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85)화 (85/123)

#85.

샬롯은 거의 잠에 다 빠져든 채로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안 되는데…… 아이작 오라버니랑 같이…… 돌아가고 싶은데…… 졸면…… 안 되는데…….”

아이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제 사촌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홉 살.

어리디어린 동생이었다.

정말 놀라운 실력을 보였고, 또 대회에서 우승했기에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제 한쪽 팔로 들어도 별다른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이였다.

“샬롯, 그냥 푹 자.”

아이작의 달래는 듯한 말에, 샬롯은 잠꼬대 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카밀라 할머니가…… 항상 꽃 갖다 놓는다는 것도…… 말해 줘야 하는데…….”

“……샬롯.”

“같이…… 돌아가기 전엔 안 잘 거야…….”

거의 완벽하게 잠들기 직전인데도, 샬롯은 잘도 입을 종알거렸다.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그는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생각하며 샬롯의 얼굴을 몇 번이고 내려다보았다.

카밀라가 군대를 몰고 와도 꿈쩍도 안 하고 앉아 있을 자신이 있었지만, 제 사촌 동생에겐 여러 가지 의미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샬롯을 망토로 잘 감싸 주며 그녀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내가 졌다. 내가 항복하마. 돌아갈게. 같이 돌아가자.”

“……정말이지…… 정말 같이 갈 거지…….”

“그래.”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는, 그제야 아주 안심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작의 무릎 위에 엎드려서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아이작은 어딘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로룸의 묘에 꽂혀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항상 누가 가져다 놓는 걸까 궁금은 했는데…….

‘카밀라 가주였나.’

솔직히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아이작은 제 얼굴을 손으로 짚었다.

아이 같은 감상일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알고 싶지 않았다.

카밀라 가주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효율 하나만을 위해서 제 아들을 전쟁터에 몇 번이고 내몬 사람이었다.

텔렌 제국과 애매한 국경 분쟁이야 오랜 세월 있었지만, 로룸이 죽을 당시에 있었던 국경 분쟁은 정말 꽤 지루하게 길게 이어졌었다.

텔렌 제국은 몇 해째 기근이 심하게 들었고, 전염병도 돌면서 새로운 땅과 자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었다.

로룸은 훌륭한 기사이자 유능한 지휘관이었지만, 텔렌의 공세는 끈질겼다.

전쟁통에 로룸은 화살을 맞아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카밀라 가주는 부상을 입은 로룸을 계속해서 전장의 선봉장으로 세웠다.

잔인하지 않은가.

제 아버지는,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좋아했다.

선봉장인 이상, 아무리 다쳤다 해도 몸을 뒤로 숨기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열 살이 막 되었던 자신에게 돌아온 아비의 차가운 시신의 모습을, 아이작은 아직도 눈앞에 그리듯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카밀라 가주는 로룸의 장례를 최고의 예우로 치렀지만, 장례식에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아이작은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이해조차 못 하는 어린 비야키와 울다가 지쳐 실신한 어머니 에밀리 사이에 앉아서 계속해서 생각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카밀라는 왜, 아들의 장례식에조차 참여하지 않은 건지.

어머니는 계속 말씀하셨다.

‘너희 할머니도 지독한 사람이야. 정말로 지독해. 실력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그놈의 실력 때문에 사람을 사지로 내몰고, 죽은 사람은 가치가 없으니까 와 보지도 않는 걸 봐.’

처음에는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사흘 동안 진행되는 긴 장례식 동안 결국 카밀라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은 걸 확인한 후에야 그는 어머니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그때부터 가주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 에밀리는 세티야 가 자체에 더 이상 정이 남아 있지 않다며, 아이작에게 함께 교외로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던 세티야 가의 이름이기에, 저는 그렇게 순순히 떠날 수가 없었다.

가주의 자리에 서서, 제 아버지에게 카밀라 가주가 한 짓이 얼마나 잔인했던 짓인지 그녀가 직접 깨닫게 해 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도 재능이 있었던 아이작이 그렇게 절치부심하여 덤비는데, 그를 당해 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카밀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을 갖추겠다는 생각이 어긋나지 않았는지, 그렇게 실력 제일주의인 카밀라는 아이작을 높이 샀다.

아이작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카밀라의 속내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던 거다.

이제 와서.

아이작은 손을 뻗어 눈앞에 장식된 꽃을 만졌다.

줄곧, 로룸의 묘에 올 때마다 이 길고 흰 꽃이 묘비 앞에 놓여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놓여 있는데도, 그사이 누구도 마주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도 때로는 바빴고, 복수심에 젖어 지내면서도 학업에 정신이 팔릴 때면 1~2주 정도 묘지를 찾지 못할 때도 많았다. 어떨 때는 한 달까지도.

하지만 이 꽃은, 언제 와도 매일매일 새 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야가 좁은 아이는 다른 묘비의 꽃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고, 다른 꽃들은 시든 채로 늘어져 있다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줄곧 묘지기가 가져다 놓는 거겠거니, 생각만 했었다.

샬롯이 아니었다면, 카밀라의 이름만 나와도 자리를 피해 버렸을 테니 이런 얘길 들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이작은 처음으로, 카밀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제 와서 속죄라도 하려는 건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제 아버지를 도구로 쓰고 버린 주제에, 왜 이런 짓은 8년이 다 되도록 매일같이 하는 건지.

아이작은 긴 한숨을 내쉬며 꽃 이파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호기심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관용을 낳는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곤, 샬롯이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고쳐 안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가로 돌아가는 그의 걸음은 아주 느릿했다.

* * *

다음 날 아침.

짹짹, 짹짹.

샬롯은 새소리를 들으며 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샬롯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스락.

치맛자락이 소리를 내는 것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드레스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샬롯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저도 모르게 혼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이작과 이야기를 하겠다고 야심만만하게 꽃다발까지 안고 갔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의 기억이 영 흐릿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 묘지에서 아이작에게 기댄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이작이 마지못해 저를 시종에게 맡겼을까?

“……누가 봐도 아홉 살 철부지 꼬마잖아. 민폐쟁이야.”

평소에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잘 먹고 잘 자려고 신경을 쓰고 있는데, 어제는 워낙 많은 사람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고, 군중들 사이에서 요란하게 주목까지 받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이러려고 간 게 아니었는데.’

샬롯은 그나마 앞코가 동그란 신발이 제 침대맡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며 쓰게 웃었다.

제가 워낙 예민하니까, 베티도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그만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베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응? 응.”

달칵, 문이 열리고 베티가 좀 곤란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왜? 무슨 일이 있어?”

베티가 들고 있는 은쟁반 위에는 수십 통의 편지가 쌓여 있었다.

이미 제 앞으로 초대장이 쏟아지게 많이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를 베티에서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까 또 감상이 달랐다.

“이게 다 초대장이야?”

“뭐, 팬레터도 있고요. 이거 말고도 더 있어요, 사실.”

“……팬레터?”

샬롯이 손을 뻗어 척 보기에도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편지들을 뒤적여 보는데, 베티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은쟁반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아침 수련을 함께하자고 전갈을 주신 분이 계셔요.”

샬롯은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칼그림자의 날이 지나서,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진 모양이다 싶었는데 잘됐다.

생각해 보니 오늘도 요제프가 세티야 가에 있는 데다, 이제는 딱히 요제프와 제 수련을 방해할 사람도 없을 테다.

샬롯이 신나서 벌떡 일어나자, 베티가 곤란한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 어느 쪽으로 가실 건데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요제프의 거처가 어딘지는 베티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이건 좀 이상한 질문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으려던 샬롯이 그대로 멈춘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되묻자, 베티가 뒤늦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아이작 님과 란슬롯 님과 요제프 황자님, 그리고 러슬 님과 비야키 님께서…… 다섯 분 다 전갈을 주셔서…….”

“진짜? 아이작 오라버니가 돌아왔어?”

“네. 아침 수련 중이실 거예요. 전갈도 제일 먼저 보내오셨고요.”

“다행이다.”

샬롯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아직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베티를 바라보았다.

“그건…… 잘됐는데……. 어…… 그러니까…….”

샬롯의 얼굴로 베티의 얼굴에 있던 난처함이 그대로 옮겨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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