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요제프가 가족이 되어 주겠다며 제게 고백을 할 때는 정말로 기꺼웠고, 반가웠고…… 그리고 너무나 고마웠다. 요제프의 다정함에 눈물이 쏟아져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 청혼을 받으면서도 요제프와 제가 미래에 정말로 무슨 부부가 될 거라는 생각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정말 가족같이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맹세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샬레스 황녀와 잘될 운명이니까.’
하지만 역시 제 손이 올라간 심장 부근이 어딘가 허전해지는 감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 저와 이렇게까지 친하고, 너무 소중한 동생이자 친구이자 가족인 존재인데……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게 된다면 조금 아쉬울 것 같기도 한 거다.
‘하지만 뭐, 지금의 요제프는 열두 살이잖아. 고작.’
결혼까진 그래도 시간이 조금 남지 않았을까?
지금 당장 생각할 문제는 아닐지도 몰랐다.
‘그런데 샬레스 황녀가 체이커 국을 정벌해서, 요제프의 마음을 얻는 스토리였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샬롯은 혼자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일이 제 마음대로 될 수야 없겠지만, 정말로 만약에 요제프가 바로 황태자가 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 다음 체이커 제국을 태평성대로 이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래서 체이커 제국이 원작대로 민생이 파탄 나지도, 국기가 문란해지지도 않고, 지금 이대로 잘 유지된다면…….
‘그럼 세레스 제국도 체이커를 그렇게 쉽게 삼키지는 못할 텐데.’
그때, 이야기를 끝낸 듯한 카밀라와 요제프가 샬롯이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샬롯이 그 조그마한 머릿속에서 두 대제국의 미래를 점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틀림없는 카밀라가 인자한 얼굴로 제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제프도 담담한 시선으로 샬롯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샬롯은 언제 봐도 청량하고 아름다운, 저의 천사 같은 친구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심장께를 짚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황녀와 황자의 결혼이 두 나라의 결속을 다지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 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땐 아쉬워하지 말고 축복해 줘야지.’
샬롯은 제 속에 있는 어리광을 털어 내며 애써 입꼬리를 당겨 올려 미소 지었다.
* * *
요제프와 샬롯은, 퍼레이드 행렬이 시작되는 황궁 앞까지 세티야 가의 마차로 이동했다.
그동안에 요제프는 줄곧 잠자코 있는 샬롯을 몇 번이나 돌아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네.”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뭘?”
“궁금한 얼굴인데.”
“내가? 아아…… 가주님이랑 네가 이야기한 거?”
“응.”
샬롯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요제프를 바라봤다.
요제프는, 사람 속내를 귀신같이 잘 읽어 낼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편은 절대 아니었다.
샬롯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는데?”
요제프가 부드러운 눈으로 샬롯을 응시하며 말했다.
“카밀라 공작에게, 나를 다시 봐 달라고 얘기했어?”
샬롯은 잠깐 망설였지만, 요제프가 그런 거로 자존심이 상해할 속 좁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사실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테.”
“어?”
“앞으론 로테라고 부를게. 남들이 다 부르는 것처럼 부르고 싶지는 않아서.”
“……어?”
앞뒤 없이 훅 튀어나온 대화에, 샬롯은 좀 당황했지만, 요제프가 저를 부르는 애칭이 따로 있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좋아. 그런데 왜?”
“가족이 된다는 건,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거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 카밀라 공작이 널 아끼는구나 싶었으니까.”
샬롯은 그 말에 조금 놀라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요제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카밀라가 저에 대해 뭔가 나쁘지 않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간지러우면서도, 속이 좀 불편했다.
어제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다.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겨서 바라보는 요제프는, 어딘가 외로워 보였으니까.
마치 직전까지의 제 모습처럼 보였으니까.
대회에서 우승한 뒤에도 직접 찾아와 안아 주는 이 하나 없는 그 외로움을, 그녀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샬롯은 저도 모르게 요제프를 당겨서 끌어안았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텐데도, 요제프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조금 커 버렸는지, 앉은 채로도 요제프는 그렇게까지 샬롯의 품속에 폭 안길 만큼 조그맣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샬롯은 제 양팔의 길이가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벌려 요제프를 안았다.
요제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두 팔을 내리고 안긴 채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팔을 올려 샬롯을 마주 안았다.
샬롯은 따뜻한 요제프의 체온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그녀 자신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이,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단단한 지지대라면 요제프에겐 그게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젠가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요제프의 가족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속내에 아쉬움이 짙게 번져 나갔지만 샬롯은 그런 생각을 떨쳐 내며 입을 열었다.
“요제프.”
“응.”
“얼마든지, 날 로테라고 불러도 좋아.”
“응.”
“그리고, 얼마든지 날 찾아와도 좋고.”
“응.”
“내가 열 명분의 가족이 될게. 나만 믿어.”
“믿어.”
꼭 안고 있는데도, 샬롯은 요제프가 웃고 있다는 것을 말에서 느껴지는 기색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얼마나 그 미소가 눈부실지도 알 수 있었다.
샬롯은 한참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사이가 되어도, 우린 계속 가족일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할게.”
요제프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평소처럼 빨리 대답을 하는 대신 샬롯의 품에서 슬쩍 빠져나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샬롯은 어쩐지 속내를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으로 그의 시선을 무마했다.
요제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샬롯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로테.”
“응.”
“아까 하던 이야기지만, 카밀라 가주와 이야기한 뒤에 문득 궁금했던 게 있어서.”
“응? 뭔데?”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조금 뜻밖의 질문이라서, 샬롯은 그녀답지 않게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소설의 플롯을 그렇게 여러 번 들여다보면서도, 샬롯은 어떻게 잘 생존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워낙, 지난 삶이 허망하게 끝이 나 버렸으니까.
눈앞에 있는 수많은 난관들을 헤쳐 나가서, 이번의 삶은 꺾이지 않고 계속 잘 이어 나가 봐야지 싶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걸 떠올려 본 적조차 없었다.
그냥 강해져야지, 지난 삶보다는 좀 더 여유 있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뿐이었지…….
‘뭐가 되고 싶냐니…….’
샬롯이 고민에 잠겨서 양 갈래로 올려 묶은 제 머리카락을 다 흩트려 놓을 듯 손을 들어 올리자, 요제프가 그녀의 두 손을 마주 꼭 쥐곤 끌어당겨 내렸다.
“아깝잖아.”
“……어? 아…… 응.”
“갑자기 고민하게 만든 것 같군. 그냥, 난…… 네가 내 삶이 아니라, 네 삶의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서 해 본 말이다.”
“……어?”
“네가 내게 해 주는 모든 게 너무 고마운데, 그리고 그것들에 이제 의문을 품지도 않는데, 그냥. 넌 아무것도 되지 않기엔 지나치게 큰 그릇이니까.”
“……내가?”
“응. 난, 네가 만약 공작이 된다면 그것도 어울린다고 생각해.”
덜컹.
그 순간, 크게 출렁인 것이 마차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심장인지, 샬롯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단 한 번도 엄두를 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공작이라고? 내가?’
“난…… 고작 아홉 살이고…….”
샬롯이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는데, 요제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맞받아쳤다.
“카밀라 가주는, 정정하더군. 네가 서른이 되어도 한창 현역이겠다 싶던걸.”
“……그게 무슨…….”
샬롯은 뭐라 대꾸할 말을 잃고 그냥 작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요제프가 농담을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웃겼고, 진지하게 카밀라의 권력을 그녀가 이양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너무 웃겼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요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요제프의 시선 때문에.
“강요하는 건 아니야. 내가 강요할 일도 아니지. 그냥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카밀라에게, 네 미래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했기에. 그게 아쉬워서.”
요제프는 제 할 말을 마친 듯, 샬롯의 한 손을 쥔 채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샬롯은 요제프와 제 사이에 놓인 깍지 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갑작스런 소나기가 내리던 날의 그와 자신 같았다.
‘아쉽다니…….’
그날도 요제프는 그런 말을 했었다.
‘누가 널 싫어하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지 않았어?’
‘……어?’
‘그런데 왜 그렇게 미움받기 싫은 아이처럼 구냔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언제 그러냐고? 네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잘도 물어보는군. 그 멍청이 같은 놈들에게 무시당하고, 말도 안 되는 별명까지 이고 사는 동안에 제 자리를 전부 다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요제프는 그때도, 샬롯에게 왜 그렇게 웅크리고 사느냐고 했다.
왜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냐고 했다.
미움받기 싫어하지 말라고, 그만은 절대적인 그녀의 편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없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내 편. 그건 말로 설득해서 믿게 만들 수 없으니까. 내가 보여 주면 되잖아. 네게 그게 있다는 걸. 시간이 흐르면 믿도록, 직접 보여 주지.’
그리고 그 말을, 정말로 믿도록 만들어 주었다.
샬롯은 제 손가락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요제프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요제프가 자꾸 부쩍 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