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70)화 (70/123)

#70.

“나랑 약혼하자, 샤를로테.”

샬롯은 요제프가 덤덤하게 말하는 게 너무 당황스러워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요제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의문의 힘겨루기를 하던 샬롯은, 요제프가 강경하게 그 자세를 고수하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이래?”

“뭐 하는 거냐니.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그렇지. 우리가 약혼은 무슨 약혼이야?”

요제프가 고요한 까만 눈동자로 샬롯을 들여다보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줄곧 생각해 봤어. 네 곁에 계속 머물 수 있겠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네가 믿을까.”

“……아, 그건…… 무, 무슨 소리야. 당연히 믿지.”

“반만?”

“어……?”

샬롯은 뜨끔해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요제프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믿긴 믿었는데, 요제프가 지금은 어리니까…… 언제든 제 길을 찾아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의 생을 살아 본 결과 그녀가 내린 결론은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거였으니까.

본질적으로, 인간은…… 그러니까.

샬롯이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던 요제프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족이 된다면 어떨까?”

“……가족?”

샬롯은 낯설기 짝이 없는 단어를 입속으로 굴려 보았다.

샬롯에겐 이미 가족이 있었다.

아빠도 있었고, 오빠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가족이 그렇듯 그들은 제가 선택한 가족도 아니었고, 그들에게 제가 선택된 것도 아니었다.

결혼을 통해서 만드는 가족이라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

샬롯은 다시 한번 그 단어를 입속으로 천천히 굴려 보았다.

솔직히 너무 당황해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제프와 가족이 된다는 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정말로 무슨 결혼을 하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라, 뭐랄까…… 선포 같은 거잖아.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요제프에게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껍고 고마웠고 좋았다.

리카르도 황자 따위가 생각도 없이 입에 올렸던 약혼이니 뭐니 하는 단어와는 무게 자체가 달랐다.

그녀의 기세가 한풀 누그러진 걸 알아챘는지, 요제프가 샬롯의 손에 화관을 올려 주었다.

“이 꽃은, 특별하게 대신관의 정원에서만 재배되는 체이커의 국화 에버폴이야.”

“……에버폴?”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야. 그래서, 이 화관을 네게 주면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

요제프의 소년다운 목소리와 부드럽게 그녀를 위로하는 이야기들에 샬롯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눈물이 볼을 따라 또르르 굴러 내렸다.

“……흑.”

‘……아홉 살짜리 몸으로 들어와서 그런가? 요즘 왜 이렇게 눈물이 잦지.’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해도 이미 시작된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고마웠다.

가족이라니.

요제프라서, 제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그 공허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준 것도 고마웠고, 그것을 그냥 한심하다 여기지 않고 제가 기꺼이 메워 주겠다는 듯 듬직하게 말해 주는 것도 고마웠다.

한 번도, 누군가가 제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냥 말을 듣는 것만으로 이미 가슴속 어딘가에 자리한 구멍이 온전히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샬롯이 고개를 얼른 끄덕이자, 숨죽이고 있던 관중석에서 요란하고 경박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요제프가, 그녀를 제품으로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그녀는 젖어 드는 눈시울을 자꾸 손가락으로 훔치며, 그에게 속삭였다.

“있잖아, 요제프.”

“왜?”

“고마워.”

요제프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게 많은 경기를 치른 뒤에도 평소만큼 부드럽기만 한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고마운 걸 좀 어떻게 줄여 보라고 했을 텐데.”

“응. 그래도. 그래도 고마워.”

“……전혀 내 말을 이해 못 했다니까, 역시.”

요제프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엉망으로 흙먼지가 묻은 손수건을 들고 다니더니, 이번에 꺼낸 건 제법 말끔한 것이었다.

샬롯은 그걸 받아서 제 눈가를 훔쳤다. 그러다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요제프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목놓아 울어 버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린이라고 하던가.

한비자의 고사에 나오는 용의 비늘. 용의 몸에 무수히 돋아 있는 비늘 중 딱 하나의 비늘만이 그 용의 급소이고, 용은 그 민감한 비늘을 건드린 자를 반드시 죽인다고 했던가.

“흐윽, 흐끅, 흐끅…….”

울음이 이렇게까지 그치질 않는 걸 보면, 지금 요제프가 꺼낸 가족이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역린이었을지도 몰랐다.

정곡 중의 정곡이었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원했던 부분이었을지도 몰랐다.

요제프의 연설을 위해, 요제프 황자의 목소리가 한껏 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샬롯을 향한 그의 고백과 그녀의 대답은 온 관중이 다 함께 들었다.

처음에는 요제프와 샬롯이라는 대단히 말도 안 되는 조합에 당황스러워하던 관중들은 그 대화를 다 듣고 나서는 뭐라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고작 열두 살과 아홉 살짜리의 대화인데, 왜 그렇게 절절한지.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마…… 만세!

조그맣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 눈치를 보던 관중들은 하나씩 다시 만세를 외쳤다.

샤를로테 님과 요제프 님의 빛나는 미래에 축복을!

만세! 만세!

황제는 쏟아지는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제 앞에 서 있는 요제프와 샬롯을 바라보았다.

그냥, 장하고 대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요제프 이 녀석은 그게 아니었다.

아주, 정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약삭빠른 구석이 있었다.

‘……샤를로테 세티야라.’

나쁜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최선의 선택이라 문제지.

황제는 피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앞으로의 일이, 솔직히 기대되었다.

* * *

샬롯은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요제프와 함께 천천히 퇴장했다.

마지막으로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기 직전까지, 관중들은 둘의 이름을 열렬하게 연호했다.

샬롯은 막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순간적으로 관중석에서 뭔가를 본 듯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

하늘색 머리카락을 본 것 같았다.

선명한 하늘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아이를.

검은색 머리카락도 그렇고, 백금발 머리카락도 그렇듯, 가끔 그 혈족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색깔들이 있었는데, 하늘색도 그중 하나였다.

그것도, 이 나라가 아니라 이웃 나라인 세레스 국의 황족만이 타고 나는 머리카락 색이었다.

샬롯이 다시 제가 봤던 것을 찾아 관중석을 자세히 살피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샬롯!”

“……아, 아빠?”

“나는, 네가 너무 대견하고 장하구나. 우리 가문의 이름을 네가 빛내 줄 줄이야. 이 아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단다.”

샬롯은 당황해서 제롬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관중석을 돌아봤지만, 그사이에 관중들이 차례로 일어나고 있어서 제가 봤던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착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샬롯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데, 제롬이 그녀를 번쩍 품에 안아 들었다.

“……아빠?”

이렇게 갑작스럽게 친근한 척 구는 게, 샬롯도 당황스러웠지만, 제롬도 조금 쑥스럽긴 한 모양이었다. 귓불이 조금 붉어진 제롬이 대견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샬롯을 안고 그녀를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샬롯은 제롬이 난데없이 전에 없던 행동을 하는 것에, 갑자기 요제프가 신경 쓰였다.

제롬의 품에 안긴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요제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지, 이런 순간에 요제프를 보는 게 민망했다.

요제프에게도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는데.

마치 요제프에게 행복을 과시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할 거야? 같이 돌아갈래?’

샬롯이 입 모양으로 속삭이는데, 요제프가 샬롯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눈을 크게 휘며 웃어 보였다.

샬롯은 적지 않게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굳었다.

요제프의 미소를 본 일은, 지금까지 횟수로 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보는 사람이 깜짝 놀라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의 미소는, 정말 천사라는 게 있다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무엇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대회에서 우승한 것 때문일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요제프가 샬롯의 머리 위를 눈짓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 머리 위를 더듬더듬 만졌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꽃 이파리가 손에 와 닿았다.

‘……뭐야.’

요제프는 지금, 샬롯에게 청혼하고 그녀가 청혼을 받아 준 것 때문에 저렇게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그렇게 좋을 일이야? 내가…… 내가 좋은 일이지.’

샬롯은 요제프가 정말 보기와는 다르게 굴 때가 많다고 생각하며 속이 간지러워서 그만 시선을 피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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