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샬롯은 결국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부쳤다.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어 준 음식이 아니라, 혹시 예선에서 지고 오더라도 이거라도 먹고 기운을 낼 수 있게 준비해 준 거라고 생각하니까…….
“베티.”
“네, 아가씨.”
“고마워…… 고마워.”
“뭘요.”
샬롯은 결국 눈을 비집고 나온 눈물들을 자꾸 자그마한 손등으로 쓸어 냈다.
“아니, 이걸 이렇게 준비해 줄 거면 와서 인사라도 하지…… 그래야 나도 고맙다고 말할 수 있잖아.”
“오늘 시간이 워낙 늦어서, 아가씨께서 큰일 겪고 난 후라 푹 쉬시라는 거죠.”
“응. 아는데…… 정말 고마워서 그러지.”
베티가 빙긋 웃고 샬롯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도 축하드려요.”
샬롯은 그제야 새삼 제가 아직 화관을 쓴 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제프 황자가 제게 올려 준 화관이었다.
그녀는 화관을 벗어 손에 들었다.
대회장에서는 갑작스레 청혼이니 뭐니 하는 말에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에버풀 꽃의 화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여운 모양새였다.
마치 꼼꼼하게 잘 엮은 녹색 이파리 화관에 새하얀 솜 덩어리들이 뭉쳐 있는 것 같았다.
평생 시들지 않는다는 그 화관을 양손으로 만지고 있자니, 절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요제프는, 제 방에서 혼자 자는 걸까?’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 좋았다.
물론 황궁에 돌아간다고 해도 뭐, 부모님이랑 같이 잘 나이는 지났지만 제 방이 이렇게 따뜻하고 화려하니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샬롯은 요제프를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문득 아까 보았던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제가, 가족의 품에 있는 것이 뭔가 민망하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볼 때, 요제프가 저를 보며 지었던 미소를.
그녀가 그의 청혼을 받아 줬다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듯한, 그 청초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오늘만큼은, 요제프가 혼자 잔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겠는데.’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 샬롯 아가씨. 무슨 좋은 생각 하시나 봐요. 정말 기분 좋아 보이세요.”
그때, 베티가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샬롯은 바로 앞에 놓인 거울로 슬쩍 시선을 옮겼다.
요제프의 미소만큼 아름다운 미소는 없겠지만, 거울 속의 저도 제법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갈 때보다는 많이 흐트러진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연둣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희게 질려 있던 볼에도 부드러운 분홍빛이 사르르 물들어 있었다.
샬롯은 겉으로 밝게 웃는 것만큼 속으로도 웃었다.
그녀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 디저트들과 그 옆에 내려놓은 화관을 보며 발을 동동 굴러 대자, 베티도 잠옷을 꺼내 오며 웃었다.
“아아, 정말 너무 길고, 행복한 하루였어. 평생 잠들고 싶지 않아.”
“그래도 따뜻한 물을 받아 뒀으니까, 푹 담그시고 얼른 잠드세요. 내일부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테니까요.”
베티가 부드럽게 달래는 말에, 샬롯은 조금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이제 바쁜 건 다 지나간 거 아니야?”
베티야말로 정말로 놀랐다는 얼굴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칼그림자의 날, 우승자가 참석해야 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 궁정 연회는 물론이고, 당장 내일 있는 퍼레이드에도 가셔야 하고요. 모르긴 몰라도 각 비무 대회에서 참관을 요청하기도 할 테고요. 그뿐만이 아니라…….”
아직 할 얘기가 한참 더 남았다는 듯 구는 베티를 보고, 샬롯이 기가 질려서 양손을 내저었다.
물론, 작중에서야 그런 장면들이 있긴 했다.
그러긴 했는데…….
그거야 로맨스를 위해서 수많은 사교의 장이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우승자라서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어야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대회가 끝나면, 그때부턴 진짜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대회만을 바라보고 노력한 만큼, 요제프와 시내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마법도 좀 배워 보고, 한없이 한가하게 뒹굴뒹굴해도 보고…… 그런 계획이 잔뜩 있었다.
샬롯이 그 영예로운 자리들이 그저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걸 본 베티는, 아가씨가 정말로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 싶어서 작게 웃었다.
“자자, 내일이 되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제가 다 씻겨 드릴 테니까 일어나셔요.”
“……내일이 되면 퍼레이드에 가야 한다며. 생각이 왜 바뀌어.”
“얼른요, 자아.”
샬롯은 이럴 때는 정말 영락없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땀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벗고 따뜻한 탕에 몸을 담갔다.
* * *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정원이 딸린 별궁의 앞.
별궁의 주인이 가진 취향인 듯, 궁의 앞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촘촘하게 심겨 있었다.
철마다 제때 가지치기를 했는지,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에도 실한 열매가 열려 있었고, 양분을 제대로 받은 꽃가지들도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황제는 그 소담한 정원에 서서,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소식은 전해 들었으리라 생각해서 왔소.”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별궁의 2층 창문에 여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을 뻗어 눈앞에 피어 있는 제국의 국화, 에버폴을 쓰다듬었다.
“요제프가, 그냥 제 실력을 발휘하는 걸 좋아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 야망이 있었소. 이 꽃을, 세티야 가의 막내에게 주었소.”
움찔, 전혀 움직일 것같이 보이지 않던 고요한 그림자가 적잖이 놀란 듯 크게 동요했다.
황제는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멀뚱히 서 있었다.
“솔직히 내가……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지…… 전혀 모르겠소만. 그냥 이 말을 해 두러 왔소.”
산체스 황제는 어딘가 그리움이 섞인 잿빛 눈동자로 에버폴 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요제프에겐 제 편이 많이 없는데, 아마…… 요제프의 어미가 황비의 지위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그 아이에겐 꽤 다른 일일 거요. 그냥, 그대가 생각을 해 보았으면 해서, 이야기를 해 두려고 왔소.”
그 말이 끝이었다.
황제는 마치, 산책하다가 잠깐 아름다운 꽃 때문에 발을 멈췄었다는 듯, 그저 주변을 바라보며 잠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황제가 정원에서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별궁의 2층에 나부끼는 흰 커튼 뒤에는 한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도사리고 있었다.
* * *
리카르도는 대회장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즉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대회가 끝난 뒤 이어지는 이벤트니 수상식이니 뭐니 하는 것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냥 거기에 더 이상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수치스러웠다.
대회장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그는 스치기만 해도 자신을 향해 열광하던 그 관중들이 아무 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요하게 저를 응시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차마 소리 내 비난하지 않는다 뿐이었지, 그 수많은 눈동자에서는 명백히 비난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다니.’
리카르도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이를 득득 갈았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요제프, 그놈 때문이라고.’
두 번째인가 세 번째쯤에 멈췄어야 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요제프 그 간사한 새끼가 자꾸 조금만 더하면 저가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구는 데다가, 자꾸만 건방지게 무딘 쪽의 검날로 사람을 쥐어패니까…… 그게 아플수록 점점 더 약이 올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단 말이다.
마차에서 내린 그는, 자신을 반기는 황성 집사의 말도, 아니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곧장 제 방으로 올라가 문을 쾅, 닫았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그냥…… 콱 접싯물에라도 코를 박고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딴 놈한테 지다니.
그것도 그렇게 형편없이 농락당하고 지다니.
“아아아악!”
리카르도의 신경질적인 손길에, 그의 방에 놓여 있던 귀한 물건들이 죄다 방바닥과 벽으로 날아가 부딪혀 깨지고 부서졌다.
“아아악! 아악!”
더 이상 책상 위, 테이블 위에 남는 것이 없을 때까지 손에 닿는 것을 모조리 던진 그는, 종래에는 그 테이블마저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침대에 가서 이불을 덮어쓰고 엎드렸다.
그렇게 분노를 삭이다 제풀에 지쳐 설핏 잠이 들었을까?
“리카르도.”
그는 엄한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었다.
리카르도가 지금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어마마마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