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87)화 (87/123)

#87.

샬롯은 누구보다 신이 나 있었다.

솔직히, 아이 같은 감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자.’ 같은 건.

그녀의 경험상, 사람은 타인을 위하고 배려하며 돈독하게 지내는 일보다는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워낙 많은 사람이 제게 따뜻하게 잘해 줘서 그럴까? 아니면 요제프가 모두가 등을 돌려도 제 곁에 남아 주겠다고, 무리해 가면서까지 모두의 앞에서 약속을 해 줘서 그럴까?

그냥 문득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순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떠드는 순간이 제 앞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서로 반목하기만 하는 세티야 가 일원들이 이 순간 눈앞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게, 그리고 다들 처음에는 떨떠름한 얼굴로 도착한 주제에 어느 순간부턴가 열을 올리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게,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주체하지 못할 웃음이 서려 있는 게 너무 좋았다.

“굼벵이냐?”

“그러는 너는, 솜방망이냐?”

러슬과 비야키는 서로 예의조차 없이 빈정거려 대면서도, 진지하게 검을 맞대었다.

샬롯은 그것도 그저 흐뭇해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샬롯이 흐뭇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요제프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샬롯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산책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끌려 나온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눈을 휘며 웃어 버렸다.

“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샬롯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이상해?”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냥.”

“그냥?”

“……말년에 은퇴한 검사가 잘 자란 아들들을 보며 흐뭇해하는 표정이다 싶어서.”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샬롯은 요제프가 이런 농담을 하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웃기면서도 놀라워서 얼른 그의 양 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볼살을 양손으로 조물조물 만지는데, 요제프가 퍽 가까워진 샬롯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코라도 곧 맞닿을 듯한 거리감을 재듯, 샬롯의 눈과 코와 입을 차례로 바라보고선 작게 한숨을 토했다.

“왜애? 왜 한숨 쉬어? 지금 농담한 거지? 와. 진짜, 우리 애기 많이 컸다. 응? 진짜 이 누님이 너 다 업어 키운 거다. 알지?”

“……로테.”

요제프가 어딘가 뚱한 말투로 뭔가 말하려는 순간, 샬롯의 어깨를 지나 목검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어?”

샬롯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은색이 많이 섞인 금발의 곱슬머리를 야무지게 꽁지머리로 묶은 란슬롯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불러 놓고 뭐 하는 거야?”

“……어? 뭐 하냐니, 둘씩 대련하고 있어서 그냥 좀 쉬는데?”

“나랑 대련해.”

“방금까지 아이작 오라버니한테 얻어맞고 있지 않았어? 좀 쉬지?”

“체력은 남아돌아.”

샬롯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란슬롯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도전 정신과 반감 같은 게 짙게 스며 있었다.

‘보기 좋아.’

란슬롯은, 작중에선 그냥 전장에서 스러져 가는 보잘것없는 역할로 운명을 다했었는데.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샬롯은 요제프의 볼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랑 한판 하자.”

그녀가 웃으며 목검을 찾아 쥐려는데, 요제프가 란슬롯을 탐탁잖은 시선으로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상대하지.”

“그래. 제발 그래 주시죠, 황자 전하.”

대회 전에만 해도 어쩐지 요제프와 다시는 말을 섞을 것 같지 않게 보이던 란슬롯도,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나는?”

“로테는 좀 쉬고 있어.”

“그래, 쉬어.”

샬롯이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사이에, 요제프와 란슬롯은 대련장 한쪽 구석에서 갑작스레 대련을 시작했다.

탁, 탁, 탁!

목검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수준이 차이가 났지만, 란슬롯도 최근 정말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결판은 그리 쉽게 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둘 다 대충대충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목검이 한 번 부딪힐 때마다 검이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났다.

샬롯은 꽤 멍한 얼굴로 둘을 오래 바라보았다.

최근에는 요제프가 저 이외의 사람과 대련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요제프도 속에 쌓인 게 대단히 많을 텐데, 진검까지 들고 덤볐던 란슬롯과 이런 식으로 다시 대련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뭐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둘도 제법 사이가 좋네.’

목검을 맞대면서 힘을 쓰다 보면, 아무래도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것이다 보니 서로 감정이 쉽게 쌓였다. 그건 호승심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또 상대에 대한 신뢰와 정이기도 했다.

샬롯은 요제프와 대련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배웠다.

그러니까, 저렇게 대련을 하는 것 자체가 제법 격렬해 보여도 막상 저러다 보면 또 정말 사이가 좋아지리라는 걸 아는 거다.

샬롯은 무릎을 감싸 안고 흐뭇하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소설 속의 요제프 황자는, 꽤 고독해 보였다. 줄곧.

샬레스 황녀에게 사랑을 받기 전에는 더 지독히 고독해 보였고, 샬레스 황녀의 궁에 갇히다시피 한 뒤에도 어딘가 허전해 보였었다.

그런 미래의 모습을 알고 있어서인지, 그가 지금 이렇게 누군가와 검을 나누는 게 더 좋아 보이는지도 몰랐다.

“샬롯.”

그림자가 위로 드리우는 것에, 샬롯은 중저음의 목소리의 주인공을 이미 알고서 고개를 들었다.

부는 바람에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졌고, 그 사이로 그늘진 금안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작 오라버니.”

“우리도 한판 하지. 본선에선 끝을 못 봤으니까.”

샬롯은 아이작의 눈을 오래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에게 왜 묘지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그 역시도 샬롯이 그녀의 엄마 묘를 갑자기 찾아온 이유도, 그의 곁에서 잠든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뭔가, 정말 다정한 사촌 오빠가 생긴 기분이야.’

시시콜콜 모든 속내를 다 털어놓지 않아도 되는.

그래도 마음을 알아주는, 그런.

샬롯이 목검을 가볍게 늘어뜨린 채 한쪽에 자리 잡고 서자, 아이작도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검을 고쳐 쥐었다.

오늘 아침, 이곳으로 나온 뒤로도 줄곧 기운이 없어 보이던 아이작이었는데. 샬롯과 검을 맞대는 것만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히죽 웃어 보이곤 땅을 가볍게 박찼다.

* * *

카밀라는 창밖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녀의 대련장에는 아이작과 샬롯, 요제프 황자와 란슬롯이 짝을 지어 목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러슬과 비야키가 나무 그늘에 앉아 검을 손질하고 손 위에 천을 고쳐 감고 있었다.

그 풍경은, 참 묘했다.

카밀라도 그랬고, 로룸도 그랬고, 아이작도 그랬고…….

언젠가 이 가문을 짊어질 사명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라면서부터 천천히 주위 사람들을 제 아래에 둘 준비를 한다. 서서히 멀어지고, 서서히 그들을 도구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좋게 말하면 객관적이 되고, 나쁘게 말하면 사람이 차가워진다.

어쩔 수가 없었다.

세티야 가문은, 그냥 평범한 귀족 가문이 아니었으니까.

체이커라는 제국을 지탱하는 너무 거대한 기둥이니까.

실질적으로 이 나라 안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보호해 주는 방패이자 검이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형제나 자매들도 서로 가까워지더라도 그 경계가 있었다.

결국엔 모두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가문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조건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 분명, 저들 중에서 가주를 선발하겠다고 선포한 것도 그대로야.’

카밀라는 습관처럼 제 손에 쥔 찻잔을 톡톡 두들기다가 그 안에 듯 차를 한 입 홀짝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일뿐더러, 이런 광경을 보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가주인 카밀라가 나서서 모두를 한자리에 모은다고 한들, 이런 진풍경을 볼 수는 없을 거다.

그거야 당연했다.

일단 요제프 황자부터가 껄끄러운 사이였고, 아이작도 다른 이들과 겉핥기식으로는 어울리더라도 저렇게 웃으며 검을 섞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러슬과 비야키도 은근히 자존심이 센 아이들이어서 공적인 일이 아니고서야 한자리에 모아 놓기가 쉽지 않았다.

카밀라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연무장의 중심에 가까이 서서, 즐겁게 웃으며 검을 휘두르는 여자아이에게 가 닿았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치 춤이라도 추듯 목검을 움직이는 아이의 얼굴에는 그저 순수하게 대련을 즐기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이 모든 걸 이뤄 낸 건, 샬롯이겠지.’

그 점이 제일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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