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60)화 (60/123)

#60.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경기장 바닥에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방패가 나뒹굴었다.

앞서 란슬롯이 방패를 쓰지 않겠다고 행동으로 선언했다면, 리카르도 황자는 방패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거였다.

굵직한 근육이 부풀어 오른 오른팔로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해 보이는 할버드를 한 손으로 쥐고 붕붕 돌리는 모습은, 도저히 열네 살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열두 살의 요제프 황자는, 리카르도 황자에 비해서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호리호리한 몸 선 때문에 긴 소매 옷은 조금 헐렁해 보일 정도였고,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창백한 얼굴은 누가 봐도 유약해 보였으니까.

게다가 요제프 황자의 검은 한쪽에만 검날이 있는 휘어 있는 모양의 얇은 검, 세이버였다. 할버드와는 상대도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어이, 요제프.”

리카르도가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참 많은 짓을 하고 다녔던데? 어? 너 약혼하냐?”

그 말 하나에, 그저 서 있기만 하던 요제프의 기백이 바뀌었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로 눈을 숨긴 채로, 요제프는 단숨에 검부터 뽑아 들었다.

스릉-.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곡도가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한쪽만 날이 있는 종류의 검이었다.

가볍게 굽힌 두 다리로 땅을 버티고 선 채로, 천천히 검을 앞으로 기울인 요제프는 묘하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표정을 보이지 않는 채로, 요제프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전 분명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형님.”

“뭐라고? 야, 뭐라고 하는 거야. 좀 크게 말해 봐.”

“오늘, 봐 드릴 생각은 없다고 말입니다.”

요제프에게서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카르도의 표정이 순간 썩어 들어갔다.

요제프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땅을 걷어찼다.

호리호리한 요제프의 몸매를 생각하더라도, 이상하리만큼 빠른 동작에 관중석에 앉아 있던 수백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꺾었다.

요제프가 날듯이 다가서는 방향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은 리카르도가 할버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요제프를 반쪽 낼 듯 살벌한 기세로 아래로 맹렬히 휘둘러지는 할버드에, 반짝이는 녹색 오러가 깃들었다.

-오오오오!

-꺄악, 난 못 보겠어!

관중석이 요란스레 들썩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쾅!

리카르도의 할버드는 그 기세가 무색하게 대상을 놓치고 대회장 바닥에 가 박혔다. 대회장 끝자리까지 들릴 만큼 거대한 충격음이었다.

리카르도는 할버드를 재빨리 회수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되지만, 상대를 놓쳤다.

놓친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정확히 봤는데.’

빗맞은 게 아니라, 아예 놓쳤다.

리카르도의 눈이 새까만 머리의 실루엣을 찾아 정처 없이 방황했다.

‘……어, 어딨지?’

그 순간 그의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한 대.”

곡도의 검면이 리카르도의 어깨를 강하게 때렸다.

“악!”

황자로서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절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올 정도의 아픔이었다.

리카르도는 정면에 서 있는 감독관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호루라기를 입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보곤 제 목으로 바짝 다가서 있는 검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왼쪽 어깨를 때린 검은, 도대체 언제 방향을 바꿔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게 이미 제 목의 오른쪽을 위협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지만…… 요제프가 어린 시절에야 저보다 아주 조금, 실력이 나은 부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실력은 최근 아주 많이 늘었다. 요제프를 협박해 둔 건 그냥 놈이 짜증 나고 꼴 보기 싫어서 알아서 기라고 한 것이었지, 결코 정말로 위협적인 상대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요제프의 꾀병이 꾀병이 아니라고 했다.

그게, 리카르도가 굳이 요제프를 더 이상 견제하지 않았던 이유였기도 했고.

‘금방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이라고 했는데…… 대체 뭐야. 젠장.’

그러니까 이건, 제가 진 게 아니었다.

그냥 한 번의 실수였다.

캉!

리카르도는 요제프의 검을 강하게 걷어 내면서 거리를 벌렸다.

“망할 자식, 무슨 짓을 한 거냐?”

요제프는 이상하리만큼 순순하게 거리를 벌려 주었다. 바로 따라붙어서 다시 한번 끝내기를 시도할 줄 알았는데, 리카르도가 다시 재정비할 시간을 넉넉하게 주었다.

리카르도는 인상을 쓰며, 이번에야말로 방심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곤 양손으로 감싸 쥔 할버드에 오러부터 둘렀다.

“저야, 나쁠 것 없습니다. 이번 대진이 길어진다고 해도. 저도 볼일이 많거든요.”

리카르도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요제프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어딘가 웃는 얼굴이 숨어 있는 것 같은 기괴한 착각이 들었다.

* * *

관중석이 절로 술렁였다.

“……저런 분이셨어?”

“아니, 나도…… 나도, 전혀 몰랐어.”

“……나는, 솔직히 아무것도 못 봤어.”

“끝내기를…… 그래, 나도 잘 못 봤는데, 끝내기를 세 번 시도하신 거잖아. 그동안…… 리카르도 황자님이 단 한 번도 승세를 잡지 못했다고.”

“조용히 해 봐, 지금 또. 또다.”

요제프의 세이버가 리카르도 황자의 목에 가 닿았다.

네 번째였다. 요제프의 세이버가 리카르도의 신체에 가 닿는 게.

“세상에…….”

일방적일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대진이었다.

분명히 일방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힘이 기울어진 방향이, 모두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넣는 것은 요제프 황자였고, ‘어? 어? 어?’라는 감탄사만 연신 내뱉으며 사정없이 궁지로 몰리는 것은 리카르도 황자였다. 제아무리 대단히 무거운 무기를 잘 다룬다고 할지라도, 상대가 전혀 안 될 만큼 속도에서 차이가 나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요제프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네 번째까지, 계속해서 살짝 휘어 있는 완곡도의 칼날이 없는 면으로만 위협하고 있었다.

샤를로테의 말대로.

하지만 리카르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항복을 외치지 않고 제 목에 들어온 검을 강하게 후려쳐 걷어 내었다.

관중들이 바라봐도 이미 실력의 차이가 명백하디명백한데 말끔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대회를 질질 끄는 꼴이란, 절대로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뭐 저런…….”

“……쉿! 말조심합시다.”

“……아니, 그래도 지금까지 몇 개의 대진이 지나갔는데 이런 타국에 보여 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볼썽사나운…….”

하나 차마 큰 소리로 야유하지는 못했지만, 관중들 사이에서 큰 술렁거림이 오갔다.

아마 그가 황자가 아니라 공작가 정도의 인물만 되었어도, 벌써 온 대회장에 야유가 쏟아졌을 것이었다.

관중석의 가장 아래에 드러눕듯 기대 있던 황제도 어느새인가 벌떡 일어나 펜스를 움켜쥐고 있었다. 리카르도를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만 있었다.

* * *

참 반전이 많은 대회였다.

검술, 창술 등 무술이라는 것은 아무리 재능이 대단하다 한들 나이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몸이 완전히 다 성장한 뒤에는 한두 살 차이가 별로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한창 성장할 아이들은 1년이 아니라 한 달 사이에도 서로 성장한 폭이 달랐다. 그것은 종종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칼그림자의 날 대회에서는 보통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 많은 아이들이 더 좋은 무위를 선보이는 게 당연했다.

아홉 살, 열두 살 이런 나이의 꼬맹이들은 지금은 예선이나 통과하면서 제 얼굴과 이름을 관중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참가하는 거였다. 미래의 어느 날, 또 제가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 대회는 너무 이례적으로 어린아이들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의 대회에서의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 황자였다.

“요, 요제프 황자님의 승리입니다.”

심판이 떨리는 목소리로 승자가 나타났음을 선언했다.

총 여덟 번의 끝내기 끝에, 리카르도 황자는 겨우 패했음을 인정했다.

대회장 전체에 깔렸던 숨 막히는 침묵은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누가 숨 하나 크게 쉬어도 들릴 듯한, 그 고요하디고요한 공기 속에서 황후가 나지막하게 이를 갈았다.

“저…… 저, 쳐죽일 놈.”

황후가 의자를 움켜쥐고 내뱉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기껏해야 빨리도 패배하고 돌아와 가까이 앉아 있던 1황자뿐이었을 거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어마마마, 진정하시옵소서.”

1황자 케이건이 슬쩍 황후를 달래 보았지만, 셀렌 황후의 노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셀렌 황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이미 대패하고 돌아온 제 첫째를 바락 노려보았다.

“진정? 내 사랑하는 첫째 아드님께선 여기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계시고, 둘째 아드님께선 저런 봉변을 당하셨는데 그런 날더러 진정하라 하신 겁니까?”

케이건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결과가 그리 나왔는데 어찌합니까. 리카르도가 오늘따라 몸이 안 좋았나 봅니다.”

황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이 안 좋았다고?

아니, 쌩쌩하기만 했다.

오로지 이날만을 위해 지난 5년을 보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리카르도였다.

최선의 컨디션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리카르도가 패배하다니.

그것도, 5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칼그림자의 날에.

그것도, 결승전도 아닌 본선 첫 경기에서.

그것도,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아렌느의 자식 요제프에게.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이게 다, 황제 폐하께서 저런 아이를 아직 황자로 두고 계신 탓이라는 생각밖에 들질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그 옆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함께 홀린 듯한 얼굴로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대회장에 앉아 있던 관중 모두가 서서히 따라 일어나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파도와도 같이.

황후는 황제의 뒤통수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이례적인 경기여서? 아니면, 일어서는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경기여서?’

그 어느 쪽이든 황제와 관중들의 반응은 황후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2