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분명, 요제프 황자가 검을 잘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리카르도보다 더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천박한 여자의 아들인 주제에.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어차피 권력을 탐하지 못할 주제라면 고개라도 납작 숙이고 살아갈 줄 알았다.
게다가 전혀 모르는 체하고 꾀병인 양 몰아가고 있었지만, 요제프 황자의 몸이 안 좋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복도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 일도 왕왕 있었다.
다 천박한 핏줄 탓이라 생각했다.
저대로라면, 별다른 수를 쓸 필요도 없이 곧 혼자 앓다 죽겠거니, 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경기장에서 한쪽 팔을 높이 쳐들고 있는 요제프를 바라본 황후가 다시 한번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때, 황제가 옆에 선 호위 중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황후는 일순간 그녀의 남편, 산체스 황제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엔, 황후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리카르도의 패배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분명 그의 잿빛 눈동자 속에, 어떤 이채가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했던 원석을 발견한 듯한 얼굴이었다.
황후는 붉게 색을 바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이제 요제프 황자를, 버리는 패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저 재능을 썩히기 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게다가 모든 관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새롭게 등장한 신예를 환영하는 이 분위기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해서든, 요제프 황자를 황제의 눈앞에서 치워야 해. 다 내 거야. 그 개뼈다귀 같은 여자의 아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상관없었다.
제 아들이 실제로 요제프 황자보다 실력이 떨어지든, 어떻든.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현재로선 그녀의 권력을 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남들이 다 일어서도 고집스레 앉아 있던 그녀는, 황제의 얼굴을 본 뒤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람들이 다 황후인 자신의 낯을 살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한 나라의 국모로서, 리카르도 황자의 어미로서, 지금 그녀가 보일 모습은 흥분한 모습이 아니었다.
책잡힐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황후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떠 버리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억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짝짝짝.
승패가 결정되고도 한참 동안 이어지던 정적은,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작은 박수로 겨우 깨졌다. 그리고 그 박수가 기폭제가 된 것처럼, 온 대회장이 커다란 박수 소리에 휩싸였다.
체이커 국에서 실력이 좋은 사람은, 그가 그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한 시간에 대해 응당한 대우를 받는 게 마땅했다.
3황자가 제 실력을 입증한 이상. 아무리 그간 많은 구설에 올라 있었다 한들, 이 정도 박수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요제프는 귀가 따가울 듯 쏟아지는 박수 소리 속에서도, 조금도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부닥친다면 저도 모르게 으쓱하고 어깨가 올라가게 마련이었지만, 그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속에 있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선 한곳만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손뼉을 쳤던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반으로 자른 통나무로 만들어진 출전자 대기석에 앉아서 치아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요제프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 내었다.
‘잘했어. 너무 고생했어, 내 새끼.’
샬롯이 입술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누님’을 뛰어넘어서 ‘엄마’라도 된 듯이 종알거리는 게 불만이라는 듯, 요제프는 멀뚱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샬롯은 그런 요제프가 너무 재밌다는 듯, 그렇게 멀리서도 배를 잡고 까르르 웃는 시늉을 해 보이며 다시 한번 정정해서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요제프, 너무 고생했어. 잘했어.’
그제야 요제프는 굳어져 있던 얼굴을 허물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둘은 어쩐지 이 세상에 단둘밖에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시종일관 그를 외면하기만 해 왔던 황제며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샬롯만을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오로지 샬롯이 있는 방향을 향하여.
* * *
산체스 황제는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서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요제프를 향해 가 닿아 있었다.
그는 이런 대회를 좋아했다.
좋아하다 못해 열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어린 날에는 황자의 신분으로 대회에 섰고, 거기에서 짜릿한 우승을 맛봤었다. 그는 총 세 번을 참가했는데, 아홉 살에는 본선 세 번째 경기까지 진출을, 열네 살에는 준우승을, 열아홉에는 결국 우승을 차지했었다.
그때는 정말로 대단한 무위라고 칭송을 받았었다.
황제가 되고 나서야, 노력을 기울인 만큼 정당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간혹 펼쳐지는 이런 무도 대회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해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노력해 나갈 방향이 그렇게 명확할 수가 없었으니까.
보기보다 훨씬 더 움직일 수 있는 여백이 작은 삶이었다, 황제의 삶은.
그래서, 이 대회의 마법 같은 시간을 좋아했다. 일상에서 벗어나, 눈앞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그 시간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승패를 결정해야 하는 그 시간을.
‘……요제프.’
황제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이름을 속으로 뇌까렸다.
‘……많이 컸구나. 이젠, 제법 튼튼해 보이는군.’
그는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다음 대진이 진행되는지, 사회자가 누군가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못할 만큼 황제의 머릿속은 실로 복잡했다.
요제프를 닮은, 처연한 얼굴을 종종 짓곤 하던 어떤 여인이 떠올라서.
‘……아렌느도 이 대회를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절로 들어서.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알고 있었다. 아렌느는 절대로 이 대회를 보지 않으리라는 것도.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황제의 눈꺼풀 속에서는, 은발이 잘 어울리는 새하얀 눈꽃 같은 여인이 언제나처럼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모로 틀고 있었다.
아렌느는, 백작가 출신의 시녀였다.
황궁에서 시녀로 일을 한다는 건, 그리 신분이 천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달리 말해, 황제가 그녀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아렌느는 평범한 다른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는 의미다.
황제는 아렌느가 지독히도 좋았다.
처음에는 황후의 존재도 까맣게 잊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아렌느는 황제가 그녀를 사랑하고 아낄수록 더욱더 바싹바싹 말라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렌느가 첫 번째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죽었다.
요즘같이 마법사도 신관도 있는 세상에, 아이가 그리 일찍 죽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민가가 아니라 황실에서.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사내아이는 신관이 진찰을 다녀갈 때마다 점점 열이 올라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하고야 말았다.
아렌느는 일주일을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황제는 그때, 사람이 그렇게 지독하게 오래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렌느가 둘째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제야 황제는 자신이 너무 늦게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지독하게 불안에 떨고 있다는 걸.
아렌느는 그 어떤 값비싼 것을 줘도 싫다고 했고, 처음과는 달리 황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웃지 않게 되었다. 그저, 그녀는 매일같이 제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황제에게 호소했다.
이 아이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황제는 당연히 제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당당히 황자로서 키우겠노라 했지만, 아렌느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렌느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제 복중의 아이가 아들로 태어나면, 그녀를 황비 자리에서 폐하고 아이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자라게 하는 거였다.
황제가 아무리 자신이 아이를 지켜 주겠노라 약조해도, 아렌느는 황후가 능히 아이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황제는 아렌느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 보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렌느는 점점 히스테릭하게 변해 갔고, 그녀 본인뿐만 아니라 황자로 태어난 요제프가 먹는 것까지 모두 검열하려 들었다. 당연히 요제프도 황궁의 음식 자체를 거의 입에 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로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흐르다간 아렌느도, 요제프도 모두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제프가 일곱 살이 지날 무렵, 황제는 뒤늦게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청을 들어주는 거야 어려울 일이 없었다.
본래 신분이 승격하는 게 어려운 법이지, 추락하는 건 아주 손쉬운 법이다.
정숙하지 못하다느니 하는 가당찮은 이유를 지어내는 거야, 정말이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 뒤로 황제는 일부러라도 요제프도, 아렌느도.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요제프에게 제가 주목하면 할수록, 제가 잘해 주려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틀어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요제프는 여기까지 스스로 자랐다.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훌륭하게. 아렌느, 이젠 어떻게 하지?’
황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황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주 느리게 눈을 뜨고서, 아무렇지 않은 척 경기장으로 눈을 돌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