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81)화 (81/123)

#81.

황궁 앞에서부터 시가를 향해 기나긴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퍼레이드에는 우승자뿐만 아니라 12강 이상까지 살아남았던 참가자들도 얼굴을 비쳤다.

갑자기 홀연히 사라진 아이작을 제외한 열한 명의 출전자들은 각기 열한 필의 말이 이끄는 거대한 마차 위에 올라서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요제프 황자님, 만세!”

“샤를로테 세티야 님, 만세!”

“작인 거인, 만세!”

“잘생겼어요-! 예뻐요-!”

“너무 귀여워요-!”

요제프와 샤를로테가 함께 오른 우승자의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그들을 상징하는 검고 붉은 색종이 가루가 나부꼈고 귀가 먹먹할 정도의 환호가 뒤따랐다.

샬롯은 흐뭇한 표정으로 환호의 중심에 선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오늘 둘이 나란히 쓴 우승자를 상징하는 얇은 금관도, 군중의 환호도 모두 그에게 제 옷을 입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12강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퍼레이드에는 얼굴조차 비치지 못한 리카르도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정말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

샬롯은 흐뭇한 얼굴로 요제프의 손을 들어 올려 대중들의 환호에 화답하며 손을 힘껏 흔들어 주다가, 문득 시선을 돌려 다른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비야키와 러슬은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퍼레이드 행렬에 탑승해 있었다. 그리고 란슬롯은…….

‘……아까부터 무슨 시선이 느껴진다 했지만, 란슬롯일 줄이야.’

샬롯은 지나치게 승부욕이 느껴지는 란슬롯의 눈동자를 마주하곤, 조금 웃음이 나와서 방긋 웃어 주었다.

사람을 무시할 때는 끝 간 데 없이 무시하더니, 어쩌다가 그가 숨어 살던 작은 알이 한 번에 탁 깨어진 모양이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제가 선 위치가 어디인지 모를 때가.

남이 나서서 그 우쭐한 마음에 돌을 던져 줘야, 비로소 제 발아래가 보일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호전적인 사람이 될 필요가 있냐 싶긴 하지만.’

그래도, 보기 좋았다.

남을 무시할 줄만 알던 란슬롯보다.

‘그리고…….’

샬롯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자리는, 텅 비어 있는 비야키의 옆자리였다.

원래 아이작이 있어야 하는 자리.

그녀는 입술을 살짝 말아 씹었다.

가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 온 아이작이니만큼, 반드시 돌아올 테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퍼레이드 행렬이 끝나도, 군중들의 열기는 쉽사리 식지 않았다.

샬롯은 어딘가 먹먹한 기분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베티와 다른 시녀들이 황궁 안에 있는 별실에서 그녀를 순식간에 드레스 차림으로 변신시켜 주었다.

새하얀 레이스가 바닥까지 끌리고, 목부터 허리까지는 붉은색으로 만들어진 어깨가 봉긋한 드레스에다 양 갈래머리에 붉은 리본까지 단 샬롯은 꼭 설탕공예로 빚은 것처럼 귀여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워낙 소란의 중심에 있다 끌려온 샬롯은 시녀들이 그녀를 귀엽다고 극찬하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직도 환호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었다.

“즐거우셨나 봐요?”

“응?”

베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모처럼의 황궁 나들이에 제법 힘을 준 옷차림의 베티가 살포시 웃었다.

“즐거워 보이세요.”

샬롯은 부정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심장이 빠르게 뛸 만큼 즐거웠다.

요제프의 이름이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요제프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불안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었다.

“응. 정말 즐거웠어.”

“다행이에요. 이번 연회도 즐거우셔야 할 텐데.”

“……일정이 오늘은 이게 끝이지?”

베티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가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되도록 할게요. 샬롯 아가씨 앞으로 쌓여 있는 초대장이 산더미처럼 있지만, 그건 당장 답장하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또 가출하시면 큰일이니까…… 일정을 열심히 조율해 볼게요.”

베티는 제가 말하고도 일정을 조율한다는 말이 웃겼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샬롯은 베티가 왜 웃는지 알 것 같아서, 머리를 묶어 주는 그녀를 보다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왜 웃는지 모르는 눈치의 시녀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이는 게 어쩐지 더 웃겨서, 둘은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아서, 제발 놀아 달라고 사정하던 게 샬롯의 일상이었는데…… 일정이 너무 많아서 조율한다고 하니까 웃음이 나올 수밖에.’

샬롯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선 몸을 일으켜 베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베티도 그제야 간신히 진정하고선 샬롯의 머리를 예쁘게 마무리해 주었다.

“자자, 이제 완벽해요. 요제프 님께 보이셔도 된답니다.”

샬롯은 눈을 깜박였다.

“요제프에게 굳이 예쁘게 보여야 해?”

“네? 그럼요. 요제프 황자님도 가장 곱고 귀여운 모습으로 단장해서 나타나실걸요?”

“응? 왜?”

“두 분이 서로 많이 좋아하시니까요……? 아니에요?”

베티의 의아한 얼굴을 보고서야, 샬롯은 제가 왜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샬레스 황녀의 이름을 들은 뒤로, 뭔가 나 혼자 선을 긋게 되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막상 뭔가 웃긴 것 같았다.

“어? 아니, 좋아하는데…… 막 서로 예쁘게 꾸며서 잘 보일 필요가 있는 사이는 아니야!”

샬롯이 일부러 딱 부러지게 대답하자 베티는 다시 웃음이 터지려 하는지,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요, 그럼요. 요제프 님께선 외모뿐만 아니라 샬롯 님의 모든 면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러면.”

그런 뜻으로 하려던 말은 아니었다.

샬롯은 묘한 기분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 * *

“우리 동생님, 너무 귀여운데?”

샬롯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흰 슈트로 멋지게 차려입은 러슬이 그녀를 맞았다.

“그러게. 이렇게 봐서는, 그 대단한 무위는 상상도 못 하게 깜찍하네.”

샬롯은 의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푸른 정장을 입은 비야키가 웃으며 샬롯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야키는 물에 물 탄 듯 대회 이후부터 샬롯에게 썩 친근하게 굴었다.

그렇게 사람을 비꼬고 무시해 대더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뭐…… 이게 비야키 오라버니다운 것 같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워낙 행동거지가 가벼운 이였기 때문에 그런지 오히려 그 뒤끝 없는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검을 한 번 부딪혀 본 뒤, 곧장 인정할 줄 아는 비야키의 태도를 높이 사기로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이죠? 감사히 받을게요.”

샬롯이 빙긋 웃으며 치맛자락을 쥐어 보이는데, 불쑥 옆으로 흰 장갑을 낀 손 하나가 끼어들었다.

“로테, 왔네.”

덤덤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샬롯과 세트로 맞춘 듯한 흰색 정장에 붉은색 베스트를 입은 요제프가 거기 서 있었다. 정말로 의도를 가지고 맞춘 듯, 샬롯의 머리끈과 꼭 같은 붉은 끈을 목깃 사이에 묶고 있었는데 그게 그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요제프의 머리를 와르르 쓰다듬었다.

깃털같이 보드라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는 것은 제법 기분이 좋았다.

‘이거 봐, 아직 이렇게 어린 동생이잖아. 귀엽다니까.’

샬롯이 만족한 듯 빙긋 웃자, 요제프가 샬롯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그녀에게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한 곡 하자.”

샬롯은 좀 놀라서 요제프를 바라봤다.

딴단. 딴단. 따따따.

의식하고 보니 제법 우아한 음악이 흐르고 있긴 했지만, 샬롯은 그런 것에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여자와 남자가 한 쌍이 되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춤을 추고 있는 광경만 봐도…… 뭔가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에, 뭔가 거기에 제가 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정말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공간 같달까.

“……난 춤은 자신 없는데?”

샬롯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는데, 요제프가 샬롯의 손을 얼른 쥐어 제 손 위에 올려 잡았다.

“그럼 대련이라고 생각해.”

“……어?”

“한 수, 가르쳐 줄게.”

부드러운 현악기 소리에 맞춰 긴 꽁지깃이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과 꽃송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이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다가, 대련이라는 말을 들으니 긴장감이 확 사라졌다.

샬롯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요제프의 손을 잡았다.

“그저 대련 생각밖에 없지? 좋아.”

러슬과 비야키가 좀 불만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첫 곡은 오라버니랑 춰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잘생긴 사촌 오빠도 잘 없다, 샬롯. 잘 생각해.”

하지만 샬롯은 요제프의 손을 흔들어 보이며 둘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윙크를 해 주었다.

모처럼 차려입은 러슬과 비야키는, 매일 무복만 입고 있던 모습에 비해서 정말 귀티가 났다. 말 그대로 귀공자라는 호칭이 어울릴 정도로.

그런 둘을 몰래몰래 바라보고 있는 레이디들의 시선은 제법 뜨거웠다.

샬롯은 연회장의 분위기를 한 번 훑어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두 오라버니도 연애나 좀 해야 할 텐데. 나 말고 다른 곳도 좀 보라고.’

샬롯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게 주제넘은 생각을 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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