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72)화 (72/123)

#72.

테이블 위는 정말로 샬롯이 좋아하는 간식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키친 메이드들이 이것들을 준비해 줬을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서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는데 카밀라가 샬롯의 잔에 차를 따라 주며 물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네?”

“아이작은, 괜찮냐고.”

솔직히 카밀라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그냥, 딱딱하게 용건만 전하고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싫지 않았다.

솔직히, 아이작에 대한 걱정을 누구와 함께 공유하자면, 딱히 상대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제롬은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라버니들의 아이작 형님에 대한 동경을 깨뜨리기도 뭐 했으니까.

샬롯은 의외로, 이 가문에서 가장 어려울 거라 생각한 상대인 카밀라가 가장 말을 하기 편한 상대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선에 나이트메어가 나왔잖아요. 전, 아이작 오라버니가 나이트메어의 환영에 빠지는 걸 미리 경고해 준 덕분에 큰 사고 없이 지날 수 있었지만…… 오라버니는 그 환영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카밀라는 어느새 제 잔도 채웠는지, 부드러운 풀 향기가 나는 차를 입에 머금으며 눈을 지그시 눌러 감았다.

“……그래. 그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샬롯은 진지하게 아이작의 일로 고민하는 카밀라를 보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묻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숨겨진 사연이 있기에.’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 어땠기에, 아이작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거냐고.

하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이작의 아버지 로룸은, 카밀라에겐 후계자로까지 생각했던 제 첫째 아들이었으니까.

가족이라는 게 뭔지 천천히 알아 가고 있는 샬롯은, 아직 어머니의 사랑 같은 건 그리 잘 몰랐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카밀라가 자꾸 이렇게 찻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으니까.

샬롯은 저도 모르게 카밀라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에, 테이블 위에 놓인 푸딩으로 손을 뻗었다.

“……와.”

대회에서 정말 온 힘과 정신력을 다 쏟아 놓고 온 뒤라 그런지, 달달한 디저트는 정말 별미였다. 입 안에서 푸딩이 살살 녹다 못해, 혀까지 다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뭐야, 너무 맛있어.’

푸딩 두 개를 단숨에 해치운 샬롯은, 그 옆에 놓인 크림 브륄레와 수플레 팬케이크를 차례로 맛보며 행복함에 취해 버렸다.

처음에는 분명 카밀라가 모처럼 신경 써서 마련해 준 걸 좀 먹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막상 먹다 보니 너무 맛있어서 그런 생각은 이미 뒷전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알 것 같군.”

그래서, 카밀라가 어느새 좀 진정된 얼굴로 몸을 소파 등받이에 붙이고선 작게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게 늦었다.

“……네?”

“요즘, 제롬이 네게 뭘 못 해 줘서 안달인 이유를 말이다.”

“……아. 그건…… 네.”

샬롯이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볼에 가득 들어 있는 설탕 과자를 녹여 먹기만 하는데 카밀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네.”

“용건은, 저번에 말했던 그 소원 때문인가?”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아홉 살 꼬맹이 손녀의 소원 같은 건 벌써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제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를 잘 아는 카밀라는 그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억해 둔 모양이었다.

‘……정말 이런 생각 하기는 좀 그렇지만, 엄마와 아들인데 카밀라와 제롬은 완전히 다르네.’

샬롯은 가볍기 짝이 없는 제롬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짓곤, 그간 줄곧 생각해 온 말을 최대한 또박또박 내뱉었다.

“세티야 가문의 2황자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그릇되고 맹목적인지 한번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줄곧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카밀라가 정말로 호방하게, “으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인상 깊은 짧은 백금발에 몸에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카밀라는 본래도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진 않았지만, 이렇게 호방하게 웃으니까 정말로 4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샬롯은 카밀라가 제 소원을 당장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너무 오래 웃으니까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카밀라는 웃음을 그치고, 천천히 샬롯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지?”

“……그건.”

“설마, 요제프 황자와 함께 수련하며 친분이 쌓였다던가, 친하니까 그 아이의 인품을 잘 안다던가, 하는 그런 뻔한 대답은 아니겠지. 어디 한번 말해 봐.”

샬롯은 고개를 저었다.

카밀라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주는 지금이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카밀라가 가지고 있는 단호한 생각에 파문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샬롯은 어쩐지 카밀라의 앞이라서 그런지, 제가 정말 어린아이같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조리 있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건, 가문을 위해서예요.”

“가문을 위해서라?”

“제가 반대로 질문을 드릴게요. 오늘 대회를 통해서 보셨던 리카르도 황자님께서, 한 나라의 주군이 될 인재라 생각하세요?”

“……허. 그래서?”

카밀라가 되묻는 말에, 샬롯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도 솔직히 요제프 황자 전하가 황제라는 그런 어깨 무거운 자리를 물려받는 게 그리 내키지 않아요. 그냥, 2황자 전하가 아니라면 다른 대안은 요제프 황자 전하밖에 없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리고…….”

“말해 봐.”

“……리카르도 황자 전하께서 황제가 된다면, 나라를 뜯어먹을 이가 너무 많잖아요.”

카밀라가 얼굴에 드리우고 있던 미소를 거두곤, 샬롯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세티야 가문을 포함해서인가?”

딱딱하게 굳은 카밀라의 질문은, 상대를 시험하는 듯했다.

하지만 샬롯은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냥, 솔직한 대답을 골랐다.

“……아니라곤 못 하죠.”

샬롯은 제가 말하면서도 이 대답이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의례적인 대답을 해서, 카밀라를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저 영웅을 상대로, 제가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절박함과 솔직함뿐이었다.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카밀라가 곰곰이 샬롯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웃어 버렸다.

“하하하…… 귀엽네.”

“네?”

“귀엽다고. 가문의 앞날을 걱정해서, 기껏 얻어 낸 소원권을 이런 거대하고 중차대한 일에 쓰기로 한 게 너무 깜찍해서, 이 할머니의 심장이 녹아 버리겠어.”

할머니.

속으로만 생각할 때도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이 지나치게 낯간지럽고 너무 몽글몽글해서 어떻게 감히 입에 올릴 생각조차 못 했는데, 카밀라가 다시 한번 그것을 말해 버리니까…….

당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가주 앞에서 과자만 잘 주워 먹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샬롯은 갑자기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을 짓고 멍하니 카밀라를 올려다보았다.

카밀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바로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좋아, 소원이니까.”

너무 수월한 대답에 샬롯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렇게 간단히요?”

“재고해 달라고 하지 않았니? 그리 해 보마.”

샬롯은 카밀라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카밀라가 재고해 본다고 해서 당장 뭔가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런 그녀가 뭔가를 재고해 보겠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또한 알고 있었다.

샬롯이 바라는 건 여기까지였다.

‘충분해. 내가 바라는 건, 정말 다 이뤘어.’

샬롯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손으로 설탕 과자를 세 개 움켜쥐고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카밀라는 다시 한번 입 새로 웃음을 흘렸다.

샬롯은 방에서 막 빠져나오려다가 카밀라에게 슬쩍 몸을 돌렸다.

어쩐지, 갑작스럽게 제게 잘해 주기 시작한 다른 사람들에겐 단번에 정이 간 적이 없었는데 카밀라는 뭔가 달랐다.

저를 질투하지도, 또 그런 저를 무시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대해 주는 게 좋았다.

지금도 자신이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만나서 이야기를 한 거면서도, 그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조차 꺼내지도 않았다. 그 흔한 감상이나 칭찬조차 없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그냥 편안했다.

게다가…… 고작 한 세대가 지나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다시피 하는 나라를 이렇게 평온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에는 카밀라의 공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카밀라는, 아이작이 공작이 되면서 요양을 위해 벽지로 떠나는 것이 마지막 등장이었다.

인간적인 애정에서도, 객관적인 이유에서도 원작에서처럼 카밀라가 금방 아프길 바라지 않았다.

샬롯은 저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문간에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한마디만 더 하고 가도 돼요?”

카밀라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샬롯을 돌아봤다.

“그래, 하렴.”

샬롯은 평소에 안 하던 종류의 말을 하려니, 어쩐지 입이 잘 안 떨어졌다.

하지만 카밀라의 눈을 마주 본 채로 감히 입을 오래 눌러 닫고 있을 간 큰 사람은 없을 거다. 샬롯은 카밀라의 눈빛에 떠밀리듯 저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 할머니가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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