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절 혼내려고 오신 거죠.”
“인제 와서 널 혼내서 뭘 하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러 왔다. 귀찮게 하지 말고, 썩 이리 나와.”
리카르도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제 어머니인 셀렌 황후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셀렌 황후는, 참담한 얼굴로 오늘 대회가 어떻게 끝났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리카르도는 제가 평생 들어온 말 중 가장 믿기지 않고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에 혼이 다 나갈 지경이었다.
요제프 황자와 샤를로테가 우승했다라. 게다가 둘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미래를 약속하며 화관까지 주고받았다라.
리카르도가 되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난들, 이런 걸 거짓으로라도 지어내고 싶겠느냐?”
“……하도 믿기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리카르도는 혀를 차며 발로 바닥을 쾅쾅 굴렀다.
짝!
침대 앞에 서 있던 황후가 리카르도의 뺨을 세게 때렸다.
리카르도는 제가 크게 잘못을 할 때마다 그렇게 훈육을 받긴 했지만, 최근 들어선 도통 없는 일이었기에 적잖게 놀랐다.
뺨을 움켜쥔 리카르도가 오만상을 다 구기는데, 셀렌 황후가 그런 그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는 어찌하여 그리 발전이 없느냐?”
“……어마마마?”
“네가 언제까지 그리 철없이 굴어도 된다 생각하느냔 말이다.”
“제가 뭘 그렇게까지…….”
“정신 바짝 차려, 리카르도. 지금 분해할 때가 아니다. 요제프 황자가 우승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보아라. 그 맹랑한 놈이 네 앞길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리카르도는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새끼 도마뱀을 두려워하는 뱀이 된 기분이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당연히 제가 발로 짓밟아도 됐던, 지극히 하찮기만 했던 요제프의 이름을, 어쩌다 이런 식으로 거론하게 되었을까.
걸림돌이라니.
“……하. 하하.”
너무 황당하니까 웃음이 다 나왔다.
셀렌 황후가 리카르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꼬집어 말했다.
“세티야 가문이 지금은 완전히 우리 편이지만, 정말로 그 두 꼬맹이가 공식적으로 약혼하게 되면 그 뒷일을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어차피 철없는 어린아이들끼리 한 약속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의미는 없겠지. 세티야 가 가주의 마음은 내가 돌릴 테니, 너는 지금부터 그 계집아이의 마음을 얻어 보아라.”
“……그게 되겠습니까?”
리카르도가 그답지 않게 자신 없다는 듯 굴자, 셀렌 황후가 혀를 찼다.
“인형을 안겨 주든, 꽃을 안겨 주든. 그 또래 여자애가 좋아하는 걸 잔뜩 안겨 주면 마음을 돌리는 게 뭐가 어렵겠어?”
“……하지만, 제가 그리 매달리는 것처럼 굴어서야 제 위신은 어떻게…….”
“리카르도.”
“하지만, 어머니!”
“리카르도.”
셀렌 황후가 리카르도를 부르는 음성은, 더 이상 반항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샤를로테가 제가 약혼을 제의했을 때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을 떠올리며 입속 살을 콱 깨물었다.
그런 같잖고 건방진 계집에게 선물을 안겨 가며 설득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쓰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든 것을 다 얻고 나서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 계집을 설득해야 한다는데.
리카르도는 차마 혀에 올리고 싶지 않은 대답을 꾸역꾸역 내뱉었다.
“……샤를로테의 마음을 얻어 보겠습니다, 어머니.”
황후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이어 말했다.
“그리고 곧 사냥제가 있지, 리카르도.”
리카르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냥제.
그것 또한 칼그림자의 날과 맞먹는 거대한 규모의 행사였다.
다만, 칼그림자의 날이 민중들에게 완전히 공개된 행사라면 사냥제는 좀 더 귀족들끼리 즐기는 행사인 점이 다를까?
사냥제는 처음엔 토끼, 꿩, 노루, 사슴 같은 동물들을 그날 먹을 만큼 사냥하여 밤새 그 사냥감들의 요리로 파티를 벌이는 지극히 평범한 친목을 다지기 위한 행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꽤 변질되어 누가 얼마나 많은 짐승을 사냥해 오는지 경쟁이 과열화되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리카르도에게 있어 사냥제는 그를 추종하는 귀족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행사일 뿐이었다.
그는 사냥은 뒷전이고, 항상 다른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듣기 좋은 달콤한 칭찬들을 듣느라 하루를 보내곤 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새 옷을 맞춰야겠습니다.”
“어쩌면 이번 사냥제는 평소와 같지 않을 거다. 고작 옷이나 신경 쓸 때가 아닐 거다, 리카르도.”
그냥 놀고먹는 행사였던 사냥제를 두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황후의 말을 듣자, 리카르도는 점점 속이 욱하고 끓었다.
“……그게 무슨. 어마마마, 너무 요제프를 경계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셀렌 황후는 한심하단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네가 대회에서 승부에 승복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서, 지금 여론이 말이 아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제대로 귀담아듣거라. 요제프가 지금껏 발에 채이는 하찮은 돌멩이 같았던 건, 그를 주목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부턴 네가 빛나서 그놈보다 잘났다는 걸 보여 줘야 할 수도 있단 거다.”
리카르도는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렌 황후는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그래, 다 잘될 거란다. 리카르도, 너는 황제가 될 아이가 아니냐. 사냥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대비를 철저히 해 둘 테니, 너는 그때야말로 반드시 황제 폐하의 눈에 들어야 한다.”
‘여러 가지 대비’라고 말하는 셀렌 황후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어딘가 섬뜩한 냄새가 나는 말투였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고, 셀렌 황후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황후는 ‘어미가 알아서 준비해 두겠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허투루 넘어간 적이 없었다.
“……어마마마만 믿겠습니다.”
“그래, 넌 그저 사냥감을 쫓을 준비만 하여라. 이번 대회엔 성과를 입증할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 하긴 네겐 나는 매도 쫓을 수 있다는 사냥견의 목걸이가 있으니 별다른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황후는 긴 한숨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방에 홀로 남은 리카르도는 언젠가 들어 본 듯한 단어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굴려 보았다.
‘사냥견의 목걸이? 사냥견의 목걸이…….’
그간의 사냥은 사실 제가 직접 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사냥감을 몰아오는 역할도 시종들이 다 알아서 했고, 그때에 맞춰 저가 활을 쏘면 주변의 귀족들이 대단하다며 손뼉을 쳤다. 그냥 그런 식으로 흘러왔다.
설령 활로 맞히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사냥제에 필요한 만큼의 사냥은 다른 이들이 알아서 해 왔기 때문에 상관도 없었다.
그래서 제게 그런 목걸이가 있다는 사실도 종종 잊고 지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사냥견의 목걸이에 대해 생각하던 리카르도는, 문득 커다란 펜던트의 그 목걸이를 최근에 직접 하고 나간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게 언제냐면, 바로 오늘 아침.
저도 모르게 제 목 주변을 손으로 쓸어 보던 리카르도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망할 계집이.’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제게 목걸이를 내놓으라 요구하던, 샤를로테의 얼굴이 뒤늦게 떠올랐다.
사냥견의 목걸이는, 요제프의 손으로 넘어갔을 게 틀림없었다.
알고 달라고 한 걸까?
아니면, 모르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고 달라고 한 것일 리가 없었다.
이렇게 적기에.
겨우 좀 진정되었던 리카르도의 기분이 다시 한번 엉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아아악! 별것도 아닌 두 연놈이, 나를 이렇게 건드려?”
몇 번이나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쾅 내려친 끝에, 리카르도는 결국 제국 최고의 장인이 직접 조각을 새겨 넣었다는 고급 목제 테이블을 두 쪽으로 부숴 버리고야 말았다.
* * *
대회 날이 힘들긴 힘들었다.
이른 새벽이 되면 운기조식을 하는 게, 거의 뼈에 새겨진 습관이 된 샬롯이 새벽에 일어나지 못해 한참 끙끙거렸을 정도였다.
겨우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는, 네 명의 시녀와 다섯 명의 재봉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리 넓지 않은 방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샬롯이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이자, 그 시녀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베티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아가씨께서 명상하실 때는 절대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해 두었답니다.”
“아니, 그건…… 그건 잘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베티가 뿌듯한 얼굴로 시녀들 뒤에 걸려 있는 화려한 의복을 가리켰다.
도대체 하룻밤 새 이 많은 것을 어디서 조달해 온 건지, 샬롯의 자그마한 몸에 꼭 맞는 붉은색의 의례복들이 행거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드레스도 있었고, 무복도 있었다. 그중 일부는 아직 재봉이 다 끝나지 않은 것인 듯 보이기도 했다.
샬롯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들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