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이게 뭐야?”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서야, 샬롯은 제가 아이작이 인도해 온 넓은 돌다리 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작이 말했던 환영이 뭔지도.
그가 왜 자신을 여기로 인도해 왔는지도.
좁디좁은 돌다리 위에 서 있었다면, 발을 헛디뎌 추락하고도 남았을 거다.
‘정말…… 나이트메어라는 마수는 끔찍해. 아이작의 말대로 상대하고 싶은 놈은 아니네……. 그런데 아이작은?’
자신을 데리고 이 돌다리에 온 뒤, 아이작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걸까?
샬롯은 재빨리 시선을 옮기며 그를 찾았다.
“……아버지가 죽은 건, 당신 때문이 아닌가?”
그때 아이작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아버지?”
샬롯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작은 그녀가 서 있는 돌다리를 두 개 더 건넌 다른 다리에 서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같은 분노를 갈고닦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지독히 정제된 분노가 녹아 있었다.
그녀는 어쩐지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하며 두 팔을 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이작이 가주가 된 다음, 모든 세티야 가의 구성원들을 전장으로 내몰다시피 한 게…… 이유가 있었나 봐.’
샬롯은 숨을 죽이고 그의 목소리를 엿들었다.
아이작은 고고하게 서서,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었다.
홉뜬 그의 눈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재능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그렇게 쉴 틈도 없이 전장으로 내모는 게 옳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러면, 재능이 없는 당신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퍽 편하게 쉬었겠군.”
샬롯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작이 보고 있는 환영은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아버지 로룸에 대한 것인 듯했다.
샬롯은 아이작을 깨우고 싶어서 무턱대고 손을 뻗다가, 그래도 될지 확신이 들지 않아 흠칫, 멈춰 섰다.
‘……아이작은 처음부터 이 환영을 보고 싶지 않아 했어. 자신이 무슨 환영을 볼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도 싫어했던 거라면, 아이작이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오기 어려울 만큼 그 환영이 버거울지도 몰랐다.
샬롯은 혀를 찼다.
정말로 주최 측이 잔인하다는 아이작의 말이 꼭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대회에 참가했기로서니, 이런 꼴을 겪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정말 너무해.’
리카르도 황자 정도쯤 되면, 뭐 대단히 극복할 과거가 없어서라도 이런 정신계 공격은 수월할지도 모르지.
“……나는 이제, 복수만을 위해서 살게요. 그럴게요, 아버지.”
아이작이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그의 감은 눈가로 흐르는 긴 눈물방울.
샬롯은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으로 자리를 떴다.
‘이 대회를 빨리 끝내는 게 내가 아이작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휙, 휙, 휙.
참가자들이 짙은 안개 속에 한꺼번에 묻힌 뒤로 고개를 빼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려고 애를 쓰던 관중들의 눈에, 안개를 뚫고 뛰어오르는 한 명의 인영이 보였다.
분홍빛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부드럽게 땅을 박차고 높디높게 뛰어오르는 그녀는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마치 전장의 신처럼도 보였다.
오오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마치 그림자처럼 보이는 새카만 형상이 뒤따르는 것도 오래지 않아 관중들의 눈에 들어왔다.
“요제프!”
막 돌탑의 중간을 지나던 샬롯이 제 뒤에 따라붙은 요제프를 반갑게 맞이하며 환히 미소 지었다.
“어떻게 됐어?”
샬롯의 질문에 요제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이겼어.”
샬롯은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길게 웃어 보였다.
닿지 않을 줄 알면서도 허공에 주먹을 가볍게 내밀어 보이자, 요제프가 덤덤하게 함께 주먹을 내밀어 보였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뭘?”
“누군가 한 명은 떨어져야 하잖아.”
요제프는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렇겠지.”
샬롯도 그의 반응이 너무 이해되었다.
솔직히 이제는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돌탑의 정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응. 근데, 누가 됐든, 난 이번 경기를 빨리 끝냈으면 좋겠어. 우리,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저 정신 나간 말을 차지하기로 하자.”
“나이트메어 말이지?”
“그래.”
둘은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구간부터는 순전히 팔 힘만으로 올라야 하는 구간이었다. 긴 밧줄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고, 발을 디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샬롯과 요제프는 별다른 불평도 없이 각자 줄을 하나씩 차지하고 돌탑의 마지막 구간을 올랐다.
그녀도 그랬지만 요제프도 워낙 몸이 가벼워서 어렵지 않게 오르는 눈치였다.
샬롯은 요제프가 어떤 환영을 봤을지 궁금했지만, 그저 덤덤한 얼굴을 하고 제법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그의 얼굴을 보니 굳이 묻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좋은 환영은 아니었을 테니까.
샬롯 또한, 요제프에게 털어놓고 싶은 그런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저, 해 두고 싶은 말이 있긴 했다.
“요제프.”
“어?”
“고마워.”
뭐가, 라고 되물을 줄 알았는데.
요제프는 샬롯을 흘끗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끔 저렇게 그냥 제멋대로 받아들여 주는 게, 참으로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걸 요제프도 알까?’
이런 순간마다 이상하리만큼 그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샬롯은 픽 웃으며 손을 뻗었다.
더 이상 쥘 밧줄이 남아 있지 않았고, 돌탑의 정상에 놓인 비죽이 솟은 돌이 손에 만져졌다.
양손으로 돌을 꽉 쥔 샬롯은 발에 기를 휘감아 바닥을 세게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샬롯의 몸이 허공을 한 바퀴 빙 돌아, 돌탑의 정상으로 가볍게 안착했다.
요제프도 거의 동시에 돌탑의 위에 두 발을 딛고 올라섰다.
샬롯은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둘 사이에 고고하게 서 있는 거대한 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흐릿한 형상의 말이 큰 말뚝에 묶여 있었다.
몇 발짝만 더 다가서면 만질 수 있을 거리인데도, 이상하게 흐릿하게만 보였다.
분명히 투명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똑바로 눈을 뜨고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어도, 그 형상이 존재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딘가 몽환적이고 안개 같은 존재였다.
‘……어둠을 닮았어.’
게다가,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했다.
황가의 말인 아슬란에 비해서도 거의 두 배 가까운 덩치였다.
거기에 덩치의 두 배는 될 만한 거대한 날개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으니 그 존재감이 대단했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다른 여타의 말을 대할 때처럼 손을 내밀었지만, 그 검은 말은 샬롯을 바라보며 투레질을 할 뿐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시선에, 지독한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샬롯, 이건 일반적인 말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길들여진 적도, 교육을 받은 적도 없어.”
요제프가 샬롯에게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응. 가까이 다가가면, 뒷발에 걷어차이겠어.”
“그냥 마수야. 더 다가가지 마.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어.”
샬롯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지만, 당장 검을 뽑아 들 생각은 왜인지 들지 않았다.
이런 본능밖에 남아 있지 않은 마수가, 어째서 단 한 명의 참가자만 태울 수 있다는 걸까?
‘한 사람만 태우라고 교육할 수 있는 상태로는 보이지 않는데.’
샬롯은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나이트메어에게 다가갔다. 지독한 경계심을 품은 나이트메어가 앞발을 들며 그녀를 위협했다.
그녀는 말뚝에 나이트메어를 묶어 둔 끈은 검으로 간단하게 끊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확인했지만, 끈을 잘라 내진 않았다.
‘아마, 끈을 풀고 나서 나이트메어의 위에 올라타면 즉각 우승자가 될 테지.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그리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나이트메어에게 올려진 안장 위로 훌쩍 올라탔다.
오오오-.
관중석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나이트메어가 기수를 떨어트리기 위해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샬롯은 고삐를 다잡고 나이트메어의 아름다운 검은 갈기에 바짝 매달리며 몸을 낮춰서 그 난동을 견뎌 냈다. 그것은 제자리에서 앞발을 치켜들며 몇 번이나 기수를 떨어트리려고 시도했지만, 샬롯은 아주 익숙한 기수처럼 고삐를 틀어쥐곤 나이트메어에게 용케도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날뛰어도 평온하게 등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은, 말을 길들이는 첫 번째 방법이었다.
나이트메어는 그렇게 일반적인 말 취급을 당한 것은 처음인지, 황당하고 초조하다는 듯 앞발로 땅을 쾅쾅, 굴러 댔지만 의외로 그리 오래지 않아 난동을 멈추고 씩씩거리는 콧김을 뿜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