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76)화 (76/123)

#76.

샬롯이 눈을 깜박이며 베티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저게 다…… 내 옷인 건 알겠는데…….”

“오늘부터 각종 행사에 다 참여하셔야 하잖아요. 세티야 가의 이름을 걸고 참여하시는 건데, 대충 꾸며서 나가실 수는 없죠.”

“그건 그렇지?”

“무술 대회 우승자라는 명목이니까, 드레스보다는 편한 바지 차림의 예복으로 많이 준비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준비한 거야? 고작 하룻밤 지났을 뿐인데.”

베티가 어깨를 으쓱했다.

“카밀라 님께서 분부하시면, 하룻밤 새 의복이 생겨나는 거야 일도 아니죠.”

그거야 그렇지만.

샬롯은 나란히 걸려 있는 의례복들을 바라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무엇 하나 간단히 만들어진 옷이 없었다. 세티야 가문의 상징인 포효하는 황곰이 옷마다 자수로 새겨져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주 작은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거나, 심지어는 화관의 디자인에 맞춘 듯 국화인 에버폴과 꼭 닮은 조화를 옷감에 그려 넣은 드레스도 있었다.

‘저걸 밤새 만들어 냈다는 건, 잠은 아예 포기했다는 건데…… 게다가 수십 명의 직공이 동원되었으려나.’

저도 모르게, 옷을 입는 처지보다는 만드는 처지에 이입하게 되는 건 거의 습관이었다.

샬롯은 그제야 벽에 나란히 붙어 서 있는 재봉사들의 얼굴이 지독히 피곤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피곤해 보인다 뿐이지, 어쩐지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에 무슨 광기가 보이는 것 같은데.’

카밀라가 돈을 넉넉히 쳐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베티가 그녀를 재촉해 일으켜 세웠고, 재봉사들과 시녀들이 그녀의 옷 가봉을 도왔다.

첫 번째로 입을 옷은, 당장 오늘 퍼레이드에서 입어야 하는 의복인 모양이었다.

시녀가 상·하의로 나뉜 옷을 챙겨 들고 먼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고, 샬롯이 그 뒤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재봉사 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저, 샤, 샤를로테 님.”

“네?”

샬롯이 평소와 다름없게 되묻자, 그 재봉사는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다 구겨 놓으며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와락 쏟아 내었다.

“샤, 샤를로테 님의 무위를 어제 지켜본 뒤에…… 이렇게 살아 있는 전설이자 작은 거인! 샤를로테 님의 의상을 제가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너무 영광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게 그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영광스러우며, 반드시 샤를로테 님을 누구보다 돋보일 수 있도록 책임지겠습니다!”

처음에는 작디작은 목소리로 시작했던 말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커져서 끝에는 거의 외침이 되어 있었다.

샬롯이 좀 어안이 벙벙해서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서 있는 사이에, 그 옆에 있던 다른 재봉사들도 앞다투어 말을 꺼냈다.

“저, 저도.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비즈를 달았습니다. 수습생 시절 이후로, 제가 직접 바늘을 잡은 건 처음입니다. 샤를로테 님께서 주인공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도록……!”

“저도 이렇게 직접 뵈어 너무 영광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워낙 다들 열성적으로 얘기를 쏟아 내니까, 샬롯은 그사이에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보통은 재봉사 한 명이 여러 벌의 옷을 만들어 오는 것일 텐데. 이렇게 여러 명의 재봉사들을 한꺼번에 불러다 놔도 괜찮은 건가.’

하지만 분명히 책 속에서는 유명한 레이디의 옷을 만들기 위해 서로 간택받으려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으로만 나오던 재봉사들은, 이 순간 그녀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며 마치 하나의 목표 아래에 뭉친 동료처럼 사이좋게만 보였다.

샬롯은 드레스 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뭐라고 대답할지를 고민만 하다가, 결국 조금 창피함을 감수하고 작게 대답을 중얼거렸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별것도 아닌 대답이었는데, 그 말 하나에 재봉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순간의 영광을 공유하는 눈치였다.

샬롯은 어쩐지 대회 날보다 우승한 다음 날이 더 창피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후다닥 드레스 룸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당혹스러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간신히 그 많은 옷의 가봉을 모두 마친 다음에는, 네 명의 시녀가 달라붙어서 샬롯을 치장해 주는 또 다른 종류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베티가 그녀를 꾸며 줄 때는 그냥 차근차근히 머리를 만지고, 옷과 장신구를 골라 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딘가 열의가 남다른 네 명의 시녀들은 무엇 하나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샤를로테 님의 머리는 최근 유행하는 대로, 머리를 하나로 묶고 이마 장식 끈을 둘러요!”

“샤를로테 님의 이 고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세요. 컬을 살려서 푸는 게 최고예요!”

“이렇게 귀여우신걸요? 양 갈래로 올려 묶어서 귀여움을 드러내는 게 좋겠어요.”

“전 반대예요. 영웅의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뭔가 하나를 결정해야 할 때마다 이런 토론을 들어야 했다.

샬롯은 머리를 묶을 때부터 이미 좀 기가 질려서 모두 그만두고 다 나가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베티도 신이 나서 열을 올리며 그 토론에 참전하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간신히 머리를 양 갈래로 올려 묶기로 하고 나자, 그다음은 옷차림과 장신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거기다 도대체 어디서 긁어모은 건지 값비싼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다 이 자리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녀들은 처음에는 샬롯의 의견을 물었지만, 패각으로 만든 목걸이니 유니콘의 깃털로 만든 어깨 장식 깃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샬롯은 마땅한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시녀들은 ‘글쎄…… 비싸 보이네.’라는 말만 반복하는 샬롯에게 더 묻기를 포기하고 척 보기에도 대단히 고가로 보이는 물건들을 저들 마음대로 샬롯에게 매칭해 버렸다.

아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샬롯이 아니라 베티일 것 같았다.

베티는 자꾸 ‘어머어머, 정말 이런 걸 이렇게 찰떡같이 소화해 내시다니…… 그동안은 그걸 몰랐네요.’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훔쳐 대기 바빴으니까.

샬롯은 그런 베티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 보았다.

그리고 베티는 자꾸 ‘저 혼자 꾸며 드릴 때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라고도 중얼거렸다.

하지만 역시 샬롯은 딱히 크게 다른 점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여러 명의 손길로 꾸며지는 걸, 베티가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잘됐다고 생각했을 뿐.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응? 응…….”

의장용 옷이라 그런지, 똑같은 바지 차림이라도 펄럭펄럭하고 움직이기 좋은 무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릎선까지 떨어지는 붉은 망토에 가문의 문양을 고급스러운 금실로 새겨 넣었고, 또 망토 연결 끈에는 에메랄드를 넣어 샤를로테 님의 눈을 더욱 돋보이게 했지요. 그리고 어깨와 허벅지를 동그랗게 박음질하여 샤를로테 님만이 가진 귀여움을 표현해 봤습니다.”

재봉사 중 한 명이 수선을 떨며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을 듣다가, 샬롯은 무심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재봉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거울 속의 저는, 꽤 당당하고 귀티가 나 보였다.

분홍색 머리는 양 갈래로 나누어 높게 묶어 올린 다음 거기에 흰 꽃장식을 여러 개 꽂아 정리했으며, 워낙 어려서 귀걸이는 하지 않았지만 흰 꽃과 닮은 새하얀 진주가 하나 콕 박힌 목걸이를 걸쳤다.

억지로 힘준 것처럼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과해 보이지 않고 귀여워 보이는 꾸밈이었다.

공작가의 막내딸이라는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뭐, 나쁘지 않네.’

샬롯은 이제 차츰, 이런 모습들에도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리를 살랑살랑 움직여 보였다.

치마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전에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려고 잔뜩 꾸몄을 때보단 움직임도 편하고 훨씬 좋았다.

“이제 본관에 가서 축하를 받고, 황궁으로 갔다가 퍼레이드에 가시면 돼요.”

“……어? 그냥 퍼레이드만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에이, 다 샬롯 님을 축하하기 위한 건데요.”

샬롯은 저보다도 훨씬 더 뿌듯해 보이는 베티를 바라보곤 어색하게 웃어 준 다음 얼른 창문으로 다가가 그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게 다 뭐야.’

그리고 뜨악해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저들이 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행렬일까?

세티야 가문의 모든 식솔이 본관 앞에 나와서 오와 열을 맞춰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그들 중 몇은 나팔을, 몇은 북을 들고 있었고, 또 앞 열의 몇은 손에 거대한 꽃다발을 쥐고 있었다.

샬롯은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히 칼그림자의 날에서 우승하고 싶었던 것도 맞고, 그걸 빌미로 카밀라에게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할 기회를 얻고 싶었던 것도 맞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그간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싶은 거였냐고 한다면…….

샬롯은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낮게 속삭였다.

“……베티.”

“네?”

“있잖아, 베티.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든, 다 내 잘못이야.”

“……네?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샬롯 아가씨.”

“그러니까, 베티는 그냥 몰랐다고 해. 아니, 원래도 몰랐지만.”

샬롯은 베티의 얼굴을 보면, 모처럼 들떠 있는 그녀의 앞에서 훌쩍 사라지는 짓은 차마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