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88)화 (88/123)

#88.

중심에 선다는 건, 사실 본능적인 거다.

파티를 열게 되더라도, 손님 모두와 관계가 있는 주최자가 보통 중심에 서게 되는 것처럼.

여러 인물이 한자리에 있게 된다면 아무래도 모두와 친분을 잘 유지하는 사람이, 모두를 통솔하는 사람이 자연스레 그 중심에 있게 된다.

카밀라는 한참 동안 더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가, 차가 다 식고서야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제롬.”

카밀라의 부름에, 책상에 앉아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제롬이 고개를 얼른 들었다.

“네, 가주님.”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가주의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지?”

“……네?”

제롬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만약, 실력이 가장 우수한 자가 있다면 물론, 그자가 가주가 되면 좋겠지. 지금까진 당연히 그렇게만 생각했어.”

“……네. 그렇죠?”

“그런데 말이야. 모든 구성원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어떨까?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뭐, 그러면야 좋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가주의 조건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카밀라는 도통 제 말을 이해하질 못하는 제롬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식은 차를 목으로 넘겼다.

일부러 밖이 잘 보이도록 커튼을 다 걷어 둔 사이로, 창밖에서 검을 주고받는 아이들이 보였다.

어느샌가 대진이 바뀌었는지, 아까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구도로 매칭되어 있었지만 역시 가장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손녀 샤를로테였다.

‘역시 독특해.’

검끝이 꽃의 형상을 그리는 것도, 계속해서 뭔가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대련에 임하는 모습도, 세티야 가문이 정통으로 가르치는 검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가문의 명맥을 이은 검술의 느낌도 아니었다.

타국의 검술까지, 어지간한 것은 전부 접해 본 카밀라였지만 그녀의 대단한 안목으로도 알아볼 수 없는 검술이었다.

기존에 있던 것을 변형한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바탕에서 창조해 낸 검술인 듯 보였다.

‘보면 볼수록 장하단 말이야.’

꽤 오래 입을 다물고 있던 카밀라는, 문득 혼잣말처럼 툭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손녀는 보면 볼수록 예쁘다고들 하던데. 난 그게 여자애에게 순종과 겸양을 강요하는 멍청이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거든.”

“……네?”

“그런데 정말로 예쁘네.”

“손녀라면 샬롯 말씀이신지……?”

“그래. 보면 볼수록, 아주 대견해 죽겠어.”

대번에 고개를 끄덕인 카밀라가 제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샤를로테는…… 아니, 샬롯은 뭘 좋아하지?”

“……샬롯이요?”

제롬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카밀라가, 제 손자나 손녀를 이렇게 친근한 듯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그래, 샬롯. 샬롯은 뭘 좋아하지?”

제롬은 눈을 깜박였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건 최근에 이미 고민을 해 본 주제였다.

“……그게, 뭘 해 줘도 사실 이상할 만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뭘 해 줘도?”

“곰 인형을 사 줘도 좋아하고, 방을 꾸며 줘도 좋아하고…… 최근에는 전용 진검을 사 준 걸로 만날 때마다 인사를 들을 정도로 좋아하던걸요.”

카밀라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테이블 위에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곰 인형에서부터 진검이라니. 취향의 폭이 너무 넓은 거 아닌가?”

“……뭐 그렇긴 합니다만, 여자아이들이란 본래 인형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녀는 혀를 차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자랐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가주인 자신도 바쁘고, 형제를 잃은 뒤 혼자 남은 일을 다 떠맡은 제롬도 제법 바쁘게 자라서 그럴까?

제롬은 무슨 틀에 찍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사고가 굳어서 자랐다.

“그래도 참, 어떻게 생각하면 그게 더 장하구나.”

“……어떤 점이요?”

“너 같은 아버지를 두고도, 샬롯이 저렇게까지 잘 자란 점이.”

제롬은 기껏 샬롯이 좋아하는 것을 말해 주고도 타박을 듣자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카밀라로선 거기에서 말을 그친 게 꽤나 말을 많이 아낀 거였다.

카밀라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손녀가 예뻐서, 볼수록 너무 예쁜 짓만 골라 해서 못 견디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솔직히 2황자니, 3황자니 하는 커다란 골칫거리를 물어 온 것도 샬롯인 건 맞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말 예뻐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뭘 해 줘도 좋아한다니, 그러면 뭐든 해 줘 보지. 사냥제 이후에는 여행을 보내 줘도 좋을 테고, 그리고 뭔가 줄 것은…….”

카밀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뭔가 떠오른 게 있어서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가주의 집무실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수집해 온 수많은 검과 도, 단검 등의 무기와 갑옷 중 가장 아끼는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것 중에는 보석이 박힌 것도 있었고, 보석을 깎아 내 만든 것도 있었으며, 마법이 깃든 것도 있었고, 세티야 가의 가보로 대대로 물려 내려온 것도 있었다.

카밀라는 누구에게도 내어 준 적이 없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전 훈련을 마치고 땀을 씻으러 돌아가던 샬롯은 갑자기 품에 검을 세 자루를 안고 나타난 제롬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제롬이 안고 나타난 검들은, 란슬롯과 함께 검을 사겠다고 돌아다니며 대장간에서 봤던 검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다.

직접 손을 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물건들이었다. 화산파의 장로들이나 가지고 있었던, 그런 검. 기를 불어넣기 전부터, 예기가 남다른 검.

샬롯은 호기심에 저도 모르게 제롬의 품을 향해 목을 길게 뺐다.

상세한 가격을 듣지 않아도, 굉장한 고가의 물건들일 게 눈에 보이는데 이런 대단한 것들을 도대체 왜 대낮부터 안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샬롯.”

“네?”

제롬은 그 검들의 손잡이를 샬롯이 쥘 수 있도록 방향을 바꿔 내밀었다.

뭐, 대단한 물건들이라는 걸 절로 알 수 있는 검들이었으니까. 만져보는 건 기쁜 일이었다.

“누구 건데요? 제가 전해 주면 돼요?”

샬롯이 사양하지 않고 얼결에 받아 드는데, 제롬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 거야.”

샬롯의 연둣빛 눈이 동그래졌다.

“……네? 왜요?”

“가주님께서 특별히 주신 거니, 소중히 간직하도록.”

샬롯은 멍하니 제 손바닥 위를 바라보았다.

세 자루 모두, 단검이었다.

장검은 이미 있으니 쓰기 편한 단검을 준 걸까?

하나는 새까만 검집 위로 촘촘한 에메랄드빛 보석이 박혀 있는 금장 장식이 된 물건이었고, 또 나머지 두 개는 하나의 세트인지 꼭 같은 모양의 두 뼘도 안 되는 자그마한 단검이었다. 전자는 실제로 쓰기에 좋을 테고, 후자는 장식용으로 써도 좋을 정도로 아담한 것이었다.

직접 검집에서 날을 꺼내 보지 않아도, 이미 그 검들을 손 위에 올리고 있는 것만으로 거기에 내기를 불어넣어 보고 싶은 충동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것들은 전전대 가주님께서 바실리스크의 뼈로 만든 단검과 고대적 유물로 남아 있는 희귀 금속으로 만든 쌍 단검이란다.”

제롬이 해 주는 설명을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그 검 세 자루를 꽉 끌어안았다.

본인이 직접 가져오지 않았어도, 카밀라의 섬세한 마음은 충분히 헤아려졌다.

아직 어린 그녀가 쓰기 좋을 작은 검을 골라 준 정성이 좋았다. 장검 하나로도 충분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사냥제에 나갈 거면 작은 단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지금 이 시기에 딱 알맞게 선물해 준 것도 좋았다.

‘이 검 자체도 너무 좋지만, 선물해 주려고 내 마음을 헤아려 줬다는 게 너무 좋아…….’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제롬은 샬롯의 얼굴에 잔잔하게 번진 미소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고작 한마디 했을 뿐이었지만, 볼이 다 붉게 물들어서는 양손으로 손에 쥔 단검들을 조심스레 만져 보는 모습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뭘 이렇게 줄 때마다 좋아하는 거야?’

제롬은 솔직히 카밀라가 자꾸 그에게 샬롯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듯 타박할 때는 그 말을 듣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검들은 정말 대단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아홉 살짜리 아이가 그 가치에 대해 뭘,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좋아하는 게 어딘가, 짠한 거다.

제대로 선물 한 번 못 받아 본 아이 같아서.

제롬은 제 막내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곧, 열 살이 되는 막내딸의 얼굴은, 솔직히 제가 모르는 사람같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러슬과 카밀라의 말처럼, 자신은 한 번도 샬롯을 잘 알았던 시절이 없었던 것 같다.

항상 그녀에게 아쉽다는 말만 했다.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제롬은 문득, 샬롯에게 처음으로 꺼내는 말을 혀에 올렸다.

“샬롯, 내가 미안했다. 내가, 그간 널 그리 잘 돌본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 같구나.”

단검들을 손에 쥐고 있던 샬롯의 동그란 눈이, 제롬의 모습을 천천히 담았다.

무슨 대답을 기대했을까?

제롬은 요즘의 샬롯은 워낙 얌전하게 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형식적으로나마 대답할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샬롯은 그런 제롬을 쓱 바라보더니, 그 행복해 보이던 미소를 지우고선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고개를 가로로 작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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