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82)화 (82/123)

#82.

막상 요제프와 함께 무대 중앙에 자리 잡은 샬롯은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 발에 맞춰.”

“응.”

계속 반복해서 같은 동작을 추는, 아름다운 꽃송이를 형상화한 춤이었다.

사람들은 샬롯과 요제프가 나란히 서서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귀엽다며 여기저기서 부채로 입을 가리고 꺅꺅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한테 그냥 몸을 맡기고, 내 발을 정확히 반대로 흉내 내면 돼.”

“……어렵진 않겠네.”

요제프가 익숙하게 리드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훨씬 재밌었다.

마치 오르골 속에 있는 인형의 춤 같았다.

오른쪽으로 반 바퀴, 다시 오른쪽으로 반 바퀴. 요제프의 리드에 따라 발을 옮길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활짝 펼쳐지며 몸 주변을 맴도는 게 재밌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춤을 추는 데 몸이 익기 시작하자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도 재밌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호의적인 반응.

‘어머, 너무 귀여우신 것 아닌가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저, 사실 그 깃발도 샀다니까요? 뭔지 알죠?’

‘그럼요. 그 빨갛고 까만 그거죠? 사실 저희 딸도 사 왔더라고요. 어휴, 저 귀엽고 깜찍한 커플을 보고 어떻게 응원 안 해요?’

두 번째는, 우려 섞인 반응.

‘샤를로테 님과 요제프 님이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것도 좀 문제 아닌가요?’

‘리카르도 황자님께서 연회장에 아직 안 오신 것도 사람들이 모를 것 같다니까요.’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겠어요?’

‘솔직히 이러다 한번 큰일이 터지지 싶어요.’

샬롯은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이 소리 죽여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미소 지었다.

모든 시선이 다 저와 요제프를 향해 호의적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는 게 당연했다.

그냥, 샬롯은 요제프와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걸 똑바로 알아봐 주는 게 좋았다. 적의가 섞인 시선도 좋았고, 호의가 섞인 시선도 좋았다.

지난날 요제프를 처음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는, 그가 지나가는 것조차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꽤 흡족했다.

“어때, 재밌어?”

샬롯은 뒤늦게 정신을 퍼뜩 차리고 눈앞에 있는 까만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요제프는 어쩐지 조금쯤 고개를 올려 봐야 하는 곳에 얼굴이 있었다.

샬롯은 아름다운 요제프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 권해 줘서 고마워.”

“다행이다.”

“내가 재밌어해서?”

“그래. 앞으로, 종종 춰야 할 테니까.”

샬롯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종종?”

“황자의 약혼자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

샬롯은 수긍하는 말을 옅게 흘리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이 하늘색을 찾았다.

대회장 관중석에서 본 적 있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그녀의 연둣빛 눈이 연회장을 한 바퀴 빙 훑었다.

황제와 황후, 리카르도 황자는 아직 입장하지 않았기에 자리가 비어 있었고, 카밀라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벌써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아, 있다.’

샬롯은 문득, 자신이 춤을 추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발을 우뚝 멈춰 섰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수없이 많이 들어 보았던 ‘바다’를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옅은 하늘빛의 머리카락, 옅은 하늘빛의 투명한 눈 색, 거기에 잘 어울리는 흰 포말과 닮은 새하얀 레이스의 드레스.

묻지 않아도, 세 명의 호위 기사에게 둘러싸인 채로 서 있는 꼬마 아가씨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샬레스 황녀는 요제프와 동갑이었으니까…… 열두 살일까.’

하지만 결코 그렇게 어려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로테?”

요제프가 그녀를 부르고서야, 샬롯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행히도, 그녀가 멈춰 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곡이 완전히 끝나 버린 모양이었다. 무대 위에 있던 커플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 흩어지는 것을 보며, 샬롯은 요제프의 손을 잡아끌었다.

“요제프. 저쪽에 가 보자, 우리.”

“……어?”

“빨리.”

요제프는 샬롯이 재촉하는 말에 별다른 반항 없이 발을 떼었지만, 그답지 않게 그녀와 춘 첫 번째 춤에 미련이라도 남는 사람처럼 발걸음이 더뎠다.

샬롯은 부지런히 요제프를 데리고 테라스 쪽을 향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대회 우승자인 그들에게 따라붙는 시선도 많았거니와, 둘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샤를로테 님? 직접 뵈니까, 영광이네요.”

“우리 아이가 샤를로테 님과 잘 지낸다고 하던데. 언제 한번 놀러 와요.”

“우리 아기와 악수 좀 해 줄래요?”

말을 걸어오는 사람 중에는 의외로 또래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또래 중에는 샬롯과 사이가 좋았던 아이들이 없었고, 그간 샬롯을 괴롭혔던 아이들뿐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샬롯에게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모르겠는지 멀찍이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저들끼리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말을 걸어오는 이들은 아예 그렇게까지 친분도, 악연도 없던 사람들뿐이었는데, 그들도 그냥 호감 섞인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보통 누가 갑자기 잘되면, 그동안 그 사람에게 잘해 주었던 사람들이 뭔가를 부탁해 오게 마련이잖아? 그런데 요제프와 난 그런 건 별로 없네.’

그야 당연했다.

그간 우리에게 잘해 줬던 사람이 없으니까.

샬롯은 쓰게 웃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어머, 저게 누구야?”

“세레스 국의 황녀님 같은데?”

“세상에, 우리의 우방국이라곤 해도 황녀님이 직접 방문하신 건 처음 아냐?”

샬롯은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지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양쪽으로 갈라선 사람들 사이로, 그녀가 찾아 헤매던 인물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서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샬레스 황녀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나이답지 않게 성숙해 보였고, 길게 풀어 내린 하늘색 머리카락이 참 고왔다.

샬레스 황녀는 모두의 시선 속에서도 당당하게 요제프 황자에게 다가가 섰다.

“요제프 황자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서 왔어. 따로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황자, 당신만.”

도도한 샬레스 황녀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차가운 요제프 황자의 얼굴과 어딘가 닮아 보였고 정말 잘 어울려 보였다.

샬롯은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지 그다음 내용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역시…… 벌써 반한 거야.’

샬레스 황녀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요제프 황자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 등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샬롯은 여기가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요제프의 손 안에서 제 손을 빼내려고 바르작거렸지만, 그는 오히려 가볍게 잡고 있던 손을 꽉 깍지 끼어 고쳐 잡았다.

“……요제프, 얼른 따라가.”

샬롯이 다시 한번 이름까지 속삭이면서 눈치를 줬지만, 평소에는 퍽 좋던 그 귀가 오늘만은 고장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요제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손을 풀려고 애를 쓰던 샬롯이 꿈쩍도 않는 요제프에 어쩔 수 없이 손에 힘을 빼는데, 샬레스 황녀가 제 뒤를 따라오지 않는 요제프 황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얘기야.”

“나한테만 하는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샬롯이 좀 당황해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샬레스 황녀가 좀 귀찮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로테는 내 약혼자다. 굳이 떨어져 가며 들을 이야기라면, 안 듣는 게 낫겠다는 거지.”

“뭐, 귀족과 황족의 약혼이라는 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 말에 요제프가 샬롯만 바라보던 눈동자를 느리게 움직여 샬레스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심드렁한 어조로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는 거 보면 중요한 볼일은 아닌가 본데, 그럼 서로 갈 길 가지.”

샬레스 황녀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성질이 급하네, 요제프 황자.”

요제프도 썩 탐탁잖다는 듯 인상을 그었다.

“성격이 퍽 느긋하군, 샬레스 황녀.”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목소리에는, 솔직히 호감보다는 짜증과 적의가 가득했다.

‘……이게 뭐야?’

달달한 상황을 기대하고 있던 샬롯은 당황했다.

분명 소설 속에서 요제프 황자를 만난 샬레스 황녀의 첫 대사는,

“당신을 내 것으로 하고 싶어.”

였는데.

샬롯이 그 명대사를 못 본다는 안타까움에 그 대사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샬레스 황녀와 요제프 황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샬롯은 그제야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선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샬레스 황녀는 샬롯을 한참 동안 빤히 들여다보고선, 매서운 눈가를 허물었다.

“그러고 보니, 공동 우승자였지. 샤를로테라고 했던가. 정말 감명 깊은 대회였다. 특히, 나이트메어를 길들이는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

“……그게, 감사합니다.”

요제프에겐 반말을 쓰는데, 샬레스에겐 존대를 하자니 어딘가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샬롯이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샬레스 황녀가 요제프 황자를 대할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한 번 쓱 훑어보았다.

그러곤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데 방금 네가 했던 말, 있잖아.”

“……어, 어떤 말……?”

“당신을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거.”

‘역시 들었잖아.’

샬롯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샬레스 황녀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그거, 내가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하려고 생각해 둔 말이었는데…… 그걸 남의 입에서 들을 줄이야. 너무 재밌는데…… 우리, 너무 잘 통하는 거 같지 않아?”

샬롯은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뭔가가 단단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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