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65)화 (65/123)

65.

돌다리에서 돌다리로, 또 그 돌다리에서 다음 돌다리로.

몇 개의 돌다리를 계속해서 오르던 샬롯이 걸음을 멈춘 곳에서는, 검을 늘어뜨린 아이작이 즐거워서 미칠 것 같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샬롯은 그런 그의 심정을 너무 잘 알았다.

‘나도 즐거워 죽겠어.’

아이작은, 그간 적수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의 존재였기 때문에 더더욱, 조금이라도 새로운 사람과 검을 섞는 게 신이 날 거다.

샬롯은 다시 한번 검을 뽑아 들곤 아이작을 바라봤다.

“좀 지치진 않으셨어요?”

아이작이 픽픽 웃으며 눈을 길게 휘었다.

“날 지치게 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중인데. 좀 부탁하지.”

“그럼 저도, 좀 부탁드려 볼까요?”

아이작과 샬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움켜쥐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탁! 챙, 챙! 부웅! 붕! 챙!

오러를 두른 검과 검기를 두른 검이 부딪는 소리가, 화려했다.

샬롯은 씩 웃으며 뒤로 널찍하게 뛰어 간격을 벌렸지만, 아이작은 그녀가 그렇게 멀리 간격을 띄우도록 두질 않았다.

아이작의 검술 스타일은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비교적, 비슷한 검술이야. 속검에 가깝고, 허수를 잘 섞어 쓸 줄 아는.’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역시 나이였다.

샬롯의 짧은 팔다리에 비해 제법 팔다리가 긴 아이작은 닿는 리치도 훨씬 길었고, 근육을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실력도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저 재밌다고 느꼈다.

그녀에게도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까.

바로 기를 운용하는 기술이었다.

아이작을 비롯한 다른 참가자 중에서도 오러를 쓸 수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오러를 쓰는 방식은 주로 검에 오러를 둘러 절삭력을 높이고 검의 길이를 늘이는 방식이었다.

간혹 오러를 쏘아 보내는 검강을 쓰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이런 비무 대회에서 쓰기엔 너무 위험한 방식이었으니까.

이건 예선전과 같이 일반적인 무력 공격이 전혀 듣지 않는 적을 상대할 때는 정말 꼭 필요한 유효한 방식이었지만, 1:1 대진인 데다 상대도 오러를 쓸 수 있는 이상 대단한 장점은 못 되었다.

물론, 오러에 스치기만 해도 검에 당하는 상처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는다는 공포감 자체가 상대에게 큰 위협이 되긴 했지만, 샬롯에겐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 검을 든다는 것 자체가 나의 죽음 또한 각오하겠다는 뜻이니까.’

샬롯은 땅과 하늘의 기를 제 몸속으로 받아들여, 그 기운을 자유로이 몸속 길을 통해 운용했다.

그녀가 기를 다루는 방식은, 그냥 단순히 검에 두르는 것뿐 아니라 다양했다.

발의 각력을 높여 더 높이 뛰어오를 수도 있었고, 기를 팔로 보내 모자란 근력을 충당할 수도 있었고, 기를 이용해 속도를 빨리해 검의 허상을 만들 수도 있었다.

아이작이 바짝 다가들며 금색 오러를 두른 검을 찔러 왔지만, 샬롯은 세 번 그것을정면에서 검 면으로만 막아섰다.

검이 오는 방향을 정확히 알고, 거기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검의 면으로만 막아 내는 기술은 이런 속도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아이작의 얼굴에 점점 더 큰 미소가 번졌다.

아이작의 미소를 눈치챈 샬롯도 저도 모르게 입술이 길게 호를 그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뭘, 이럴 줄 알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재밌을 줄 알았다고.”

‘정말 검 바보는 못 말린다니까.’

샬롯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아이작의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챙, 챙, 챙!

솔직히, 그녀도 이렇게 한 시진이고 두 시진이고 계속해서 검을 주고받고만 있으라면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즐거웠다.

단순히 내력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의 실력을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누군가와 검을 주고받는다는 건 그렇게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검을 더 잘 쓰시네요, 아이작 오라버니.”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평가당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챙, 챙!

다시 두 합, 또다시 세 합의 검을 주고받는 사이에 둘의 몸은 훌쩍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고, 다시 바로 옆에 있는 돌다리로 장소를 옮기곤 했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차마 눈으로 다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수준 높은 공방을 보며 열띤 환호를 보냈다.

결선은 1:1 경기가 아니었기에, 여기서부터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참가자들의 말소리는 관중석에 전달되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기였다.

그때, 묘한 안개가 위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샬롯은 치열하게 검을 섞으면서도, 그 안개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대회에 있는 모든 것이 허상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안개도 무슨 장치인지 거기에 짙은 기가 섞여 있음이 느껴졌다.

‘저게 뭐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바람이 때마침 불었고, 그 희뿌연 안개는 산 중턱에 놓인 구름처럼 순식간에 시야를 야금야금 잡아먹기 시작했다.

“……음?”

계속해서 샬롯을 밀어붙이듯 바짝 간격을 좁히기만 하던 아이작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검의 속도를 늦췄다.

그러곤 주위를 흘끗 돌아보더니 혀를 찼다.

“빌어먹을. 벌써?”

아이작의 검이 완전히 멎은 것과, 그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초조한 듯한 얼굴을 하는 것에 조금 놀란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벌써예요?”

“……환영. 나이트메어가 메인 과제일 때부터 이럴 거란 생각은 했지만…… 놈을 잡으러 가기 전부터 환영 마법을 흩뿌릴 줄은 몰랐군.”

“환영 마법?”

“그래.”

아이작은 몇 번이고 더 혀를 차더니 샬롯에게 훌쩍 뛰어 다가왔다. 샬롯이 놀라서 옆으로 길을 틔워 주자, 아이작은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

샬롯은 아이작이 좀 더 넓고 발을 딛기 편한 돌다리로 옮겨 가 서는 것을 보며 거기로 따라갔다.

“환영이 뭐예요?”

“마탑 놈들은, 결선에서 자주 이런 짓을 하는데…… 지들이 무슨 대단한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사람을 꼭 이딴 시험에 들게 하거든.”

“그러면…….”

“나이트메어는 사람의 꿈을 지배하는 마수다. 아마 별로 보기 좋지 않은 환영을 볼 거다. 젠장맞을 마탑 놈들.”

아이작이 이렇게 평정을 잃고 욕하는 모습은 솔직히 처음 보았다.

작중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왔던가 싶을 정도로, 낯선 모습이었다.

늘, 그저 단정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소설 속에서 세티야 가의 가주로 활약했던 아이작은.

샬롯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아이작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문득 이 대회의 원래 우승자가 리카르도였던 것을 떠올렸다.

아이작과 리카르도가 붙는다면, 당연히 아이작이 리카르도를 위해 승리를 양보하리라 생각했던 건 그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그냥, 아이작이 굉장히 취약한 뭔가가 있다면?

“……그게 대체.”

샬롯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녀 주변의 온 사위가 검게 물들었다.

* * *

“……네가 기어코 오의를 깨달았구나.”

꿈에서도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샬롯은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소나무가 서 있었고 그 아래에는 화산파의 수제자 후가 서 있었다.

자신이 사형이라고 불렀던 사람. 자신을 매정하게 떠밀어 버렸던 사람.

그자가 거기 있었다.

“……여기 어떻게, 당신이.”

주저 없이 앞으로 다가서는 후를 보면서, 도화는 제가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하디평범한, 긴 흑발을 가졌다.

모든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후가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피해 뛰어올랐지만, 후가 손에 내공을 감아 제 다리를 향해 손을 뻗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샬롯은 이다음에 뭐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후가 자신을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고, 환희에 찬 미소를 지으리라. 그리고 자신은 다시 지옥 같은 1년을 보내게 되리라.

끝 간 데 없는 절망이 그녀의 온몸을 덮쳐 왔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리려는데,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계속. 줄곧. 네가 믿든, 믿지 않든.’

그 순간, 요제프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왜일까.

‘그러니까 어디 가서 지고 다니지 마.’

그리고 그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요제프의 별것도 아니었던 그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샬롯은 저도 모르게 이를 꽉 악물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내가 도화든 샬롯이든, 아무래도 좋아. 그래도 이제, 나를 믿어 준 사람이 있잖아. 그런 내가 어디 가서, 지고 다닐 것 같아?’

눈을 번쩍 뜬 그녀는 피가 나올 것같이 강하게 입술을 깨물며 손으로 허공을 가격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장력이 뻗어 나갔다.

‘어……?’

그때의 도화는 분명 혼자서 훈련하느라 지칠 만큼 지쳐서 대처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붉은빛을 띤 장력은 샬롯이 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운을 품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 장력은 날아가서, 그대로 모든 것을 깨부쉈다.

징그러울 만큼 짜증 나는 미소를 띠고 있던 후도, 소나무도, 화산파의 기암절벽도 모두 그대로 거울이 부서지듯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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