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77)화 (77/123)

#77.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대비해, 옥상의 창문은 전부 다 열리지도 않는 구조였다. 하지만 워낙 아이의 몸이라는 게 조그마했기 때문에 샬롯은 수월하게 그 틈으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아, 아가씨!”

“아가씨!”

“아악! 어쩜 좋아!”

동시에 여럿의 비명이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샬롯은 다락방 바로 아래층의 창문에 훌쩍 매달렸다가 다시 한 층을 뛰어내렸다.

화분을 여러 개 키우고 있는 테라스를 밟고 이동한 그녀는 순식간에 거대하게 솟은 정원수를 타고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샬롯이 땅에 제대로 발을 디디기만을 고대하며 창문으로 아가씨를 지켜보던 베티는, 제 아가씨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세상에.”

뿌뿌- 뿌뿌뿌뿌-.

샬롯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고적대가 나팔 연습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베티는 머리를 짚었다.

큰일도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었다.

* * *

톡.

톡톡.

요제프 황자는 창문 쪽에서 들리는 묘한 소리에 얼른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곱게 꾸민 샤를로테가 손에 작은 돌 조각을 잔뜩 움켜쥐고 그가 서 있는 쪽 창문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 퍼레이드 때문에 차려입은 건지, 새하얀 타이츠에 허벅지를 동그랗게 부풀린 옷을 입은 샬롯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긴 머리카락을 양 갈래 해서 새하얀 꽃송이를 잔뜩 꽂아 넣은 모습이 무척이나 풋풋하고 귀여웠다.

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는 건 샬롯이었지만, 요제프는 마치 눈이 부시다는 듯 까만 눈을 가늘게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데리러 왔네. 난, 마차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샬롯은 느긋하게 중얼거리는 요제프를 올려다보며 빨리 내려오라는 듯 손을 급하게 흔들어 보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려와.”

“……퍼레이드는 오후에서나 시작이야.”

“알아!”

샬롯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요제프는 뭔가 웃긴 게 있기라도 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닫았다.

샬롯은 요제프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시간을 계산하며, 계속 주위를 살폈다.

제롬이나 러슬은 그렇다 치고, 카밀라가 쫓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섬찟했으니까.

* * *

어제, 칼그림자의 날이 끝난 직후부터 온 비브로슈의 안이 들썩였다.

전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들의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박대받아 온 약자들의 반란이었기 때문에, 그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고작 하룻밤 만에 귀족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정치 지형의 변동이 있었다.

부동층이라는 게 거의 없이, 대부분 2황자의 지지 세력으로 굳어 있던 귀족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롭게 지지할 수도 있는 다른 상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버린 거다.

그것도 세티야 가의 막내딸과 약혼을 하고,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의 실력도 판단력도 있는 데다 리카르도 황자를 일곱 번이나 봐줄 만큼의 포용력까지 있는.

세티야 가 앞으로도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의 서신이 벌써 날아들었고, 또 발 빠른 자들끼리 모여 밤새도록 술을 기울이며 회동을 해 댈 정도였다.

당연히 날이 바뀐 오늘은 더욱더 비브로슈 안이 시끄러울 정도로 들썩였다.

어딜 가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변화를 이뤄 낸 주역 둘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둘이 도망칠 만한 곳은 달리 없었기 때문에, 샬롯은 세티야 가 사냥터 가운데에 놓인 큰 풀밭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요제프는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그런 샬럿에게 다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요제프도 이미 퍼레이드에 참석할 차림으로 꾸민 뒤였다. 끈으로 가슴께를 여미는 흰 튜닉에 금색 자수가 박힌 붉고 검은 조끼를 걸쳤고 아래에는 흰 타이츠에 무릎까지 오는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분홍빛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올린 샬롯은 오늘따라 더 인형같이 보였고, 단정하게 까만 머리를 정돈한 요제프도 오늘따라 더 아름다운 외모가 태가 났다.

그런 둘이 나란히 나무 아래에 자리한 모습은 정말이지 한 폭의 동화 속 장면 같았다.

꼬르륵.

하지만 멀리서 보아서 아름다운 것도, 가까이에서 보면 현실에 불과하기 마련이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샬롯은 제 배에서 들리는 소리에 조금 놀라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먼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와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다.

“배고파?”

“넌?”

“소리 못 들었어?”

“들었지만, 못 들은 척해야 하는 게 사회적 관습인 것 같아서.”

요제프가 저를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샬롯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웃겨, 너.”

“……뭐가.”

“다 큰 어른처럼 말하잖아. 고작, 아하하. 고작 열두 살이면서. 까르르.”

“……그래. 그런 거로 해. 배고프다며, 뭔가 먹으러 갈까?”

“나가면, 틀림없이 잡힐 텐데. 아아…… 그러긴 싫어. 역시, 너랑 같이 이러고만 있고 싶단 말이야.”

샬롯은 투정 부리듯 양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린 다음 요제프의 무릎 위에 젖은 수건처럼 늘어졌다.

배가 고픈 것 따위 아무 상관 없을 정도로 모처럼 요제프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대회가 끝난 뒤의 후련함을 즐기는 이 시간이.

요제프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나뭇잎이 조각내 놓은 햇살을 받고 있자니, 도무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같은 대회라는 큰 사건을 겪고 난 뒤라서 그런지, 아니면 화관을 받으며 들었던 그 청혼 때문인지…… 요제프가 한결 더 친근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 돌아가면 마음에도 없는 행사에 얼굴을 비치며 시달려야 할 텐데, 그 모든 일을 나 몰라라 하고 도망쳐 나온 것 때문에 이 시간이 더 소중할지도 몰랐다.

“요제프, 기분이 어때?”

그녀는 허기를 달래는 대신, 이 시간을 조금 더 늘리기로 마음먹곤 문득 물음을 던졌다.

요제프가 샬롯의 질문의 취지를 살피려는 듯 그녀의 풀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샬롯은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게 되었다. 워낙 맑고 투명한 까만색인 데다, 요제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저를 줄곧 보곤 했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그의 눈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기분……이라.”

그녀는 그의 눈 속에 있는 저를 더 자세히 보려고 요제프의 목을 끌어당겼다. 요제프가 반항 없이 그녀의 손에 순순히 끌려와 고개를 숙였고, 그 바람에 그의 부드러운 까만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아, 그림자가 지니까 잘 안 보이네.’

살짝이라도 후, 하고 불면 숨결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야 샬롯은 아쉬움을 느끼며 그를 당기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코와 코가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요제프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좋아. 기분이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좋아.”

요제프의 붉은 입술이 속살거리듯 움직였다.

샬롯은 요제프의 숨결이 닿는 듯한 느낌이 간지러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요제프는 그녀가 미소를 짓는 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더니, 샬롯이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얼굴을 슬쩍 아래로 숙였다.

샬롯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는 사이에, 요제프가 그녀의 이마에 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보드랍게 입 끝에 스치는 촉감은, 마치 꽃송이로 이마를 톡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같았다.

샬롯은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제프가 몸을 천천히 다시 일으키더니, 샬롯을 바라봤다.

“넌?”

그녀는 손끝을 뻗어 제 이마를 더듬으며 멍하니 웅얼거렸다.

“……뭐? 나? 어?”

“기분 말이야. 넌 어떠냐고.”

샬롯이 눈을 몇 번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는 요제프의 목을 당겨 내린 건 자신이었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실수였을까?’

아니, 하지만…… 샬롯도, 요제프도 제 신체를 잘 다루는 것으로 바로 어제 대회에서 우승한 참이 아니던가.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뭐, 딱히 가족이 없으니 누군가와 볼 뽀뽀니 뭐니 하는 것을 할 일이야 없었지만…… 이론상으론 알았다. 보기도 많이 봤고.

샬롯은 잠깐 생각을 해 보았지만, 역시 모르겠다 싶어 생각을 그만두었다.

뭐, 그렇게 깊은 의미를 부여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형식적이나마 약혼도 했고 하니까, 그런 장난이 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샬롯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분은…… 뭐, 괜찮은데? 아무튼, 아침에 줄자를 들고 들이닥쳐서 사람을 들들 볶아 대던 사람들에게서 좀 해방되어 있으니까 살 것 같아.”

요제프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깜박, 깜박, 깜박.

샬롯은 그의 아름다운 까만 눈동자가 사라졌다 드러나는 것을 즐겁게 바라봤지만, 요제프는 뭐가 불만인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곤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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