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그때, 시종 한 명이 제롬과 요제프 사이로 끼어들더니, 정중하게 요제프 황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황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직접 분부하셨습니다. 오늘부터 궁에서 머무르셔도 좋다고 하십니다.”
샬롯이 깜짝 놀라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잘됐다!’
하지만 요제프는 그렇게까지 기쁜 얼굴을 해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짓고 있던 화사한 미소는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 관심 없다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으쓱 밀어 올린 게 전부였다.
“황자 전하께서 괜찮으시면 지금 제가 안내를…….”
“아니. 오늘은 세티야 가로 가겠다. 짐도 어차피 거기 있고.”
“……짐은 저희가 알아서.”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알겠습니다.”
시종들은 황자가 당연히 저희와 함께 가리라 생각했던지, 머뭇머뭇 망설이며 뒤로 물러났다.
요제프는 가만히 서 있는 제롬을 흘끗 바라보곤 아무렇지도 않게 세티야 가의 마차가 있는 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겨 버렸다.
그리고 요제프가 그 자리를 뜬 것과 거의 동시에 러슬과 비야키가 다가왔다.
샬롯은 러슬의 품으로, 다시 제롬의 품으로 옮겨 다니며 축하 인사를 받느라 혼이 쏙 빠지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요제프가 사라진 방향을 자꾸 흘끗거렸다.
덜컹, 덜컹.
기나긴 하루의 끝, 세티야 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 타 있자니 어쩐지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은 짧은 한낮의 꿈처럼만 느껴졌다.
샬롯이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는데, 러슬이 어딘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저런 걸 데려가도 괜찮은 거야?”
샬롯은 픽 웃었다.
그도 그럴 게 러슬은 마차가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저 말을 스무 번도 넘게 했으니까.
샬롯도 스무 번도 넘게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응. 괜찮다니까?”
“……정말, 아버지도 요즘 샬롯에게 너무 무르셔서 큰일이야. 물론 네가 우승한 건 정말 축하할 일이고, 나도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다만…….”
“왜, 그렇게 걱정돼?”
“……그래.”
그녀는 러슬이 징그러운 것을 보듯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날개 달린 말이 마차와 속도를 함께하며 부드럽게 허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사위가 어두컴컴한 밤이 다 되었는데, 그 형태가 흐릿한 말이 발도 움직이지 않고 마차의 옆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는 건 솔직히 섬뜩하고 기괴하긴 했다.
하지만 샬롯이 창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자, 나이트메어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 직전, 샬롯이 제롬에게 졸라 주최 측에게 나이트메어를 그녀에게 줄 수 있냐고 문의한 결과, 어차피 대회가 끝난 후 나이트메어를 폐기 처리할 입장이었던 마탑 측은 흔쾌히 수락했던 거다.
별것도 아닌 마수 하나로 세티야 가의 작은 주인에게 빚을 얹어 둘 수 있다면, 그들로서는 큰 이득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두 명의 마법사와 함께 보내긴 했지만, 어쨌든 나이트메어는 온전히 샬롯의 것이 된 거다.
마차에 오르기 전, 검기를 바짝 세운 검으로 녹슨 편자 네 쪽을 모두 잘라 내 버린 뒤로, 나이트메어는 줄곧 저런 상태였다.
‘제법, 귀여운데.’
샬롯이 흐뭇하게 제게 생긴 첫 말을 바라보는데, 러슬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리 좋다니…… 뭐, 됐지만…… 아무튼 조심하거라.”
“네, 오라버니.”
“……그리고, 샬롯.”
문득, 진지해진 러슬의 말투에 샬롯은 조금 놀라 마차 안으로 다시 목을 쏙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비야키도 러슬과 함께 어딘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이작 오라버니 때문에 그래요?”
러슬과 비야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도 아이작을 떠올리니, 순식간에 들떠 있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이작은, 대회 중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진 상태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가, 세티야 가의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에야 나타났다.
하지만 합류한 뒤에도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고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러슬이나 비야키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위로를 전해 보아도, 그 말들을 귀담아듣는 눈치도 아니었다.
아이작이 홀로 입을 꾹 다물고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샤를로테와 함께 붙어 있을 때마다 워낙 빙글빙글 웃고 다니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새삼스레 그 침묵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고서는 생각이 많은지, 마차가 출발하고 오래되지 않아서 다들 먼저 가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선 마차까지 굳이 세워 가며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작 형님께서 어디 가서 위험해지실 리도 없지만.”
“워낙 기대하셨던 대회에서 우승을 못 하셔서 기분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야.”
샬롯은 러슬과 비야키의 추론을 들으며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런 부분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사라진 건 아닐 거다.
샬롯은 아이작이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과 싸우며 혼잣말을 하던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알 수 있었다.
‘뭔가 있어. 큰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이작은,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 제 곁에 제게 잘해 주는 사람이 많지만, 그건 마치 하나의 실에 줄줄이 꿰어져 있는 것과 같아서 한 사람이 제 곁에 있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도 자신을 좋게 보기 시작한 거다.
그것을 따라가 보면 가장 처음에는 베티와 아이작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이작은, 원래는 샬롯을 절대 좋아할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녀가 보여 준 무위 한 번에 솔직하게 그녀를 인정하고 자신의 평가를 바꿔 주었다.
그녀는 큰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수집할 방법을 생각하느라, 상념에 잠겼다.
* * *
샬롯은 세티야 가에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카밀라를 찾았다.
카밀라는 대회가 끝나는 즉시 먼저 마차로 가문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방에서 쉬고 있을까 싶었는데, 먼저 돌아와서도 집무실에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 같으면 유능한 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 내 생각 같아선 너무 과로하시는 거 아닌가 싶은데.’
오늘처럼 긴 대회는 치르는 사람도 곤욕이지만, 새벽같이 함께 나와서 개회식에 참석하고 대회 내내 모든 경기를 참관하고 돌아오는 그 과정도 지치고 피곤하기 짝이 없을 터였다.
아무리 강건한 신체를 자랑하는 카밀라라고 해도.
시종은 샬롯에게 한마디를 더 해 주었다.
“지금 뵈러 오셔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
“지금 가시겠습니까?”
만약 카밀라가 쉬고 있다면 내일 볼까 생각했던 샬롯은 그녀가 집무실에 있다는 이야기에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똑똑.
샬롯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카밀라가 몸을 돌려 제 손녀딸을 맞았다.
샬롯은 문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서서, 어둑어둑한 조명 속에 서 있는 짧은 백금발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공식 석상에서 걸치고 있던 화려한 의상은 모조리 벗어 버리고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일 뿐이었는데도, 가주 카밀라가 풍기는 위압감은 남달랐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샬롯은 아직 겨우 운기조식을 조금 할 수 있을 정도밖에 실력이 없는 채였다. 그 뒤로는 마주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거니와, 지금처럼 둘이서 독대하는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카밀라를 독대하니까, 눈앞에 있는 여인이 가지고 있는 강대한 기운에 절로 목이 탁 죄었다.
과연 한 나라에서 ‘최강자’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사람이었다.
샬롯은 다시금 마음속이 차분하게 겸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가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만 모아 놓은 대회에서 두각을 좀 드러냈다지만, 그걸로 우쭐할 일이 아니었다. 또 하늘 위에는 다른 하늘이 있다는 천외천이라는 말처럼 또 다른 실력자들이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샬롯이 바싹 긴장해서 카밀라를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제 손녀를 마주했다.
“어디 보자, 우리 꼬마 아가씨가 내게 무슨 말을 하러 왔을까. 네가 온다는 이야기에, 달콤한 디저트를 좀 준비시켰단다.”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생각보다 훨씬 더 나붓한 태도에 샬롯은 조금 놀라서 눈만 끔벅였다.
카밀라가 먼저 소파에 가서 앉으며 샬롯 쪽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서 들렴. 네가 푸딩과 설탕 과자를 좋아한다지. 할머니가 된 사람이, 그런 것도 몰랐구나.”
할머니.
아버지라는 말도, 오라버니라는 말도 이렇듯 거세게 심장을 두드린 적이 없는데. 할머니라는 단어는 왜 이렇게 그립게 느껴지는 걸까?
정작 단 한 번도 할머니를 가져 본 적이 없으면서.
샬롯은 그 단어에 이끌리듯 카밀라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