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요제프와 샤를로테는 트로피와 꽃다발에 둘러싸인 채로 관중들에게 화답하기 위해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이것도 받으십시오.”
“이것도.”
“여기 꽃다발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우승자를 위해 한 세트만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족들이 두 명의 귀여운 우승자에게 보내오는 꽃다발이 많았다.
요제프는 우승자를 위해 주어진 물품들을 모두 받는 족족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샬롯에게 양보해 버렸다. 보석이 얹어진 우승자의 관, 성배 모양의 트로피, 수여된 승리자의 상징인 검에다 꽃목걸이 등등…….
그중에서 딱 하나, 국화로 만들어진 흰색 화관 하나만 제가 들었다.
그리고 샬롯이 들기 어려운 큰 꽃다발들을 받아 주었다.
샬롯은 처음에는 요제프를 만류해 보려 했지만, 워낙 그의 행동이 자연스러웠고 뻔뻔해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누구보고 뭐라고 하는 거야? 요제프도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나보다 더 사양하는 편이지 않아?’
샬롯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꽃다발에 가득 둘러싸여 있는 요제프가 반짝반짝하게 예뻤고 이 순간이 너무 정신없이 행복해서 더 이상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 아아, 관중 여러분들께서는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 우승자의 수상 소감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샬롯이 그토록 통제가 잘 되는 집단이라고 생각했던 관중들은, 도대체 얼마나 흥분한 건지 사회자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조용히 해 달라는 말을 하고서야 간신히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거대한 대회장에 정적이 찾아들자, 묘하게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을 들고 대회장에 들어설 때보다, 모두의 앞에서 소감을 말해야 하는 지금이 훨씬 더 떨렸다.
안절부절못한 샬롯이 손을 뻗자, 요제프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샬롯의 눈에 그녀의 앞에 선 황제가 퍽 흐뭇하게 뭔가를 기대하는 얼굴을 하는 게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칼그림자의 날 우승자의 수상 소감이라는 게, 보통은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던가.’
책 속에 나왔던 여타 대회에서도, 우승자들은 제가 평소에 마음에 품었던 레이디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보통은 신께 감사드리거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것도 아니면 지금까지 후원하고 이끌어 준 부모님이나, 스승님께 대한 감사 인사를 하던가.
‘뭐, 그런 말들은 정말 하나도 어려울 게 없지만…….’
솔직히, 지금의 그녀를 여기에 있게 한 사람은, 샬롯 본인과 요제프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에는 그냥 좀 고마운 정도지,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할 정도로 고마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요제프에겐 고맙다는 말을 이미 수십 번쯤 한 데다, 바로 옆에 서 있기까지 하는데 굳이 언급할 필요야 없을 테고…….’
샬롯은 새삼 이번 생은 그렇게 구속받으며 살지 않기로 했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로 했던 다짐을 떠올리며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올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유를 굳이 꼽자면 저 자신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와 여러분의 앞에 다시 또 좋은 경기를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축복이 가득한 오늘이 되시길.”
보통의 소감은 ‘누구 덕분’이라는 말이 열 번쯤 등장하게 마련인데 샬롯의 소감에는, 어느 하나의 이름조차 언급된 게 없었다.
깔끔하기 짝이 없는 소감에, 관중석은 일순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샬롯이 제 말이 끝났다는 것을 명확히 표시하며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관중들은 그제야 열렬히 환호했다.
와아아아-.
멋있어요-!
샤를로테 세티야 만세-!
대회장 바닥으로 꽃송이들이 쏟아지듯 떨어져 내렸다.
관중들 중 그 누구도 샬롯이 정말로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어서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어린아이라 짧게 연설을 마친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의 의중을 알아챈 건, 요제프 하나뿐이었다.
요제프는 이날이 오기까지 꽤 오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샬롯의 과거를 다 안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힘주어 잡아 주었다.
사회자는 관중석의 열렬한 환호가 잦아들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겨우 다시 입을 뗐다.
- 요제프 황자 전하께서도,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요제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샬롯의 손을 놓았다.
샬롯은 제가 그랬듯, 요제프도 단상 쪽을 향해 한 발짝 앞으로 가려고 손을 놓은 줄 알았지만, 그는 앞이 아니라 샬롯에게서 멀어지는 쪽 방향으로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 섰다.
그러곤 품 안에 가득 안고 있던 꽃다발들을 쏟아 놓듯 옆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겨우 자유로워진 요제프가 우승자의 화관을 들고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가 양손으로 화관을 들자, 삽시간에 조용하던 관중석이 요란스러워졌다.
“고백하실 레이디가 있는 거 아냐?”
“그런 것치곤 정해진 상대가 없으시지 않아?”
“황자님도 열 살이 넘으셨는데, 약혼 상대가 없으셔?”
“……넌, 눈치가 좀 있어 봐라. 그럼 있으시겠냐?”
“……아.”
지금까지 요제프 황자가 자라 온 배경을 알고 있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큰 술렁거림이 지나갔다.
전통적으로 칼그림자의 날 대회에서 우승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거나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하곤 했다.
워낙 고위 귀족가 자제들이 많이 참석하는 대회였고, 또 어릴 때부터 결혼이나 약혼할 상대가 정해져 있는 이들이 많이 참여한 대회였기 때문에 그건 그냥 이미 정해진 것을 공식 석상에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칼그림자의 날 우승자라는 영예를 얻은 기사에게 청혼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로망이었다.
설령 이미 정해져 있는 뻔한 관습이라고 해도, 이 관습은 지금까지 뭇 레이디들의 심장을 뛰게 했었다.
그런데 요제프 황자는 정해져 있는 상대가 없는데도,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화관을 꼭 쥐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관중석이 술렁일밖에.
“설마…… 그동안 마음에 품어 오신 레이디가 있는 건 아닐까?”
“……그게 나면 어떻게 해?”
“내가 아까 그랬지. 넌 눈치가 있어 보라고. 양심도 좀 있어 봐라. 네가 뭐 잘한 게 있었어?”
“……아니, 그래도.”
영애들 사이에서는 혹시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속살거림과 설렘이 오갔다.
샬롯은 그 광경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옛날 같았으면 요제프가 정말로 청혼을 한다고 해도 그걸 기분 좋게 받아들이긴커녕 질색하고 뺨이라도 때렸을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이 대회 하나가 지난 뒤엔 영애들이 죄다 설레는 얼굴을 하는 게 너무 뻔뻔하고 우스웠다.
하지만 그게 너무 좋았다. 요제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샬롯은 요제프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사람들이 오해할 법도 하다 싶을 정도로, 요제프는 화관을 꼭 움켜쥐고 생각에 잠긴 것처럼 대회장 벽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시간만 끌고 있었다.
‘뭐, 정말로 요제프가 청혼하고 싶은 레이디는 없을 거 아냐. 한참 지나서야 샬레스 황녀랑 만나니까…….’
샬롯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요제프에게 별도로 조언한 것은 없었는데도 그가 이렇게 마치 누군가에게 청혼이라도 할 것처럼 시간을 끄는 게, 그녀는 정말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요제프가 침묵한 채 시간이 늘어지자, 조금 당황한 얼굴의 사회자가 마저 진행을 시작하기 위해 입을 뗐다.
- 아…… 저희가 요제프 황자님께 너무 무리한 요구를 드린 것 같습니다.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고 하시니…….
“아니.”
- ……네?
“있다.”
요제프 황자가 아주 느리게 결심이 선 사람처럼, 손바닥을 펴 사회자의 말을 만류하곤 샬롯을 향해 돌아섰다.
샬롯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곧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에, 요제프 황자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그녀의 빈손을 끌어와 그 위에 화관을 올려놓았다.
술렁이던 관중석이 그대로 정적으로 얼어붙었다.
요제프 황자의 청혼이라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너무 많은 것인데, 그 상대가 세티야 공작가 직계 막내딸이라는 것이 모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게다가 요제프 황자는 황제도 버리다시피 했던 막내아들이지만 이 대회를 통해서 다시 주목받게 된 거고, 상대는 가문에서 거의 내놓다시피 한 샤를로테 세티야였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게 된 거라…….
둘 중에 누가 아깝고, 누가 더 잘났다는 판단도 이상하리만큼 퍼뜩 서지 않았다.
그리고 얼어붙은 것은 또 한 명, 더 있었다.
샤를로테는 도대체 요제프가 왜 이러나 싶어서 그대로 굳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