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 이번 경기는 케이트 탄티누스와 샤를로테 세티야의 대전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선언되고서야 샬롯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입구에서부터 케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정리한 여자아이가 샐쭉 웃으며 대회장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샬롯은 경기장으로 들어서기 전 대진표에서 케이트의 이름을 이미 보았지만, 막상 정말로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니까 솔직히 좀 놀라웠다.
예선에서 슬라임 한 마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서 크게 다칠 뻔했던 케이트는, 생각보다 선전한 모양이었다.
“꽤 많이 올라왔네?”
평소에 샬롯이 이런 말을 란슬롯 무리 앞에서 했다면 어땠을까?
란슬롯이 제일 같잖아했을 테고, 케이트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에게 동조하듯 배를 잡고 낄낄 웃어 댔겠지.
하지만 지금의 케이트는 샬롯의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거나 비웃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마워.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힘냈어.”
샬롯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냥 해 보는 소리야?”
케이트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 무슨 소리야. 아니, 정말로. 정말로…… 네가 그랬잖아. 본선에서 마주치면 사과해도 된다고…….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아니, 일단 내가…… 내가 다 잘못했고, 내가 그렇게 바보처럼 굴었는데도, 넌 나를 도와줬잖아. 정말 고마워.”
샬롯은 그제야 제가 케이트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을 상기했다.
‘……뭐 대단한 뜻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고, 그냥 너무 쉽게 사과하는 걸 듣기 싫어서 해 본 말이었는데.’
하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들이 사과해 왔을 때처럼, ‘생각 좀 해 볼게.’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도대체 얼마나 진심인 건지, 이야기를 하면서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려 대고 있었다.
샬롯은 제가 어쩐지 이런 것에 약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무림인이라서 그런지, 공자님 맹자님 하는 문화권에서 자라서 그런지 여자와 아이와 노인에겐 약했다.
그녀는 제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뭐, 이걸 어떻게 안 받아 주냐.’
“알았어.”
“저, 정말?”
자신의 발끝의 흙에다 동그란 물웅덩이를 만들 기세로 울던 케이트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열 살짜리 여자애를 울리다니, 나도 참 최악이다.’
물론 아홉 살짜리 여자애에게 막 대한 케이트가 더 나빴지만, 자라 온 환경이 대체 뭐라고 그런 생각부터 들고 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난 손수건 같은 건 없단 말이야.”
“정말이지? 흑, 고마워…… 꼭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리고 나 손수건 있어.”
샬롯은 히끅거리며 울음을 삼키는 케이트가 제 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걸 보다가, 그만 어딘가 귀엽다는 생각에 작게 웃어 버렸다.
이렇게 많은 관중이 경기를 보겠다고 둘을 지켜보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 다 하고 저 울 거 다 울고 눈물을 그치는 것도 여유 있게 하는 게 너무 귀족적인 심리라서 우습고 재밌었고, 그리고 저렇게까지 속내를 보일 정도로 순진하게 구는 것도, 친구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는 것도 재밌었다.
‘……친구라,’
샬롯은 아직 제겐 어색한 단어를 입속으로 뇌까려 봤다.
굳이 분류하자면, 제게 있어 친구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금 요제프 한 명일까?
어쩌다 보니 주변에 있는 친한 사람이 대부분 남자이기도 해서, 샬롯은 또래의 여자 친구가 생긴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좋아.”
“……어?”
“친구가 되는 것도, 좋다고.”
“……어어? 진짜? 진짜지?”
“응. 진짜. 그러니까, 일단 저 난처해 보이는 심판을 좀 어떻게 해 줄래?”
샬롯의 말을 듣고서야 케이트가 고개를 돌려 심판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조카에게 차마 재촉을 할 수 없었던 가엾은 심판은, 대회 시작 신호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손에 들고 안절부절못한 채로 둘을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케이트는 그제야 얼른 손수건을 집어넣고 그녀의 주 무기인 듯 보이는 가늘고 긴 창을 고쳐 쥐었다.
삐이익-
그제야, 심판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었다.
시작까지 그렇게 오래 끈 것치고, 둘의 대진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고작 세 합.
그것도, 그중 두 합은 제대로 합을 맞대었다고 하기도 허무할 정도로, 케이트가 허우적거리는 창으로 겨우겨우 샬롯의 검날을 튕겨 낸 것이었다.
“……너, 정말 강하구나.”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항복을 선언한 케이트가, 어딘가 눈이 부시다는 눈을 하고 샬롯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약한 거야.”
샬롯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어 케이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더 강해질 테니까. 정말로 꼭 친구 해 줘야 해?”
“……뭐,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원한다면 겨루기 상대는 되어 줄게.”
“정말, 정말이지?”
케이트는 애초에 이길 생각도 없었는지, 그녀의 패배를 선언하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누구보다 기쁜 얼굴로 활짝 웃었다.
* * *
대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차츰 결선에 진출할 자의 윤곽이 잡혔다.
의외의 인물들이 계속해서 승기를 잡았다. 샬롯 세티야, 요제프 3황자. 둘 다 결선에 진출하리라곤 예상조차 못 했던 이들인데, 아주 순조롭게 결선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결승에 진출했다는 것은, 당연히 결승에 진출할 거라 예상했던 인물들이 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연히 준결승, 아니 결승까지는 올라가리라 생각했던 러슬은 요제프 황자를 상대로 100여 합을 치열하게 주고받은 뒤에 깔끔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관중석에 있던 일반인 중에 러슬과 요제프의 대전을 제대로 모두 지켜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수준 높은 대전이었다.
러슬은 느리고 묵직한 검과 한 손 방패를 쓰는 스타일이었고, 요제프도 속도를 그렇게 올리기 어려운 양손 검을 쓰는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일반인은 따라잡기도 어려울 속도로 검을 섞었다.
처음에는 요제프가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대충대충 검을 섞던 러슬이 점점 더 진지한 얼굴이 되고 난 뒤에는 더욱더.
요제프의 재능이 워낙 출중했으나 러슬은 실전 경험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열다섯 살의 러슬과 열두 살의 요제프는 덩치도 꽤 차이가 났기 때문에, 마지막에 요제프가 러슬의 방패를 아예 두 쪽으로 갈라 버리면서 공격적으로 덤벼들고서야 승부는 결론이 났다.
차분하게 승부를 볼 줄 아는, 대단한 실력을 숨기고 있는 황가의 어린 범.
그 대전을 계기로 요제프에 대한 관중들의 호감도가 대단히 높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 *
그리고 마침내 결선이었다.
결선은 대회장의 준비가 제법 필요한지, 참가자들에겐 대기실에서 각자 쉴 시간이 주어졌다.
샬롯은 관중석의 뜨거운 환호를 한 귀로 흘리며 제 대기실로 들어와 앉았다.
사실 쉬는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그녀는 대기실의 높은 의자에 앉아 크리스털 접시에 가득 담긴 과일과 높다란 잔에 담긴 무알코올 음료를 몇 입 먹다가 절로 한숨을 쉬었다.
‘정신적으로 지치긴 하네.’
아마, 다른 참가자들은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쳤을 거다.
예선에서부터 결선까지 하루 안에 모두 치르는 스케줄은, 정말 쉽지 않았다.
‘요제프랑 같은 대기실에 있다면 좋았을 텐데. 머리라도 쓰다듬게.’
샬롯은 어딘가 허전한 손 안을 들여다보다가, 요제프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들이 저도 모르게 떠올라 혼자 미소 지었다.
요제프는 정말이지 점점 더 귀여워지는 것 같았다.
딱히 표정이 더 다양해진 것도 아니었고, 말수가 그렇게까지 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요제프가 그녀를 위해 주는 것 같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두고 보라던 건 뭐였을까?’
그녀는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자신을 옆에 두고 요제프가 뭔가 대단한 거라도 보여 주겠다는 듯 선언했던 말이 문득 기억났다.
‘항상 곁에 있겠다는 걸 알려 주겠다고 했던가? ……정말 귀여워.’
그런 걸 어떻게 알려 주겠어.
샬롯은 요제프의 포부 하나는 귀엽다고 생각하며 뻐근한 온몸을 길게 늘여 뻗었다.
토너먼트 방식이기 때문에 각자가 지금까지 겪은 경기 수는 거의 균일하게 다섯 경기 정도일 것 같았다.
샬롯은 그녀의 승리가 선포되던 순간마다 점점 더 크게 쏟아져 내려오던 박수 소리와 함성을 상기하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계속해서 무시당하는 투명 인간으로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는 것도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군중이란, 손바닥 뒤집듯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구나 싶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