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64)화 (64/123)

#64.

사회자가 황제의 말을 받아, 결선에 관해 설명을 이어 갔다.

- 이변이 많은 진출자 명단에 관중석의 열기가 정말 뜨겁습니다! 아찔아찔, 오싹오싹한 이번 결선의 사회를 맡아 영광입니다. 이번 결선에서는 진출자 모두가 자유롭게 대전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환호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사회자는 설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승리 조건은 다른 진출자를 모두 제치고 가장 먼저 나이트메어에 도달해서, 그것을 타고 본부석으로 도착하는 겁니다. 나이트메어는 한 사람의 무게만 감당할 수 있다는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모두 경기를 즐기실 준비가 되셨나요?

열광하는 환호 소리가 경기장을 무너뜨릴 듯 진동했다.

* * *

황제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 카밀라 공작의 가까이에 앉아 있던 제롬은 아까부터 한참 동안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러슬.”

“네,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말이다. 네가 떨어져서 내 옆에 있고, 샬롯이 저 대회장에 있는 거란 말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니까, 러슬. 샬롯이 저기에 있고, 네가 떨어진 거란 말이잖아.”

자신이 대회에서 패배해서 세티야 가의 자리에 합류한 뒤로, 열 번도 넘게 반복되는 질문에 러슬이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다.

“아, 그만 좀 하세요, 아버지. 저도 여기 있고 싶겠습니까? 그냥 대기석에 있을 걸 그랬어요.”

제롬은 그제야 좀 진정하고 입을 다무나 싶었지만, 샬롯과 요제프가 나란히 입장하는 것을 보자 입이 또 멋대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러슬.”

“……왜요.”

“저 샬롯이, 내가 아는 샬롯이 맞겠지……? 어디서 애가 바뀌어 온 건 아니겠지?”

러슬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알던 샬롯이 있기나 했어요? 그냥 조용히 관전이나 해요.”

“……그래, 그러자.”

제롬이 겨우 진정하고 등받이에 등을 붙였을 때, 러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회장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비야키 녀석, 어지간히 샬롯에게 불만이 많던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뭐?”

“뭐…… 큰일이야 없겠지만.”

러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턱을 쓸었다.

러슬도 내심 샬롯이 결선까지 온 것에는 운 요소가 꽤 많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제 경기에 정신이 팔렸었기도 했거니와 조가 갈려서, 그사이의 다른 대전들을 전혀 볼 여유가 없었다.

‘비야키가 괜히 샬롯을 갖고 노는 모습을 볼지도 모르겠네.’

러슬은 어차피 샬롯이 누군가의 손에 떨어질 거라면, 아이작의 손에 떨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혼자 생각하며 경기장을 주시했다.

* * *

샬롯은 사회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요제프는 지금이 그렇게까지 둘이 고대하던 결선 대회장인 것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그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고요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샬롯은 그런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할지는 정해 두지 않았다.

제가 이기면 카밀라에게 소원을 말할 수 있어서 좋았고, 요제프가 이기면 그것도 좋았다.

둘 중 누가 이기더라도, 그녀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차분한 얼굴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둘이 붙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샬롯은 서로 힘을 내자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요제프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었다.

‘어쩜 저렇게 귀엽고 반듯할까?’

그녀는 반짝이는 빛 구슬이 둥둥 떠다니는 결선 대회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요제프가, 이 장소에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지쳐만 보이던 그 엉망진창의 요제프가 아니라 이쪽의 요제프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때 사회자의 안내가 끝나 가고, 시종들이 다가와 네 명의 출전자들을 각기 다른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둥그런 모양의 대회장에서 사각형을 그리며 선 네 명의 출전자가 자리를 잡자, 이내 호루라기가 울렸다.

삑!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요란스러운 함성과 함께 결선이 시작되었다.

일단은, 가장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돌탑을 오르는 게 목표이니만큼 샬롯은 땅을 박차고 그곳을 향해 뛰었다. 경공을 가볍게 전개하며 돌다리를 반복해서 오르던 샬롯은, 문득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듣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와, 장난 아니네.’

환영일까, 실제일까?

리카르도 황자 같은 황위 계승 예정 1순위인 황자도 참가하는 대회인데 실제 용암이야 아니겠지만, 오래 보고 있어도 그저 당혹스러울 정도로 실감 나기만 했다.

‘역시 마법이라는 거, 대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기술인지 한 번쯤 배워 봐야겠어. 그건 굉장히 똑똑해야 한다고 하던데, 머리 쓰는 건 전혀 취미가 아니지만…….’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기를 느껴 보았다.

자연은, 그 자연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풀에게서는 풀의 기운이, 나무에서는 나무의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저 바닥에서 들끓는 용암에서는 전혀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저 눈만 현혹한 것에 불과해.’

다시 눈을 뜬 샬롯이 연신 감탄하며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순간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뿐사뿐, 가벼운 발소리. 하지만 요제프의 것보다는 훨씬 무거웠고 아이작의 것보다는 조금 단정치 못했다.

‘비야키인가?’

그녀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예상대로, 비야키의 목소리가 시비를 걸어왔다.

“겁먹었냐?”

샬롯은 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곤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이거, 비야키 오라버니 아니세요.”

스릉-.

긴 백금발을 하나로 꽉 묶은 비야키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모양이었다.

비야키는 왼손잡이 검사인 듯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팔목에 붙여 쓰는 작은 형태의 방패를 붙이고 있었다.

샬롯은 속검을 상대하는 것도 싫어하지 않았다.

‘러슬 오라버니와 직접 붙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실력이 비슷하다는 비야키와 붙을 수 있다니 나쁘지 않네.’

“먼저 와라.”

비야키의 말에, 샬롯은 사양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고선 가볍게 땅을 박찼다.

마치, 평지에서의 걸음과 같이 사뿐했다.

챙, 챙, 챙, 챙!

비야키는 샬롯이 여기까지 온 게 철저하게 운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조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할 정도였고, 언제든 제가 직접 거꾸러뜨려 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직접 검을 섞자 묘했다.

샬롯의 검은 지독하게 빠르지도 않았는데도, 그 끝을 눈으로 정확히 쫓는 것이 어려웠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꽃 이파리를 검으로 베려 노력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정확하게 검을 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제가 준 힘의 절반도 넘게 힘이 허무하게 흘러 버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샬롯의 검끝에서 붉은색의 어떤 기운이 스몄다가 사라질 때마다,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꽃향기? 검에서…… 향기가 난다고?’

비야키는 샬롯과 지독하게 빠른 검 공방을 이어 가며 제가 떠올린 생각을 부인했다.

그런 이야기가 있긴 했다. 검으로 일정 이상의 경지를 이룩하면, 오러에서 향기가 풍기는 경지가 있다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앗차!’

잠깐 다른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좁은 다리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서 있던 몸의 균형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투두둑.

비야키의 왼쪽 발끝이 거의 허공에 가까운 다리의 끝을 짚었고, 거기에서부터 돌가루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절로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렀다.

허상인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도, 눈으로 보고 있는 이상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반대쪽으로 몸을 크게 휘청이는 순간, 샬롯의 검이 비야키의 검을 세게 걷어 냈다.

챙! 탱그랑!

허무할 정도로 쉽게, 비야키의 검이 날아가 저 아래에 놓인 다른 돌다리 위로 떨어졌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비야키가 입술을 짓씹었다.

샬롯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더 하실 거죠? 저 위까지 따라오시면, 그때 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몸을 돌린 샬롯이 검을 갈무리하며 달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비야키는 문득, 샬롯이 돌다리 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듯 달려가면서도 제 발이 닿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는 일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평상시에 계단을 오르듯, 사물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하면 그만이라는 듯했다.

‘……겁이 나는 건, 나였네.’

비야키는 어딘가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인지 실력으로도 어쩌면 제가 뒤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기세에서 졌다.

비야키는 이를 악물고 제 검을 회수하기 위해 돌다리를 뛰어넘었다.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하지만 처음에 샬롯을 만나서 어떻게든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던 그 생각은 이젠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저 아래의 아래에 놓인 하수 주제에 그저 운이 좋은 녀석이라던 생각은, 직접 검을 대고 보니까 절로 쏙 들어갔으니까.

그것은 훨씬 더 대등한 적수를 향한,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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