롯은 나이트메어에서 뛰어내려 얼른 요제프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쥐었다.
‘얼른 밥 먹고, 리카르도 황자한테 받아 온 목걸이도 시험 삼아 한번 써 봐야지. 그리고 또, 카밀라가 준 단검도 자랑하고…….’
샬롯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며 피크닉 테이블이 있다고 하는 별관 건물 뒤쪽으로 발을 떼어 놓았다.
“배고프겠다. 어서 먹자.”
요제프는 고개는 끄덕였지만, 샬롯의 뒤를 따라가는 대신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데 식사는…… 이번까지만 같이 하게 될 것 같아.”
샬롯은 제 손에 딸려 오지 않는 요제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 때문에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어……? 왜?”
“이제 돌아가려고.”
샬롯은 제법 담담한 요제프의 음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제프는 황자고, 그 신분에 세티야 가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다. 요제프의 황자로서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칼그림자의 날을 계기로 황궁에 다시 요제프가 머물 거처가 생긴 건 너무 잘된 일이었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요제프가 황궁에서 생활하는 게 맞긴 했다.
그래도 너무 아쉬웠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요제프와 함께 수련하던 그 시간들이, 요제프와 둘이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 내놓던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하지만 또 막상 붙잡을 수는 없었다.
샬롯은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가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요제프는 아쉬운 표정을 애써 숨기는 그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로테.”
“어?”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황궁에 같이 가자.”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 누구?”
언뜻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잠깐 고민하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이다가, 샬롯은 요제프가 대답하기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면 또 어떨까?
요제프를 혼자 보내는 게 너무 아쉽던 참이었는데, 그를 배웅하는 걸 핑계로 조금 더 함께 있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뭐, 좋아, 좋아. 이 누님이 에스코트도 해 주고, 호위도 서 줄게.”
그는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그녀의 기분 좋은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샬롯이 누님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하는, 이 상황이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허브와 함께 통으로 구워 낸 오리고기를 메인으로, 상큼한 계절 과일이 들어간 샐러드와 야채수프, 거기다 샬롯의 입맛에 꼭 맞는 달콤한 디저트까지.
샬롯은 식사가 너무 즐거워서, 식사 내내 언젠가 꼭 키친 메이드들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샬롯은, 요제프와 함께 나란히 나무 둥치 앞 잔디 위에 담요를 깔고 앉았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그냥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새파란 하늘 위를 흘러가는 구름도, 제법 더운 여름날의 뙤약볕도, 귀가 따가울 정도의 풀벌레 소리마저도.
‘……그리고, 요제프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샬롯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떠오르는 본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언제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지, 요제프의 까만 눈동자와 그대로 시선이 닿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럽게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의 앞머리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요제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려던 말을 다 까먹을 만큼, 아름다운 까만 눈동자.
그 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샬롯은, 문득 시선을 내려 요제프의 오뚝한 코와 그 아래에 곱게 자리 잡은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입술을 보는 순간, 요제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던 날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다시 시선을 옮겨 그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샬롯은 문득 요제프가 제 시선마저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딱히 어떤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뭐라고 해명을 하기도 이상한 것 같아서, 괜히 붉어졌을 귀가 신경 쓰여 손을 드는데 요제프가 그대로 샬롯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부드럽게, 솜털 같은 감촉이 지난 어떤 날처럼 샬롯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후, 불면 날아가는 종류의, 날개가 달린 씨앗을 가진 작은 식물로 이마를 두드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눈을 깜박이곤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어?”
요제프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요제프는 샬레스 황녀와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솔직히, 샬레스 황녀를 만난 뒤에는 이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의미를 담은 게 아니라 할지라도. 그냥,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갑작스럽고, 예상을 벗어난 일이니까.
첫 번째보다도 더.
샬롯은 이런 어색한 공기를 원한 적이 없었다. 약혼한 사이라면 당연히 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자신들은 너무 어렸고, 게다가 정식으로 결혼이니 뭐니 할 상대는 제가 아니라 샬레스 황녀일 테니까.
‘별일도 아닌데, 내가 너무 놀랐을까?’
샬롯은 다시 한번 눈을 깜박이고선, 놀란 마음을 훌훌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저를 지그시 올려다보는 요제프의 손을 당겨 일으켜 세워주었다.
“뭐야, 어른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맹랑하다니까.”
“로테.”
“황궁에 가자며? 이제, 배도 부르니까 얼른 가자.”
“……로테.”
“호위 분들이랑 일정 다시 짜야 하나? 난 그냥 아빠에게 얘기만 해 두고 가려고.”
뭔가를 말하고 싶은 얼굴이던 요제프는, 샬롯이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계속 쏟아 내자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긴 한숨과 함께 묵묵히 일어나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바로 가자고 이야기할게. 지금 가자.”
샬롯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요제프가 귀여운 강아지처럼 구는 쪽이, 역시 좋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진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샬롯은 처음 요제프를 만나러 올 때 생각했던 계획들 같은 것은 모조리 까먹어 버렸다는 것을 나이트메어를 타고서야 겨우 떠올랐다.
* * *
가문 안에 있을 때는 도통 실감하지 못하지만, 비브로슈의 시가를 지날 때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인기를 실감하게 된다.
샬롯과 요제프는 제법 조촐한 수행원을 데리고 순식간에 비브로슈의 대로를 주파해서 황궁에 도착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정말로 많은 환호를 들어야 했다.
출발하기 직전에 제법 생각이 많아졌던 샬롯도, 요제프를 향한 제법 많은 이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신이 나서는 그런 생각 같은 것들은 모두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분이 좋아진 채였다.
다그닥, 다그닥.
황궁의 앞에 다다르자 요제프가 올라 있는 아슬란의 말 편자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샬롯은 문득 아까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 떠올라, 다시 한번 요제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이 누군데?”
요제프는 아슬란을 부드럽게 몰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어마마마.”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지도 몰랐다.
만날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의 이야기에, 샬롯은 놀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